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11;25-30, 다 내게로 오라? 2024. 6. 30 설교. 송사라 장로
여러분, 요즈음의 시대가 어떻습니까? 점점 더 복잡해지며, 점점 더 첨단화 되고 정보는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마침내 ai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내신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짐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이 세대를 읽어 내야하고 해석해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 것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며 무거운 짊을 지고 나그네의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요? 모든 관심이 온통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고 의미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건을 떠올리고 구원에 대한 감사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마음 다하여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 어려운 때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과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호산나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유대인과 같은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실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과 힘을 보여 주지 못하고 붙잡혀서 온갖 수용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시는 그런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떤 소망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이런 유대인과 제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어떤 분이 신앙인들의 스타일을 재미있게 분류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분이 표현하는 달구지 같은 교인은 누구일까요? 누구인가 끌어주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연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항상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더 멀리 날고 싶어도 실에 매여 있기 때문에 더 높이 오르지도 못하고 근심과 걱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고양이는 늘 쓰다듬어 주어야 좋아 하고, 늘 칭찬 받기만을 좋아하는 그래서 주인의 눈치만 보는 사람입니다.
또한 “럭비공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럭비공은 타원형으로 뾰쪽하기 때문에 한 번 튀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교인입니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신뢰를 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깜박등 같은 교인을 말합니다. 불이 들어왔다 꺼졌다 하는 것과 같은 들쭉날쭉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기도를 하다가 말고, 예배를 드리다가 중단하고, 봉사를 하다가 깜박 깜박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석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이나 여건과 조건에 관계없이 언제 어느 때나 변함이 없는 믿음으로 주님의 부르시는 일에 예하고 바른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미래에 이루어질 결과들을 소망하면서 오늘을 이겨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1;28-30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살아가야 하고, 살아 내야만 하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무엇보다도 무관심의 시대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5-17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그러면 귀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바로 볼 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인입니다. 왜 들을 귀가 필요합니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말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어느 누구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슬픔 때문에 목을 놓아 울어도 동조하며 가슴을 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관심과 무감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4무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고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4 개의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이미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의 당시의 세태를 한탄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따르는 신앙인이 없고, 이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달구지 같은 사람들이고, 고양이 같은 사람들이고, 럭비공 같은 사람들이고, 추리에 붙은 전구 다마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석 같은 성도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4무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을 주시고 대응 할 그 무엇의 능력을 주십니다. 시대의 문제와 삶을 바꾸어서 가치가 있고 풍요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또 한 가지는 은혜가 되면 이것을 기준삼아 또 다른 부분을 보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18-19.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다 부정적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금식을 하면서도 주의 주실 새로운 시대를 소망해야 하는데 이 것도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보면서 탐하고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정죄를 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과 삶을 깨닫고 고쳐주려고 하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트집을 잡기 때문입니다. 먹기를 탐하는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을 보지 않습니다. 자기 기준입니다. 오늘 날 먀의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가? 전혀 생각이 없고 자신의 할 말만 하는 시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힘이 들면 힘이 들수록 주님의 뜻을 믿음 가운데 잘 헤아려야 합니다.
2. 그러면 이런 세대와 이런 세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2-1. 책망을 합니다. 21-23절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 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 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서 낮아지리라. 여기에 나오는 고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이 바로 살아가도록 가장 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베푸셨습니다. 베세다가 어떤 곳입니까? 가버나움이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권능이 가장 많이 드러난 곳이고 가장 많이 은혜를 받았던 그 장소이며 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마음이 완악해 졌습니다. 이 시대와 똑 같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경고 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를 책망하시고, 이 고을들에 행한 권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두로와 시돈이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 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책망을 했습니다.
2-2.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있습니다. 25-26.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학식에 뛰어나고 세속적인 상식에 탁월한 사람들로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의 지식을 과대평가해서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부모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자기의 몫이 없습니다. 다 부모님의 소유입니다. 재산도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들을 선택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2-3.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능력과 영광을 위임하셨습니다. 구원하시는 권능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 하셨고, 다스리는 권세와 심판의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하나요? 예수님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3. 이렇게 그 어렵고 힘이 든,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나요?
