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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參奉) 김공(金公) 시성(始聲) 묘표(墓表)
근래 번창했던 향학(鄕學)으로는 문회서당(文會書堂)만한 곳이 없다. 서당의 위치는 공주(公州) 활원(活原)으로 스승은 도계(陶溪) 김공(金公)이었는데, 공의 교수 방법은 대략 호 선생(胡先生 송대(宋代)의 학자 호원(胡瑗))의 호학(湖學) 규모와 비슷하였다.
한때 생도가 많을 때는 몇 백 명이나 되었고 재목을 이룬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공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일원에 집집마다 글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마다 서실(書室)이 있게 된 것은 실로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아, 얼마나 훌륭한가.
공의 휘는 시성(始聲)이고 자는 문원(聞遠)이며 연성인(蓮城人)으로 숭정(崇禎) 경오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가끔 사람이 깜짝 놀랄 말을 하였으므로 어른들이 장차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약관에 발해(發解 향시(鄕試)에 합격하는 것)하여 그때부터 대과(大科)ㆍ소과(小科)를 막론하고 뽑힌 것이 열 번도 넘었고 성화(聲華)도 대단하였으나, 성시(省試 회시(會試))에서만은 번번이 불리하여 뭇사람이 굴(屈)이라고 하였지만, 공은 득실을 가지고 개의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재주는 있는데 운수가 없는 공을 민망하게 여겨 말하기를 “과장(科場)에서 오로지 문자(文字)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다른 묘한 지름길이 있나 보다.” 하였으나, 공은 대꾸하지 않았다. 또 어떤 관리는 말을 보내오기를 “나를 주인으로 삼으면 급제 하나쯤은 금방 따낼 것이다.” 하였는데,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장부가 차라리 푹 파묻혀 일생을 마칠지언정 차마 어떻게 험상한 짓을 하여 요행수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해 뒤에 과옥(科獄)이 터졌는데, 공은 그때 비로소 지난번에 말하던 것들이 틀림없이 그런 수단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과장에서 공의 글월을 보고는 슬쩍 베껴 먼저 바치고는 높은 점수로 합격한 자도 있었는데, 공은 모른 체하고 입 한 번 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이 소년 시절 시암(時菴) 조공 상우(趙公相禹, 1582~1657, 인조조의 학자)가 사계(沙溪) 선생의 정통 학문을 이어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제자의 예로써 가르침을 청했는데, 이때 시암이 공에 대하여 기대와 허여가 매우 컸으며, 공 역시 보고 느끼고 본받아 행한 바가 있었다.
전후 상을 당하였을 때 모든 것을 예도와 법제대로 하였는데, 그가 울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는 모두가 예를 잘 지킨다고 기뻐하며 감복했으며, 장례 때는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일 정도여서 그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그를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교원(校院)과 관계된 큰일들은 공이 아니면 해결이 되지 않았다.
공은 지향하는 뜻이 고결하여 권세 있는 집 문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가령 재상 조사석(趙師錫) 같은 사람은 공이 어렸을 때부터 다정하게 지냈는데, 그가 전조(銓曹)를 맡게 되자 발길을 끊었으며, 그가 공을 조정에 천거하고 서신을 보내 불렀을 때도 공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사년 이후 조사석이 권세를 잃고 전의(全義)에 와 있게 되자 공이 즉시 한 번 찾아 갔는데, 그가 깜짝 놀라 반기면서 말하기를 “서울에서는 인연이 없더니 시골 와서야 서로 만나네 그려. 관직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관직 없는 게 나은 것이 어찌 이 한 일뿐이겠는가.” 하자, 그 역시 한바탕 껄껄대고 웃기도 하였다.
계미년에 와서 도신(道臣)이 공의 이름을 천독(薦牘)에다 돌리고 종백(宗伯) 민진후(閔鎭厚)도 포록(褒錄)할 것을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갑신년 가을에는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늙고 병든 것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는데, 정해년 5월에 병을 얻게 되었다.
그달 28일 갑자기 자제들을 불러 깨끗한 자리를 펴고 옮겨 눕게 하더니 새옷으로 몸을 덮은 채 유연히 가 버리고 말았다. 부음이 들리자 멀고 가까운 곳의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아쉬워하고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그해 9월에 활원(活原)의 서쪽 정안동(正安洞) 정좌(丁坐) 둔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기상이 장중하고 행실이 바르고 굳건하여 권세나 이해에 관한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고, 성색(聲色)이나 분화(芬華) 따위는 마치 자기를 더럽히기라도 할 듯이 보았으며,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매(姉妹)를 마음과 힘을 다해 돌보는가 하면 그들이 죽은 뒤에는 어린 생질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자립시켰다.
종질(從姪) 주(胄)가 5년 연속된 기근으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식구를 헤아려 나누어 먹임으로써 쓰러지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 마음을 사이가 먼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하여 각기 반가운 마음을 갖게 하였는데, 그가 남의 궁함과 어려움을 도와 준 그 의리에 관하여는 모두가 다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만 여기서는 이루 다 기록을 못하였다.
