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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해아래의 인생, 해위의 인생
전도서 1장 2절~3절
2절: "헛된 것의 헛된 것, 헛된 것의 헛된 것이여.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3졀: "사람이 모든 수고를 다하는데 일생 동안 얻는 이익은 무엇이뇨?“
"전도서"는 성경의 한 부분으로, "옛 선지" 또는 "구약 성서"라고도 불립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전도서는 솔로몬 왕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지혜와 부와 권력을 가졌던 솔로몬이 쓴 책입니다.
전도서의 중심 주제는 삶의 의미와 가치, 인생의 허망함, 노동, 지혜, 돈, 쾌락, 무례, 시간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철학적 고찰입니다. 책 전반에 걸쳐 솔로몬은 세속적인 쾌락이나 부의 허망함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전도서는 지혜문학이며 "지혜문학"은 지혜와 철학적인 측면을 강조한 문학의 한 장르를 나타냅니다. 이는 종종 철학적인 사상, 인생의 의미, 도덕, 삶의 가치, 인간 심리 등에 대한 심오한 고찰과 깊은 사유를 다룹니다. 지혜문학은 독자에게 사색적인 경험을 제공하거나, 삶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텍스트를 포함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헛된 것의 헛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세속적인 쾌락이나 세상의 임시적인 가치에 대한 헛된 것들을 강조하며, 그 대안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삶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묻는 질문은 사람이 일생 동안 모든 노고와 수고를 다하더라도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한편, 세속적인 성취가 실제로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 주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욥기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으며, 증오나 탐욕으로 인한 죄를 피해왔습니다.
욥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비난하며 그의 신앙을 시험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에게 시련을 주도록 허용했습니다.
욥은 건강, 재산, 가족 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불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욥은 세 명의 친구들과 그의 시련과 고난에 대한 대화를 나눕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의 죄에 기인한다고 주장하지만, 욥은 자신의 정직과 하나님께의 신뢰를 유지합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질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강력하며 지혜로운 응답으로 욥에게 말합니다.
욥은 끝에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전에 잃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욥의 이야기는 인간의 믿음과 시련에 대한 고뇌를 탐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는 중요한 성경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삶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삶의 목적, 의미, 도덕적 삶의 원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사랑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감, 순종, 경외를 통해 인간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화합을 통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습니다.
헛되고 헛되지 않는 삶은 가족, 이웃, 친구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 용서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 도덕적인 행동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선을 택하는 행동을 통해 인간은 더 높은 도덕적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봉사는 하나님이 각 인간에게 주신 독특한 재능과 일에 힘쓰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느낄수 있습니다.
해아래 인생의 삶의 의미는 믿음, 사랑, 선, 악, 용서, 봉사 등의 원칙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0. 영의 세계를 보는 사람
열왕기하 6장 14절~20절
6:14 그러자 아람 왕은 도단에 말과 전차와 중무장한 군대를 보냈습니다. 아람 왕이 보낸 군대가 밤에 은밀히 가서 그 성을 에워쌌습니다.
6:15 하나님의 사람의 종이 일찍 일어나 나가 보니 말과 전차를 이끌고 온 큰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종이 물었습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6:16 예언자가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저들과 함께하는 사람들보다 많다.”
6:17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셨습니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마차가 산에 가득했는데 그 불 말과 불 마차들이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6:18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향해 내려올 때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저 사람들의 눈이 멀게 해 주소서.” 그러자 엘리사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아람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6:19 엘리사가 아람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길도 아니고 성도 아니다. 나를 따라오라. 그러면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데려다 주겠다.” 그러고는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6:20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에 이르자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셨고 그리하여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영의 천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음,
죽은 아들을 살림,
가루를 가지고 독을 없앰,
작은 양의 식물로 많은 사람이 먹음,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치유됨,
병이 게하시에게 옮겨짐,
쇠도끼를 찾음 등 7개의 기적 이야기
하나님은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할 때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여호람 왕에게 알려 미리 예비하게 함으로써 번번히 공격에 실패한 것”이다. “17절을 보면 게하시는 처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눈을 여니 보이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게하시와 엘리사의 차이는, 환경과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본 것과 기도하며 영안으로 본 것이었다. 게하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바라보고 절망했으나, 엘리사는 영안을 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봤다
즉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믿음이 부족하기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게하시는 당시 위대한 스승인 엘리사와 늘 함께 있었지만 그 자리에 나타나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게하시에게 천군을 보고 인지할 수 있는 매체인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하시는 믿음의 눈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군사가 바로 눈앞에 존재함에도 볼 수 없었다”며 “엘리사의 기도 후 게하시에게 ‘영안’이라는 매체가 주어짐으로써 그곳 천군을 시각적으로 보게 된다.
