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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5주)
“오늘 밤은 왜 다른 날의 밤과 다른가요?”
출121~14; 롬13:8~14; 마18:15~20
오늘 구약의 말씀은 “유월절 규례”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3500년 전 이집트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신과 진배없었던 “파라오”(큰 집, 곧 성전을 의미하는 말로 파라오는 곧 그 성전의 신을 가리킵니다)를 섬기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유”를 향하여 어렵게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이런 긴 시작의 여정은 식구들이 모여서 양을 잡고 음식을 먹는 예식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유월절 의식입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식구들끼리 모여 유월절 의식을 갖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예식을 인도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날의 밤과 다른가요?”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조상은 이집트의 노예였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긴 출애굽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세데르”라고 불리는 격식 있는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지요. “오늘 밤은 왜 다른 날의 밤과는 다른가?”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날의 밤과는 다른 밤을 지나본 적이 있나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부끄럽긴 합니다만, 저는 다른 날의 밤과는 다른 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30대 초반에 여름방학을 맞아 대전에서 5박6일의 집단상담을 처음 경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집단상담이 끝나면 원산도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뵐 약속을 하고, 저는 대전에서 대천항으로 가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대천항으로 가서 함께 원산도 가는 배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늦게 대천항에 도착해 보니 원산도 행 마지막 배는 떠나고 아내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원산도에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저를 기다리다 마지막 배를 타고 원산도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저만 홀로 남았는데, 제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막막하더군요. 저희 아버지는 대천항에서 오천항으로 오면 교인의 배를 가지고 데리러 나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천 파출소에 가서 경찰에게 돈을 만원을 빌려서 택시를 타고 오천항으로 갔습니다. 오천항에 가서 원산도에 전화를 드렸더니, 그날 저녁은 출항금지가 떠서 배를 띄울 수가 없어 내일 아침에나 배를 띄우겠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오천항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에 가서 밤을 보내려고 목사님 사택에 들려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수상한 사람인 줄 알고 교회에 들이기를 꺼려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오천항 부둣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지샜습니다. 척썰이는 파도소리, 하늘의 수많은 별들, 그리고 8월의 밤바람. 이 모든 것이 지난 5박6일의 경험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울다 웃다 노래 부르다 보니 뒤편 하늘부터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특별한 밤을 제가 자유를 찾아 나선 첫 번째 유월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어린양은 저의 과거의 미성숙한 나였습니다. 그렇게나 비난하던 과거의 나를, 판단없이, 깊은 연민으로 받아주고 포옹하던 그날 밤. 저는 그날 하나님께 드렸던 찬양과 감사를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제게 내린 은총에 감격하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후 출애굽 이후의 광야시련이 다가왔지만, 그 광야생활을 견뎌내게 한 것은, 이렇게 살리라, 굳센 각오와 결심이 아니라, 그날 “은총에 대한 감격”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제가 아직 가나안 복지에 이르지는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과거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그래도 지금 조금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저의 첫 번째 유월절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바로 유월절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라고 합니다(우리로 하면 유월절은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설날인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자신들이 자유인으로 바뀌는 것을 기념하는 날을 설날로 삼은 것입니다.
2절 말씀 한번 보십시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 때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냥 날짜가 바뀌는 새해는 진정한 새해일 수 없습니다. 새 것이 되어야 새해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으로 향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새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어서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호주의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그 호주의 원주민들은 사람의 이름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그 당시의 특징으로 부른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이 변하면 그 사람의 호칭도 바뀐다고 합니다. 또한 매년 자기가 태어난 날을 생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내적으로 뚜렷이 성장했을 때 생일 파티를 연다고 하지요. 그래서 새로 챙기는 생일(파티를 여는 시점)은 자신이 정한다고 합니다.