3-1. 언약을 합니다. 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세상과 싸워야 하는 이 험한 세대 때문에 안식을 모르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수고해야 하고 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고 합니다. 한국의 개그맨 이 경 규라는 사람이 대학교에서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는 강연을 해서 큰 영향을 준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들 앞에서 그는 지리산 등반할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벗어 버리고 싶지만 참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배낭을 열어보니 먹을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하나요? 인생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태어나면서 저마다 힘든 짐을 지고 갑니다. 이런 삶의 연속은 천국을 가야 하는 그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한 때 시리고 아픈 가슴이 없이 평안하게 살아 본 적이 있었나요? 기쁨과 즐거움의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슬픔과 아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짐입니다. 가난도 짐이고, 부유도 짐입니다. 질병이 짐이면 건강도 짐입니다. 책임이 짐이면, 권세도 짐입니다. 헤어짐이 짐이면 만남도 짐입니다. 미움이 짐이고, 사랑도 짐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일과 관계 속에서 짐이 아닌 것이 있던가요? 그렇다면 기꺼이 짐을 짊어지세요.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가쁠지라도 내,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기꺼이 짐을 짊어지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며 자세입니다. 왜요? 언제인가는 짐을 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짐을 풀 때에 짐의 무게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손쉽게 들거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짐을 지게 되면,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 집니다.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허리가 굽어집니다. 시선이 아래로 향합니다. 그래서 내 등의 짐은 내 자신에게 선물이고 스승이고 조련사이기도 합니다. 이 것을 가르치고 체험되게 하기 위해서 짐 때문에 수고하고 무겁다는 저와 여러분을 주님께서 초청합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괴롭고, 또한 기쁨을 깨닫지 못하는 내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그런데 그 초청에는 주님께서 하실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짐과 고통을 직접 치료하시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깊은 곳의 쓴 뿌리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제거하고 치료하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주십니다. 이런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세상의 논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왜요? 아무리 은혜를 베푸시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 은혜는 나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청에 응답해야 하고, 모든 짐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3-2. 어디로 초청을 하시고 어기로 오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입니다. 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멍에는 좋든지 나쁘든지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는 쉽고도 가볍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함께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백만장자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난 여러 차례 파산했지만 한 번도 가난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는 그 모든 짐을 나를 부르시고 초청하신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파산의 짐이 얼마나 무겁고 무섭습니까? 사람들이 두렵고, 흔적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근심과 걱정과 흔적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가운데 주님과 함께하면 내짐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이를 때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때까지 멍에와 함께 동행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에 은혜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짐이 무거우냐? 홀로 지고 가기에 험한 데로 갈까? 두렵지는 않느냐? 온갖 일에 매여 고달프지 않느냐? 주가 도우시리. 요청만 하면, 우리 기도를 언제 어디나 들으시며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동행하니, 내가 실망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 가면 주 내게 오리라.
짐이 무거우냐? 홀로 지고 가기에 험한 데로 갈까? 두렵지는 않느냐? 온갖 일에 매여 고달프지 않느냐? 주가 도우시리. 요청만 하면, 우리 기도를 언제 어디나 들으시며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동행하니, 내가 실망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 가면 주 내게 오리라. 내가 실망할 때 기억해 야 할 것은 예수께 가면 주 내게 오리라.
여러분, 주님은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쉬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멍에를 매라니 무슨 뜻입니까? 멍에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농부들이 밭을 일구는데, 고대근동 지방에서는 두 마리 소가 같은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다. 엘리사는 12겨리가 한꺼번에 그러니까? 24마리가 두 마리씩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았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모든 것이 비슷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늙고 경험이 있는 소와 겨우 고삐가 풀린 소를 붙들어다 밭을 갈면 어떻게 될까요? 늙은 소는 힘이 부족하지만 경험이 있고, 어린 소는 힘은 있으나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협력하고 보완하면 멍에는 가볍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그래서 충돌이 되면 이 때 농부가 필요하지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멍에를 매자고 초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후견인을 붙여 주셨다가 저와 여러분을 후사를 삼으신 예수님입니다. 그 주님께 드리고 못하고, 내놓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주님께 내어 놓는 것은 흠이 아니고 안식이고 쉼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전문가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수고와 무거운 짐의 전문가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과 함께 멍에를 매자고 요청합니다. 배우라고 합니다. 무엇을 배울까요? 주님이 가자! 고 할 때 가고, 서라! 고 하면 서고, 돌아서라고 하면 돌면 됩니다. 주님이 다 하십니다.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멍에의 무게 중심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께 있습니다. 부족해도 됩니다. 경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멍에의 결과와 모든 열매는 나의 것이 되게 합니다. 이 것이 예수님의 온유이고 겸손입니다. 여러분,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보고 싶을 때에 보고 싶은 자리에, 힘이 들 때에 등 토닥여 위로해 주는 자리에, 혼자라는 생각이 드는 날에 손잡아 함께 라고 말해주는 자리에, 너무도 필요한 날, 필요한 자리에 있어줄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행복합니다. 여러분,
손을 잡는다고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닐지라도 손을 내미는 예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응원한다고 힘든 삶이 쉬워지지 아닐지라도 힘내고 잘한다는 위로가 너무나 힘이 되었습니다.
일으켜준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툭툭 털어주는 예수님이 고마웠습니다.
갈증이 난다고 당장 숨이 넘어가지 않을지라도 생명수를 건네주는 예수님이 고맙습니다.
혼자 간다고 길을 잃는 것이 아닐지라도 기다려준 예수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말 한마디 안 한다고 우울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말을 건네준 예수님이 고마웠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부르시고 배우고 맡기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시고 짐이 되십니까? 멍에가 무겁습니까? 온유와 겸손이신 예수님께 맡기고 동행하시는 그래서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