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 906원?… “일본여행 안가도 사두자” 엔테크 열풍
엔화 가치 하락세가 이어진 15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에 엔화가 표시돼 있다. 이날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904원까지 떨어져 8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연합© 제공: 조선일보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장중 100엔당 904원까지 떨어진 15일, 회사원 이모(38)씨는 은행 앱을 켜고 여윳돈 200만원을 약 22만엔으로 바꿔 엔화예금 통장에 넣었다. 이씨는 “작년 이맘때, 그리고 작년 연말 원·엔 환율이 950원 밑으로 내려가니 주변에서 엔화를 산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따라 샀는데, 그때보다도 엔이 더 떨어졌길래 더 사뒀다”며 “당분간 일본에 여행 갈 계획은 없지만, 이 정도면 엔화가 꽤 싼 편인 것 같아 투자 차원에서 사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엔 환율이 2015년 6월(최저 100엔=880원) 이후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개인들의 엔화 사모으기가 한창이다. 신한·KB·하나·우리 4대 시중은행 엔화예금 잔액을 보면 4월 말 총 5778억엔(5조2670억원)에서 현재(이달 11일 기준) 8039억엔(7조3300억원)으로 39% 늘어났다. 하루 평균 84억엔(약 770억원)씩 엔화 예금이 불어난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제공: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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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들 “요즘 엔테크가 제일 핫해요”
요즘 엔화가 싸다고 느끼며 엔테크(엔화+재테크)에 나선 투자자들은 ‘100엔=1000원’이 평균적인 원·엔 환율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 최근 10년간 엔화 환율은 평균 1025.3원이었다. 20년 평균으로 시계를 넓혀봐도 평균 1077.6원 수준. 지금 엔화를 샀다가 환율이 장기 평균으로만 돌아가도 10%는 너끈히 버는 셈이다.
올해 4월 말 100엔당 1000원을 넘나들었던 원·엔 환율은 현재 900엔대 초반으로 9% 넘게 급락한 상태다. 이 기간 달러화 대비 엔화는 5%대 약세인 반면, 달러화 대비 원화는 4%대 강세로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원화 가치 상승)한 것이다. 엔화는 서울 외환시장에서 직접 거래되지 않기 때문에 기준 환율인 달러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계산한다.
사실 작년 하반기부터 투자은행(IB) 등 발 빠른 세계 큰손들은 지금과는 반대로 엔화 강세에 베팅하기 시작했다. 미국 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큰 폭으로 금리를 올리는 동안에도 일본만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한 탓에 약세를 면치 못했던 엔화 가치가 이제 변곡점을 맞았다는 판단에서다. ‘디플레의 나라’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40여 년 만에 가장 높은 4%대까지 오르고, 10년간 일본은행(BOJ)을 이끌며 엔저 시대를 공고히 했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4월 물러나면서 일본 통화 정책의 방향도 바뀔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이런 전망이 최고조였던 4월 말에는 100엔당 원화 환율이 1000원을 넘었다.
그러나 막상 신임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당분간 완화적 통화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앞서 나갔던 투자자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올해 안에는 마이너스 금리 탈출 같은 엔화 강세 요인이 없을 것 같다는 관측이 퍼지면서 엔화는 다시 급격한 약세로 돌아섰다.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권영선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본부장은 “일본 물가가 높아지고 있다고는 해도 인플레를 우려할 정도까지가 아니고, 당국이 사실상 인플레를 용인하면서 BOJ 스탠스 변화를 기대했던 투자가 되돌림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장기 평균은 100엔=1000원인데…
지금 엔테크에 나선 투자자들은 결국 웃을 수 있을까. 앞으로 엔화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에 대해선 주요 IB들이 대체로 ‘강세’를 전망하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종료가 임박하면서 미 국채 수익률이 하락하고 일본 국채 수익률과의 간극이 좁혀지는 등 달러화가 약세로 방향을 틀면 상대적으로 엔화는 강세가 된다는 것이다. JP모건은 “BOJ 정책 정상화는 길고 점진적인 과정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결국엔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이 의미 있는 내림세(엔화 강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한다”며 “엔화 매수 포지션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기준금리를 동결한 14일(현지 시각) 달러당 엔화 환율은 141.1원을 기록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39개 투자은행이 내다본 연말 엔·달러 환율 전망치 중간값은 129엔으로 현재보다 8%가량 낮다. 엔화가 그만큼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