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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요 10:1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F.R. 데이비드의 “워즈”(works)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엄청 좋아했던 곡인데,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아. 나에겐, 어떻게 너에게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도 해주셨고,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너에게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면서, 염려와 근심 속에, 불안한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내일 일입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하루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되어지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욕심과 탐심, 분노와 살인,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내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주 평안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또 그렇게 고요하게 하루가 마감되어지기를 원하고 원할 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 나름대로 잘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가 아니라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셨습니다.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특별히 가장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왕들에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왕들은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지 못했습니다.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기미 상궁입니다. 그는 왕의 식사 전에 음식을 먼저 맛보는 사람입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가를 검사하는 것입니다. 음식에 누가 독을 탔을까봐, 함부로 먹지도 못한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음식만 그렇습니까? 어디를 가도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왕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위무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 15일 동안, 광해군으로 위장한 대역이 조선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신문에, 어느 나라 대통령은 살해 위협 때문에, 대역을 쓰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 그저 평범하게 하루를 산다고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살해 위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아무 일없이 아주 고요한 한밤 중에, 뜬금없이, 계엄을 선포함으로, 우리에게 불안하고 혼란을 야기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거나, 더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무력으로 통제하려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 동행하여 주시고, 우리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될 때,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우리의 삶에 부족한 것이 있을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공급하여 주시고자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시는 임마누엘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항상 함께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거나 멀리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여 주신다고 하셨음으로,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을 뿐 아니라, 항상 함께하여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다.
조금씩 드러나는 계엄에 관한 이야기들 가운데, “배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계엄을 준비하면서, 자기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속인”, “점 보러 다녔다.”라는 말들도 등장합니다. 그들 마음속에 평안함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준비하면서도, 평안함이 없었을 것이고, 실패로 끝난 지금은 더욱더 평안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과 관련되어, “조사, 구속, 재판, 감옥”이라는 말들이 계속 따라다닐 것입니다. 근심과 두려움 속에, 어떻게든 살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평안한 삶입니다. 근심거리, 걱정거리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근심과 걱정거리가 몰려옵니다. 불안한 환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으로, 그 근심거리와 걱정거리를 이겨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라고 고백했습니다.
“태연하다”고 하는 말은 “든든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군대가 그를 대적하여, 진을 치고, 원수들이 그를 친다고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다윗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요, 구원이 되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시기 때문에,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함께하여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함으로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등이 되어주시고,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8-29)라고 고백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 등불을 켜서, 넘어지지 않게 해 주시는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라고, 이 땅에 오실 메시야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분이 아니라, 두 날개를 펴서,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 146:7)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는데, 죄의 종으로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날개를 활짝 펴서,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이 생명과 자유를 오직 우리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함으로,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셔서, 이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을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누리며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