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은 고구려의 침입때 안시성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오직 안시성만이 연개소문에게 대항을 했고
연개소문 역시 안시성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연개소문과 안시성주가 서로의 위치를 인정해주는 선에서
타협을 했었던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고 있는 당태종은
안시성을 우회하여 건안성, 오골성을 쳐서 평양성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세적이나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그냥 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안시성의 급습을 받게 되고
그래서 보급이 끊기는 날이면 모두가 몰살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믿었던 요동성이 함락당하자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15만명의 구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구원군은 안시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당태종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당태종은
항복한 장수인 고연수 고혜진에게 벼슬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고
포로중 3,000명만 내지로 압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해 주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말갈병 3,300명은
산채로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혀 죽였다.
이것은 고구려 병사에게는 당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말갈족에게는 고구려를 도와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안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일 뿐 아니라
그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 또한 백전불굴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안시성 지역은 고구려의 중요한 철산지로써
이곳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국력이 좌우되었던 지역이다.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
당태종은 총력을 다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군사들은 요지부동으로 굳건히 버티었다.
당태종은 도종을 책임자로 하여
16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앞에 토산을 쌓았다.
그러자 고구려 병사들도 성 위에 흙을 쌓아 성의 높이를 높였는 데
결국은 당나라의 토산이 안시성을 아래로 내려보게 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태종은 도종을 토성수비대장으로 삼고,
도종은 다시 부하인 부복애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키게 했다.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공을 들여 쌓은 토산 한모퉁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흙더미가 안시성 성벽을 덮치자 성벽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마침 부복애가 자리를 뜨고 없었는 데
그때를 틈타 안시성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산을 탈취해 버렸다.
당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하고 3일 밤낮을 공격했으나
끝내 토산을 되찾지 못하였다.
당태종은 마침내 안시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위가 몰려오고 양식도 떨어져 가기 때문이다.
또한 태종은
성안에서 쏜 화살을 눈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은 포기하고 물러나가면서
안시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히 잘 싸웠다고 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갔다고 한다.
안시성 성주 역시
성 위에 올라 송별의 예를 갖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시성 전투 이후 당은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침범해 왔지만
다 물리쳤고
당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