또 “18절에서는 ‘눈을 어둡게’ 하는 반대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성을 포위한 아람 군사들도 하나님의 천군을 보지 못하는 상황 역시 엘리사는 기도를 통해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해, 볼 수 있었던 것 조차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영적이며, 무한하고 무조건 적인 사랑, 지혜, 권능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인간도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호응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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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의협심이 불타는 사람
출애굽기 2장 11절~20절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 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2: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2: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2: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 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 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 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2: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2: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 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 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고되게’ 노동했다는 말은 노예 상태에서 노동한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좌우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단 한 번의 가격으로 사망했는지, 주먹 다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모세에게 큰 분노가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었고, 이 시체가 발견되었는지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히브리 백성들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실수로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당당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죄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그곳에 다시 찾아갑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는 그들을 화해시키고자 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모세가 전날에 저지른 범죄를 다 알고 있는 듯 모세를 향해 누가 당신을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며 자신도 죽이려고 하느냐며 따집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베푼 선의가 악의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억울한 상황을 당면하게 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좋은 뜻으로 누군가를 도와주었지만, 또는 공동체를 위해 선의로 어떤 일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선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계시고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신의 범죄가 탄로되었음을 깨닫고 15절에서 모세는 바로를 피해 도피를 결정합니다. 바로가 보기에 모세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미디안은 시나이반도를 지나 직선 거리로 600km 정도 떨어진 사해 북동쪽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의 특성을 지닌 미디안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여 미디안을 특정 지역으로 보기보다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곧 광야 지역 전반을 의미하기도 하고, 애굽이 아닌 장차 이스라엘이 가야 할 땅으로 보기도 합니다. 미디안 땅에 도착한 모세는 이제 40년간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준 행동을 볼 때 모세는 심성 자체가 불의에 대항하는 의로운 성품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동족의 문제에 개입했던 모세는 지금 약한 자의 처지를 보고만 있지 않고 또한 개입했습니다. 그 사건을 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가서 알립니다. 18절부터 20절 말씀에 르우엘은 딸들이 여차여차해서 일어난 일들을 알릴 때 책망하듯 이야기합니다. 큰 도움을 준 사람을 대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곧바로 모세를 청하게 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거처가 없던 모세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치며 생활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뿐 아니라 한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애굽에서는 마음도 편치 않았고, 애굽인에게도, 동족 히브리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나그네와 같은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르솜’, 이 이름은 모세의 생애를 요약해 줄 뿐만 아니라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예고해 줍니다. 여전히 애굽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동족 이스라엘을 영적인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이 이제 곧 모세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지도자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람 의협심에 불타는 사람을 기억하고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로 훈련의 시간이 찾아오군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의 노력과 수고가 헛된 것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에는 우리가 미처 다 깨닫지 못하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가 들어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인생의 실패를 겪으며 고통과 절망과 외로움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른 훈련의 과정임을 기억하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이 나그네와 순례자의 여정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천성을 향한 노정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야 합니다.
12.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탄생
이사야 11장 1절과 2절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2 주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를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구약성경의 이사야장에서는 메시아가 이새 후손으로 올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절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상이 다윗이었지, 이새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끊임없이 다윗이 ‘이새의 아들’인 것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이순신장군을 합친 정도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새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제왕교육을 받고, 그래서 훌륭한 왕이 되고 메시아의 그림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만들어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새의 줄기’는 다윗의 계보를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메시아에게는 이 족보가 사실상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셨지만(마22:42-45),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천한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더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황제의 아들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헤롯 왕가의 피를 받고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훨씬 잘 수긍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이성을 초월할 때가 많습니다. 1절의 ‘줄기’는 특히 ‘쓰러진 나무의 줄기’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에서 싹이 날 것이라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뿌리에서 싹이 나더라도 땅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작고 초라하게 여겨질지라도, 자신의 무능하게 여겨짐에 눌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들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메시아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인 ‘오직 나의 영으로’입니다. 우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따라서 살면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가십니다.
이사야 11장은 메시아와 메시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로 인해 메시아의 진정한 상이 세워질 수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예수님을 기적적으로 잉태하게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31절). 그러자 마리아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자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5절)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의 특수한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 지혜가 뛰어났습니다. 이사야서 예언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서 예언의 성취에도 똑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에 대한 표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성령을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라고 이사야는 불렀습니다. 지혜(wisdom), 총명(understanding), 모략(counseling)의 영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면 성령님께 가서 “성령님,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가라, 가지 말라, 하라, 하지 말라, 이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상담을 해주십니다. 또 이사야는 성령님을 “재능의 영” “지식의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옛 이스라엘에게 다윗의 왕국이 중요한 까닭은, 다윗이 그들에게 정치적인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예언은 다른 이유 때문에 다윗왕국의 회복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여호와를 경외함”입니다. 다윗왕국이 주변의 나라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왕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에 불과하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다윗왕국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저 다윗의 족보를 잇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어 기쁨으로 주님 품에서 영원히 살 그 때를 준비하고, 부활의 주님이 오셔서 영생의 복 된 자리로 영광중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오늘도 묵묵히 주어진 현장에서 주의 뜻을 이루며 복음의 증인 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인 복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댓글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로스사역자 (2) 방에 있는 것은 삭제했습니다.
항상 1등이시네요. 사역도 1등으로 잘 하시고 주님 앞에 가셔서 상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