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희 金文熙 (1889 ~ 1923)】 "김구와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초산면(楚山面) 운해천동(雲海川洞)에서 태어났다. 한편 189년도에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김문희(金文凞)라고도 썼고, 김해산(金海山)이란 이명도 있다.
1920년 3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부의 평북 초산군 장서(掌書)로 활동하였다. 연통부는 임시정부 내무부 소관의 국내 지방행정조직이자 연락기관으로 1919년 7월 공포된 연통제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는데, 임시정부의 명령과 공문 전달, 단원 모집, 군자금 수합 및 납부, 공채 발매, 정보통신 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2월에 개원한 제12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임득산과 ‘평안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4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4회 정기총회에서 강창제·김현구 등과 회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당시 중국 관내 지역에서 대두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단결 주장을 배경으로, 이동녕·홍진 등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김문희 임시의정원 의원 해직원서(1934.9.26) [판형3] |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조계 화룡로(華龍路) 원창리(元昌里) 자택에서, 도시락형 및 멜빵이 달린 수통형 폭탄의 사용법을 익혔으며, 29일 의거 당일 새벽 김구와 윤봉길이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라고 한다.
김문희를 임시의정원 의원이라고 한 일제 측 보고(1924.9.20) [판형3] |
1933년 11월 27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2월 18일 발생한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 엄순봉(엄형순)이 프랑스 조계 공부국 형사로 근무하던 옥성빈(玉成彬)을 처단한 사건으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1934년 1월 2일 국내로 압송되었다. 출옥 후 1935년 6월경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며 임시정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초산면(楚山面) 운해천동(雲海川洞)에서 태어났다. 한편 189년도에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김문희(金文凞)라고도 썼고, 김해산(金海山)이란 이명도 있다.
1920년 3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부의 평북 초산군 장서(掌書)로 활동하였다. 연통부는 임시정부 내무부 소관의 국내 지방행정조직이자 연락기관으로 1919년 7월 공포된 연통제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는데, 임시정부의 명령과 공문 전달, 단원 모집, 군자금 수합 및 납부, 공채 발매, 정보통신 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2월에 개원한 제12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임득산과 ‘평안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4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4회 정기총회에서 강창제·김현구 등과 회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당시 중국 관내 지역에서 대두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단결 주장을 배경으로, 이동녕·홍진 등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김문희 임시의정원 의원 해직원서(1934.9.26) [판형3] |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조계 화룡로(華龍路) 원창리(元昌里) 자택에서, 도시락형 및 멜빵이 달린 수통형 폭탄의 사용법을 익혔으며, 29일 의거 당일 새벽 김구와 윤봉길이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라고 한다.
김문희를 임시의정원 의원이라고 한 일제 측 보고(1924.9.20) [판형3] |
1933년 11월 27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2월 18일 발생한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 엄순봉(엄형순)이 프랑스 조계 공부국 형사로 근무하던 옥성빈(玉成彬)을 처단한 사건으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1934년 1월 2일 국내로 압송되었다. 출옥 후 1935년 6월경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며 임시정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