오늘은 주기도문 인간을 향한 청원, 두 번째에 해당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에서 “죄”(헬라어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1:4절을 보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죄”라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고, 우리가 용서해 준 죄에 대해서는 “죄”라는 핼라어 “오페이레마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우리를 용서하소서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가 지은 죄이든, 우리가 용서해 주어야 하는 죄이든 다 “빚”(헬라어 “오페이레마타”)이란 단어를 씁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죄, 잘못, 허물, 범죄 등등”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도 “빚”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통하여 “죄”를 표현한 것이 마음에 걸리었던지 마태복음 6:14절을 보면 “잘못”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6:12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진 빚을 우리에게 탕감하여 주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처럼”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죄”를 “sin”이 아니라 “deb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죄”라고 말할 때 성경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빚진 자”, 또는 “빚 탕감”이란 표현을 썼을까? 이것을 알려면 마태복음 6:12절의 “빚진 자”,“빚 탕감”, 마태복음 6:14절의 “잘못”이란 표현과 연관된 것이 성경에 없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즉, 죄와 빚 탕감을 연결해서 말씀한 곳이 없는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 진 종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마태복음 18:35절입니다. 즉,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일만 달란트 빚진 이야기는 죄와 죄 용서, 또는 빚과 빚 탕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 18:21~22절은 죄 용서를, 마태복음 18:23~34절은 빚 탕감을, 마태복음 18:35절은 죄 용서를 다룹니다. 빚 탕감 이야기가 죄 용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결국 죄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죄가 우리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시 주 후 1세기에는 빚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빚을 지면 그 빚에 종속됩니다. 그 빚에 끌려다닙니다. 죄가 이와 같습니다. 대등한 친구 관계라 할지라도 빚을 지면 둘 사이에 권력관계가 생깁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종속이 됩니다. 갑을관계가 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힘듭니다. 온전한 인격적 관계가 파괴됩니다.
본문에는 “우리”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네 번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적인 관계, 온전한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려면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사하심과 우리의 사함을 같은 선상에 놓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빚 탕감이 우리의 빚 탕감에 달렸었다는 배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으로, 그 용서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왜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열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마마보이나 마마걸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뒤치다꺼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빚을 탕감하는 사람으로, 용서하는 사람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당연히 이웃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의 빚 탕감을 경험한 사람은 당연히 이웃의 빚을 탕감해 준다는 강조입니다.
그러면 왜 용서해 주나요? 그러면 왜 빚 탕감을 해주나요? 마태복음 18:27절을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8: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라고 말씀합니다. 즉, 불쌍히 여김, 마음입니다.
“용서”라는 단어가 원어로 “아피에미”입니다.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쓰입니다. 마가복음에 무려 32회 사용합니다. “놓아준다, 풀어준다.”의 의미로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용서”의 헬라어는 “카리조마이”입니다. 주로 신약 서신서에 집중적으로 쓰입니다. “카리조마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의 동사형입니다.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즉, 용서가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6:13절의 인간을 향한 청원 두 번째 기도는 공동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빚은 인격적인 관계, 온전한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죄 역시 그 모든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은혜를 받은 자로써 서로서로 빚을 탕감해 주고, 죄 용서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용서함을 통하여 무너진, 파괴된 관계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