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1895~1973)】"도구적 이성 비판"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이성(理性)에 있다. 동물은 본능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성은 인간이 지닌 사고 능력을 의미하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성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감성과 직관을 포함한 다양한 사고방식을 포함한다.
이성과 대비되는 능력으로는 감성(感性)이 있다. 감성은 외부 자극을 느끼는 감정이다. 이성의 개입보다는 주관적인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감성이 개인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반응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외부 자극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논리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성과 감성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이성만으로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올바른 파단을 내리기 어렵다. 감성의 경험과 반응이 개인의 욕망과 가치관을 형성하지만, 이성의 사고능력을 기반하지 않는다면 욕망만 남은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감성은 이성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이성은 감성을 통제하며 인격을 형성한다.
유대계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현대 시대의 이성에 관해 고찰하고 있다. 이성은 시대마다, 그리고 개인에 따라 기준이 달라진다. 이성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이성을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객관적 이성'은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질서와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개념들을 확립하고 최고선의 이념과 인간을 규정하는 문제, 그리고 최고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진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것들이다. 이러한 객관적 이성은 개인의 행위와 목표가 아니라 그에 도달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즉 객관적 이성 개념은 수단보다는 목적을 더 많이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절 그들이 질문했던 로고스(logos), 즉 진리에 대한 개념이다.
그에 반해 '주관적 이성'은 개인의 이해관계와 자기 보전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능력이다. 즉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는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 이해되고 있는 이성은 주로 객관적 이성으로 자기 보존과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쉽게 말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이성을 비판하고 있다. 과거에는 객관적 이성처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주를 이루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이성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주관적 이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성 자체를 주관화 시키고 자기 발전의 수단, 즉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주관적 이성이 자리 잡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과학이다. 과학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객관적 이성이었던 철학마저 과학적 사고방식을 활용했다. 개념을 분석하고 언어를 해체함으로써 엄밀성을 요구하는 과학 개념에 철학이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과학은 종교, 특히 교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대엔 자연이 신의 영역이었지만 과학은 그 신의 영역을 과학의 사실성과 엄밀성을 무기로 이성의 영역으로 포획했다.
교회는 과학적 이성을 받아들여 계몽에 나섰지만 그 계몽이라는 게 이성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보단 신을, 종교를 철학적 개념으로 무장한 이성으로 설명하려 했다. 종교 외부에서 신은 자연을 해석하려는 이성과 종교 내부에서 신의 섭리를 해석하려는 이성의 충돌은 종교와 이성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을 주장하는 여러 주의(~ism)들이 이성을 토대로 하며 생겨났지만 계몽의 도구로 사용되는 계몽은 오히려 사회적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었다.
현대 사회는 예전에 비해 학력과 지식이 높아졌다. 누적되는 지식의 양과 계몽의 일환으로 과거보단 전문지식과 이성적 사고 능력 또한 향상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이성은 여러 사상과 이념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이나 다른 집단에 대한 갈등과 폭력성을 유발하는 도구로써 전락하고 말았다. 정치적 이념, 경제적 원인, 종교적 신념을 방법론적 도구로 활용될 뿐 근본적 탐구나 존재론적 질문은 그만두고 있는 것이다.
이성의 도구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유발한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은 이익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원자화되고 집단 속에서 객체로서 존재하기보단 집단의 이익에 부합하는 또 다른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이성을 무기로 한 집단의 이익에 기대기에 집단의 행동에 포섭돼 버리는 것이다.
지금의 지식은 사유의 확장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 성향을 띠고 있다. 이는 개인의 영역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다수결 원칙도 이성의 도구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위 말하는 여론이라는 것도 권력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이성의 도구인 것이다.
주관적 이성이 도구화될수록 욕망은 구체화된다. 이성은 민주주의 체계에선 이념의 정당화로,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윤추구의 도구로 사용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책 후반에 대안처럼 제시한 이성에 대한 자기비판은 [도구적 이성 비판]이 나온 지 80여 년이 다 된 시점에서 보기엔 한없이 요원해 보인다. 현시대는 이상주의처럼 느껴지는 이성에 대한 자기비판은 오히려 더 많은 이성적 도구를 제시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전환되면서 더욱 강력한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욕망이 구체화되면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단순해진다. 지금 시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경고한 이성의 도구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지금의 4차산업혁명과 정보화, 인공지능의 발전은 더 강력해진 주관적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첫댓글 호르크 하이머는 휴식을 ‘노동을 위한 기만’이라 말한다.
아무튼 억압적 현실 속에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를 향한 진통제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흥은 일의 연장이다.
군대에서 많이 듣는 것처럼 ‘쉬는 것도 전투’다.
따라서 휴식도 노동이다.
왜냐하면 잘 쉬어야 다시금 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