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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동인들은 ‘조선’의 현재와 장래에 대한 고민을 붙들고 있었다. 함석헌의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냐?'(<성서조선> 5호, 1928. 7), 김교신의 '조선인의 소원', 정상훈의 '조선의 장래와 기독교'(<성서조선> 6호, 1928. 11) 등에서 이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조선의 장래와 기독교'는 1928년 여름 전도여행 중 개최한 부산과 영동 집회에서 정상훈이 강연한 강연록 전문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 글은 비분강개한 지사(志士)적 목소리로 시작된다.
제군은 조선에게서 조선 사정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조선의 형편이 어떠하며 우리 형제의 살림살이가 어떠합니까. 아마 「말이 아니라」 하는 것이 그 정경을 쉽게 표현한 말이겠지요. 멸절의 마수가 와서 거머쥐려 하는데 아니 거머쥐이려고 손부름 발버둥도 못하고 그 속에 쥐이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상이겠지요. 과연 행로난行路難 생활난生活難의 소리는 도회나 농촌이나 산간이나 야지野地나 북에나 남에나 우리 형제의 목적이 인印치이는 곳에는 그 어디임을 물론하고 일양一樣으로 훤자애호喧藉哀呼되는 바가 아닙니까.
<성서조선> 제6호, 1928. 11. 3쪽.
이 글에서도 억압당하는 자의 정체성은 뚜렷하다. 정상훈은 이를 ‘절망의 낙인을 전액前額에 새긴 조선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 절망은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그 어디에서도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던 통일전선 운동, 문예운동, 농촌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죽은 자 만 명이 모여도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상훈의 절망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에 앞서 해결해야 할 근본문제는 생명을 얻는 것이었다. 정상훈의 글은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근본적 갱생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민족이 새로운 삶을 얻는 길이었다.
저는 결코 일시의 감정으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외다. 고금의 역사와 저 자신의 경험에서 이것이 우리 민족이 갱생하는 유일 절대의 방도인 줄로 확신하고 사랑하는 나의 형제에게 호소하는 것이올시다. 제군이여, 우리 한 사람이 좌하고 우함에 우리 전족全族의 장래가 판정된다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행로는 작정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성서조선> 6호, 1928. 11. 14쪽.
여기서 질문 하나. 한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 곧 조선 민족갱생의 길이 될까? 지금 감각으로는 쉽게 동의하기 힘든 이 진술이 당시 강연장에서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도 이심전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터, 여기에 <성서조선>이 말한 ‘조선적 기독교’의 성격이 놓여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민족주의의 시대였다는 것인데, 당시 상황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곧 민족적 정체성으로, 개인의 구원이 곧 민족의 구원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목도하고 있는 민족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기독교적 구원은 곧 민족갱생의 길로 제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기독교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 꼭 사회운동을 부정해야 했을까? 정상훈의 경우 사회운동에 대한 부정은 전면적인 것이었는데, 그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사회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예로 문예운동에 대한 비판을 한 대목 옮겨 보자.
문예운동으로 민족정신을 개조하고 민족갱생의 도를 강講하려는 이가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들의 문예상 성과는 무엇입니까. 근년에 우리 민족이 겪어온 길은 넉넉히 위대한 문학을 산출할 호적好適의 재료를 제공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어디 위대한 문학이 산출되었습니까? 어디 우리 민족의 귀추를 보여주는 이상의 거화炬火가 있습니까? 기루홍등妓樓紅燈에서 연애소설이나 써서 곱게 자라나는 우리의 젊은 형제나 자매를 독毒하는 것이 그들 문사의 문학적 제작이 아니오니까.
