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폭우
여남의 살 쯤 때 지루한 장마에 산천에 물이 잔뜩 먹었고, 찔끔 난 하늘도 점점 어두워졌다. 안산도 우암산도 안 보인다. 쇠 깔을 지시고 할아버지가 들어오시며 느티나무 꺼리, 왜정 말 2차대전시 폭격을 대피했다던 방공호 그 위 펀 던 소를 끌어 오라신다. 빨리 뛰어가는데 우두둑 한 두 방울 왕방울만한 비가 머리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소는 참나무 쇠말뚝을 깊게 박고 바를 연결해서 풀을 넓게 뜯어 먹으라고 메 놓으면 늘, 뱅뱅 말뚝을 말고 돌아서 행동반경이 줄어들어 있었고, 어린 나는 이 말뚝을 뽑으려면 발로차고 옆의 돌을 찾아서 좌우로 치고 손으로 흔들어서 간신히 빼내기 일 수였다. 벌써 비는 쇠등어리가 흠뻑 젖어들기 시작했고 난 온 심을 다해 말뚝을 뽑고 쇠 고뺑이 줄과 바를 분리했다. 소는 가다렸다는 듯이 냅다 폭우를 피해 우리 외양간으로 달린다. 나는 바와 참나무 말뚝을 들고 뛰어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최상이었다.
대청에 젖은 옷을 벗어 짜고 있는데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천둥소리에 놀라서 귀를 두 손으로 막을라치면 다시 날카로운 비수 같은 번개가 스쳐가고 또다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린다. 어린 나도 들은 귀는 있어서 번개가 스치고, 천둥소리가 날 때까지 하나 둘을 세어서 아홉 열이 지나고 소리가 나면, 먼 곳이구나 안심을 했는데 점점 번개와 천둥소리의 진폭이 좁아지더니, 번쩍 하나, 셈과 동시 우당탕 꽝, 엄청난 굉음과 불빛이 드디어 불벼락으로, 50여 미터 지간 우리 사당집 옆의 큰 아카시아 나무가 맞아서 큰 가지가 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다. 당숙이 당시에 유행하던 광석 수화기를 들으며 안테나를 큰 나무에 메어 달았는데 이 놈이 화근이었다.
마당의 물은 큰 물방울 작은방울이 형제처럼 엄청나게 생기어 무수히 떠내려가면서 황토 냄새를 날리며 수채로 내 달리고, 사랑채의 빗물과 안채의 빗물은 경쟁이라도 하듯 폭포수로 내리붙듯이 내린다. 바깥마당 돌 쪽다리는 물이 넘쳐 길을 넘기 시작했다, 넘치는 물은 길을 깎아 먹기 시작했고 길이 터지면 구래 논으로 물이 벌 더듬을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멍석을 가지고 둑을 만들었다. 그리고 말뚝을 박아 길을 넘지 못하게 보강 막을 치자 물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말뚝이 될 만한 나무와 곰배와 도끼를 나르는 조수로 도왔고 우리 멍석 예닐곱 장이 다 들어갔다. 멍석이야 햇빛나면 말리면 되신단다. 과연 최상의 처방이었다. 동내 다른 어른도 달려 나오고 가마니와 멍석도 가져와 임시 방면으로 물을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쏟던 비도 점점 줄어 들었다. 그리고 여름날의 검은 하늘이 벗어지면서 하늘이 나타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처방은 현명하신 지혜였다.
그런 장마이후로 큰 비를 60여년 나는 구경한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 이상기후로 집중호우가 여러 곳에서 발생을 하고 있다. 안성에서 음성으로 충주에서 단양으로 연일 폭우 소식에 주민이 동영상을 제보하여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당시에도 비가 끗이면 우리 꼬마들은 무심천 뚝, 피난민 수용소 인근 제방으로 나가 물 구경을 한다. 누런 황토물이 넘실대면 우리는 헤엄쳐 건너가느냐 여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조잘거리면 오륙학년 큰아이가 너는 개헤엄이라 안 되고, 자기 같은 자유형으로 수영을 해 물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서 건너편 둔덕으로 가야 산다고 경험담처럼 얘기를 하면 이삼학년 들은 꼬리를 내리곤 했다. 당시 제방을 1차제방과 2차 제방으로 구분해 평시는 1차 제방으로 냇물이 지나고 2차 제방은 농사를 짓고 시는 하천사용료를 징구했다. 구역마다 경작자가 있었다. 2차 제방은 1년에 며칠 물이 넘으니 그 때를 피하면 소출이 난다. 주로 토마토, 양배추, 오이, 땅 호박을 농사지어 시민들에 공급하고 수해도 강해 비가 빠지면 다시 잘 살아났다. 지금은 2차 제방은 시민의 산책로와 운동장과 운동시설이 들어섰다. 서문다리에서 문암 까지 연결되어있으니 근 이십 리 상당한 거리다.