오늘 과거의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새해가 되고 새로운 시점이 됩니다. 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읽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과거의 “이스라엘의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만 듣는다면, 오늘 본문은 매우 지루해질 것입니다. 사실,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 후손들이 아주 세심하게 지켜오고 있다는 것은 유월절을 “조상들의 유월절”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월절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각자의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신 것이구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유월절”, “나의 유월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유월절”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이 본문을 아무런 느낌 없이 지루하게 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유월절을 자신의 유월절, 자신의 <파스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었다는 것으로 이해했고, 자신들이 이 파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는 삶은 자신의 거짓자기가 죽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삶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의식도 못하면서 세상의 힘에 놀아나던 “노예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유인의 삶”으로, 거짓자기의 삶에서 참자기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출발을 기념(기억)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세례는 그 시작을 알리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 때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을 나중에 더 깊이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그리 강렬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것을 붙잡고, “나의 유월절”을 계속해서 갱신해 가는 것, “오늘 밤”을 “다른 밤”과 구별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으로 나가는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월절 규례에 따르면, 양을 잡아 문에 피를 바릅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이집트를 칠 때, 문에 피를 바른 이 표적을 보고 “내가 넘어간다”(파사흐티>라고 했지요. (유월절 <페사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즉, 유월절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하고 살아나게 되었고, 자유의 몸이 되어 새로운 삶을 찾아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칠해진 존재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가 칠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재앙은 재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게 하는 상징들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온 고난과 시련을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 표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그때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17세기 부활의 로랑 형제는 평생 수도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중에는 관절통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포도주통을 나르는 일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프라이팬에서 달걀을 뒤집고 바닥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주울 때에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데 누룩을 넣지 않은 빵(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을 유비적으로 본다면,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은 자기가 죽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은 노예들의 옛 삶을 상징합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부드럽지 않은 거친 빵입니다. 이것은 고급진 잔치상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의 상징이고 천민의 상징이 되는 빵입니다. 옛날 우리는 이것을 개떡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이런 아픔의 역사, 노예 시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쓴 나물은 그들의 고통스런 상처들을 의미합니다. 자유를 찾아 가는 길은 바로 이것을 직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는 과정이며, 자신의 옛 것을 직면하고 자신의 옛 상처를 직면하는 과정입니다. 이것들을 외면하고는 새로운 자유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직면하고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과거의 나, 상처있는 나, 아픔의 역사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더 큰 은총 안에 있고, 더 큰 자기 안에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과거의 나, 상처받은 나를 지금까지의 나의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찌질한 모습을 나의 눈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분명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내가 영광스러운 나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부끄러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판단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해방과 자유의 열쇠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려면 하나님의 현존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있음을 아는 것 말입니다. 내가 신발끈을 매는 순간에도, 내가 걸레를 빠는 그 순간에도, 내가 아이들의 손을 잡는 그 순간에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여있음을 아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덜 판단하며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부활의 로랑형제의 글을 한번 보십시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은 소망 가운데서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지식에 비례하여 자란다. 우리의 믿음이 이 거룩한 연습을 통해 하느님의 비밀을 알게 될수록, 하느님 안에서 세상 육체들의 아름다움을 능가할 뿐 아니라 가장 완벽한 영혼들과 천사들의 아름다움을 무한히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수록, 우리의 소망은 자라고 강해진다. 우리의 소망은 그것이 누리고자 하고 또 어떤 식으로든 맛보는 보화의 위대함 덕분에 확고히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서 볼 것은 11절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습니다. 이것은 막 출발하려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집트를 떠나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해 출발하려는 사람들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깨닫는 쪽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깨닫는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으면 작은 것이라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아니 진정한 깨달음은 행동이 따라오게 됩니다. 행동이 따라오지 않는 깨달음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을 떠나 출발하지만 이들은 이집트를 벗어났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출애굽이 곧 가나안 복지로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험난한 광야를 통과해야 했고, 또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도 오랫동안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으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인이 되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알고 그 알음에 알맞은 사람으로 바뀌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내 광야로 나아가 자신들의 신분을 좀더 분명히 알게 되고, 그 신분에 알맞은 삶을 연습하는 시간을 갖데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현존 연습입니다. 자신들의 삶 어디서나 하나님의 현존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는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광야 속에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라고 해서 무슨 굉장한 것이 아닙니다. 한낮 구름 한 점에서 하나님을 뵙고, 밤의 등불 한 줄기에서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것, 아,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고 있구나, 기억하는 연습!
오늘 14절에서, “이 날은 너희가 기념해야(기억해야) 할 날이니, 너희는 이 날을 주 앞에서 지키는 절기로 삼아서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 은총의 그 밤을 특별한 날로 기념하는 것, 작은 은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자유를 향해 나가는데 원천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자유의 길은 우리가 결심하고 떠난다고 해서 바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구습이 있습니다. 두려움, 편견, 욕심,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 완벽주의, 시기심, 분개, 과도한 자기의심. 또한 많은 애착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직함이나 인정에 대해서, 타인의 칭찬에 대해서. 물론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이런 것들은 선하게 쓰이기보다는 우리의 무질서한 애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고 이 깨달은 것을 자신의 진정한 앎으로 바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존 연습이요,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조명의 단계입니다.
영적 여정이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때, 이 말은 현재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사실,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은 뒤집어 말하면 내가 지금 자유롭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뭔가에 계속 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자유롭지 않고 뭔가에 계속 걸려 넘어질 때, 우리는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안에는 자유로 나가는 문의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현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순간에, 도처에,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 하나님의 현존이 스며있음을 연습하십시오.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단순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판단하지 말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렇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안 될 때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주님, 저를 구하소서,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판단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단순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 이것이 자유로 향해가는 하나님의 현존 연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가 바로 자유인의 태도이고, 오늘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바로 자유인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