<성서조선> 6호, 1928. 11. 6쪽.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소설이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은 근대적 사랑, 즉 자유연애가 그 시대의 정신이었고, 그것이 비분강개한 기독교 지사의 눈에 한심한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대로 그 시대의 당면한 근대성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고 이 시기 사랑이라는 주제는 근대적 개인의 성립과 결부되어 있었다고 본다면, 사랑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꼭 독이 된다고 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1920년대 말은 이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기반한 문예운동이 각기 당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정상훈의 문예운동에 대한 비판이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문예운동이 구성하고자 했던 근대적 개인 또는 계급 주체와 <성서조선>이 구성하고자 한 '조선산 기독교'가 서로 다른 주체성의 형식이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적 근대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사회운동보다 죄에서의 해방, 또는 회개가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김교신과 함석헌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5호에 수록한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냐?」라는 글에서, <성서조선> 창간사의, ‘금일의 조선에 줄 바 최진최절最珍最切의 선물은 신기치도 않은 신구약 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라는 김교신의 글을 다시 불러온다. 그는 조선 민족에게 정치적, 경제적 자유, 대동단결, 학문연구 등이 모두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에서의 해방’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조선에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써다. 살아야 하겠다—살기 위해서는 우선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죄에서의 해방은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극이 간단하고 명료하다. 수백 항, 수천 항의 이상국을 쓸 것도 없고 흥국책興國策을 쓸 것도 없다. 선혈과 인육으로 장식하는 혁명론도 아니오 사회개조론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인하야 오는 ‘죄에서의 해방’이다.
<성서조선> 5호, 1928. 7. 7쪽.
한편 김교신의 「조선인의 소원」(<성서조선> 6호, 1928. 11)은 정상훈의 글 「조선의 장래와 기독교」 바로 앞에 실려 있어 함께 읽을 만하다. 이 글에서 김교신은 ‘금일의 조선’의 ‘제일의적第一義的 급무’가 조직체를 결성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회개란 신과 사람 사이의 정직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실성을 회복하는 일인데, 이 둘이 회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 하나이고, 여기에서 비로소 조직체 생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형제여 만일 조직체 생활에 실패할지라도 단념치 말고 의용의 호기가 불생不生한다고 자기自棄치 말라. 오인吾人은 금일의 문제요 실제의 제일의적 급무로 젊은 조선인의 소원을 피로披露하노니 조선 형제여 선위先爲 회개합시다. 신 앞에 자과自過를 인식 회개하는 신과 사람 사이의 정직성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실성, 이 두 가지는 이양일원二樣一元의 기반이다. 신실(Sincerity)을 결缺한 개인들을 모아 완전한 조직체를 성成하려 함은 마치 시멘트紛을 섞지 않고 사립沙粒만으로 조합하려 함과 같은 것이다.
<성서조선> 6호, 1928. 11. 2쪽.
김교신이 조직체 생활에 앞서 회개가 필요하다고 할 때, 이는 정상훈과 함석헌이 사회운동을 부정하면서 기독교적 구원을 말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정상훈과 함석헌이 사회운동 등을 근본에서 부정하면서 그 대척점에서 기독교적 구원을 말한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정념(pathos)를 드러내고 있다면, 김교신은 ‘회개’를 도덕적 의미로 재해석하고 이를 조선에서 정치와 경제 조직체가 성공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덕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상훈을 위한 첨언. 정상훈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그는 1901년생으로 김교신, 함석헌 등과 나이가 같았다. 동인 중 유일하게 신학을 전공했으며 그 때문이었는지 <성서조선> 초기 3년 동안 편집인을 맡았다. <성서조선> 창간호에 발표한 <크리스찬이란 누구를 칭함이뇨>는 크리스찬이라는 명칭의 기원을 밝히고 이에 비추어 현대적 의미를 논의한 글이다.
1928년 여름 부산에서 경성에 이르는 전도 여행과 1929년 여름 서북 지역 전도 여행을 주도했으며, 1930년 1월 마산 집회를 단독으로 실행한 청년 전도인. <성서조선> 통권 16호까지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가장 많은 글을 발표하였지만 이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살핀 「조선의 장래와 기독교」 외에도 성서연구를 표방한 글들을 다수 발표하였고, <성서조선> 초기 편집인이었던 만큼 편집후기와 그 외 짧은 글들을 작성, 수록하였다.
정상훈이 1930년 8월 남해로 내려간 이후 성서연구 모임을 재개하면서 김교신은 '정상훈 형이 남해에 돌아갔으므로 우리 연구회는 전연 소인으로 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소인'은 비전문가, 아마추어를 뜻하는 말이다. '성서통신'에 따르면 이후 한 차례 정상훈이 상경하여 성서연구 모임에 참석했다. <성서조선> 편집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이 힘들었던지 김교신은 정상훈의 활동에 대해 존경의 뜻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상훈은 1932년 무렵 성서연구회를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월 5일 김교신의 일기에 정상훈에게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적고 있다. 일 년 후인 1933년 신년 벽두에 활인동 본사에서 성서연구회 집회가 열렸는데 정상훈은 '기어이 불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