여름의 별미는 호박잎을 져서 된장에 덤벙 적시어 먹거나 ,쌈을 싸고 호박은 전을 부쳐 간장에 버무리고, 가지는 나물이나 냉국으로, 오이는 냉국이나 소박이로 열무는 김치가 전부일 때, 반찬은 가끔 미꾸라지 지짐이 별미였다. 송사리는 작아서 배를 따면 먹을 것이 없고 붕어나 꺽지나 메기는 귀해서 매운탕을 얻어먹던 기억은 별로 없으나 미꾸라지 지짐은 가끔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장마로 도랑물이 많아지면 얼기미와 대야를 들고 방죽 알부터 황구 대 한지적굴고아원 입구 다리까지 도랑에서 올림발로 더듬어 가면서 몰 면 얼기미에 미꾸라지들이 제법 들어왔다. 두 살 밑의 동생이 같이 나와야 잡기가 편하다. 대야를 들고 따라오면서 나는 얼기미를 대고 막아서고 동생을 발로 풀을 몰 면, 내가 뜨는 방식으로 잡는다.
매번 먹을 만큼 잡지는 못했던듯하다. 고무신짝에 몇 마리 붙잡아올 때면 할머니는 닭에게 모이로 줘 버렸다. 제법 되면 호박잎으로 왕소금을 대나무 소쿠리에 넣어 부쉬면 허연 거품이 나면서 미꾸리는 팔짝팔짝 뛰었다. 우리는 얼마나 따귀우면 저리 뛸까? 생각은 했지만 먹이사슬의 먹잇감에 대한 동정심은 별로 없었던듯하다. 이 요리는 어머니가 잘하시는데 깻잎과 풋고추를 넣어서 무슨 비율로 양념을 하는지 나는 그 때의 맛과 냄새를 지금도 기억한다. 할머니는 깔끔하신 성격 탓에 우리가 잡아오는 비린내 나는 것을 덜 좋아하셨고, 구더기를 먹는다고 닭고기도 안 잡수셨다. 그러나 가을의 두부와 무를 빗어 넣은 물 명태 지짐과 봄날의 생선굴비 찌개는 예외였다. 비늘 없던 꽁치 고등어 미꾸라지 양미리와 돼지고기 국은 할머니께는 금물이었다.
금년은 아직도 붓을 놓지 못하고 출품준비를 하는데 마고가 무슨 작품이고 언제 끝내는가 묻는다. 지방출품에 수요일 마감이라 답하고, 워찌 그리 관심이 크냐? 물으니, 김장 배추 무 갉으려 한다며 머슴으로 쓰려니 내일 까지 끝내라 호령을 하신다. 금년은 ‘대한민국서예전람회’에 두 번째 입선을 하고 지방전람회 특선과 입선을 했는데 지방은 내년에 하나는 끝이 날 듯하고 하나는 한 해 더해야 할 듯하다. 시작한 것이니 끝을 보려는 것이지 지방추선작가가 돼 봐야 한국의 현실은 너무 참혹하다 이 것으로 밥을 벌어먹으려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눈물의 찬밥을 먹는 것이 안타가운데, 우리야 이미 다른 직업으로 정년을 마치고 밥술이나 먹고 사는 계층이니 고고하게 품위 지키며 살아감이 마땅하다.
어머니가 이 여름에 해주시던 미꾸라지 지짐 냄새와 깻잎 냄새와 양념 냄 새가 코를 스친다. 마고가 뭔 요리를 저리 하고 있을까?
저녁식사를 하시라는 소리가 들리고 마쳐 몇 자 남을 것을 쓰고 나가보니 생 고등어 지짐이었다. 국물 맛이 옛날 어머니 맛인데 깻잎은 없다. 분명히 깻잎냄새가 났는데 옆에 깻잎나물이 있었다. 무와 생 고추의 자박한 국물을 떠서 밥에 얹어서 한 술 먹어보니 그 맛이었다. 바로 어머니가 해주시던 미꾸라지 지짐 맛 그러나 고등어지짐이다.
우리도 개 한 마리 키우자고 손자 사형제들이 보채고 남의 집 개만 보듬어 만지고 따라다니니, 깔끔하신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한 판 패하여, 할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장에서 사오게 하셨다. 당시는 개 이름이 모두 미국사람이름 비슷했다, 옆집의 개는 젝크, 위집은 쫀, 고아원 개는 베스 등인데 우리 개는 이름이 뭐였는지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아무튼 큰 순딩이 조선 누렁이 개였다. 순하디. 순하여 비렁뱅이가 와도 대청 밑에 숨어 겨우 몇 번 짖어대는 순둥이다. 그런데 이 놈이 커서 털갈이를 하고 멘스를 하자 깔끔하신 할머니 역정으로 늘 우리 집에서 없어지곤 했다. 학교 갔다 오면 개가 집을 나가서 안온다고 하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개가 나갔다는 방향인 소생이 고개를 넘어 그냥 산으로 들로 찾아다니다 말았다. 그 비밀은 훗날 알았다. 할머니의 안방마님 영향력이 다하고, 아버지도 내가 삼학년 때 댕기기 시작한 충주, 옥천, 진천, 중원, 괴산 등 공직에서 퇴임하시고 ,어머니도 들어와서 살림실권을 쥔 이후는 우리 개는 졸랑거리고 어머니를 따라 다녔다. 그 후 우리 개는 딸처럼 이름이 늘 몇 번째라도 ‘복실’ 이었다.
2020.08.01.
추억속의 폭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