일생 동안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경영한 사실이 없었고 늘 소 태부(疏太傅)의 이야기를 하면서 거듭거듭 일깨우고 경계시켰다. 후생들을 권유할 때에도 지극히 성심껏 대하여 무의식 중에 하는 말 한마디라도 상대를 일깨우는 뜻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제생(諸生)들이 그것을 벽에 붙여두고 신명(神明)처럼 받들었다. 그가 남을 위하여 즐겨한 일들이 대개 이러한 식이었다.
김씨(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을 그 시조로 하는데, 고려(高麗) 시대에 대관(大官)이 줄을 이어 귀족 가문을 계속 유지하여 왔고, 아조에 들어와서는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이 좌명(佐命) 공훈으로 연성군(蓮城君)의 봉호를 받았다. 그가 판중추(判中樞) 평호공(平胡公) 개(漑)를 낳고, 평호공은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 맹강(孟鋼)을 낳았으며, 교감은 필(珌)을 낳았다.
필은 기묘년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신무(神武)의 화가 일어났을 때 대사성 김공(金公 김식(金湜))의 문도라는 이유로 퇴적을 당한 뒤 양광(佯狂)으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가 공의 5대 조부이다. 증조는 휘가 수검(守儉)으로 첨추(僉樞)였고, 할아버지 휘는 희현(希賢)이며, 아버지 휘는 재건(在鍵)으로 행실이 정의롭고 성품이 조촐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운봉(雲峯)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청주 이씨(淸州李氏) 영휘(英暉)의 딸이고, 공의 배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통덕랑(通德郞) 평(玶)이 그의 아버지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며 행실이 단정하고 조촐하였는데, 공보다 19년 먼저 세상을 떠 활원 북쪽 금란(金蘭)의 계향(癸向)으로 된 둔덕에 장사 지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중오(重五)는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고, 다음이 정오(定五)로 직장(直長)이며, 다음이 여오(麗五), 그 다음이 수오(秀五)로 진사이고, 딸은 선비 정시우(鄭始友)에게 시집갔다. 맏집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가 권성연(權聖淵)이고, 직장은 딸이 둘인데 맏사위가 유언섭(兪彦燮)이며, 셋째 집은 아들이 하나로 명덕(命德)이고, 진사도 아들 하나를 두어 이름이 명집(命集)인데 공의 명에 의하여 직장 앞으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사위 정(鄭)은 아들이 동형(東亨)ㆍ동복(東復)ㆍ동적(東績)ㆍ동집(東緝)이고, 딸은 윤성집(尹聖集)ㆍ김응수(金應洙)ㆍ허윤(許鈗)에게 출가하였다. 진사가 학술(學術)로써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고 나와 또한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 그의 선대 사적에 관하여 익히 들은 바 있기에 이번 묘도문 부탁을 받고 사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삼가 그 행장에서 추려 이상과 같이 대략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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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호학(湖學) :
호주(湖州)의 학당. 호원(胡瑗)이 호주 학당의 교수로 있으면서 수(隋)ㆍ당(唐) 이후 경업(經業)을 멀리 하고 문사(文辭)만 숭상하
는 학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엄한 규약을 정한 뒤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면서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두어 교육 방법을
둘로 분류하였다.
경의재에서는 인품이 통창하고 기국(器局)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을 가르쳤고, 치사재에서는 1인 1기
의 교육방법을 채택하였다. 《宋名臣言行錄》
[주02] 소 태부(疏太傅)의 이야기 :
재물의 해독을 경계하여 자손에게 재물을 남기지 않은 고사. 소 태부는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소광(疏廣)을
말함. 관작이 너무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하여 자기 조카인 소수(疏受)와 함께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
는데, 천자(天子)와 태자(太子)로부터 하사받은 많은 황금을 모두 일가 친척과 벗을 모아 잔치하면서 다 써버렸다.
누군가 혹 자손을 위해 좀 남겨 놓을 것을 권하면 “어진 자가 재물이 많으면 뜻을 손상시키고 어리석은 자가 재물이 많으면 더 많은
허물을 저지른다.”고 하였다 함. 《漢書 疏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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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續六 / 蔭仕
김시성金始聲 墓表[權尙夏]
近來鄕學之盛, 莫如文會書堂, 堂在公州之活源, 其師曰陶溪金公。 公之敎授之方, 略如胡先生湖學規模, 一時生徒多至數百人, 而成才者亦不少, 環公州一境, 家有誦聲, 里有書室, 實自公倡之, 猗其休矣!
公諱始聲, 字聞遠, 蓮城人。 生於崇禎庚午。 自兒時已有俊才, 往往出驚人語, 長者期以遠到。 廿一發解, 自是無論大小科, 被選者十數, 聲華藹蔚, 而輒不利於省試, 衆皆稱屈, 公則不以得失介懷也。 有人愍公之有才無命, 說曰: “科場不宜專靠文字, 似有他妙岐。” 公不答。 又有吏人送言曰: “主我則一第可立取。” 公笑曰: “丈夫寧坎軻歿身, 豈忍行險而僥倖乎?” 後幾年, 科獄作, 公始悟曰: “向所云者, 必此手段也。” 又有人見公文於場中, 暗謄先呈而高中者, 公若不知, 一不開口, 識者以爲難及。
公自少聞時菴趙公相禹得沙溪先生之正學, 摳衣請敎, 時菴期許甚重, 見待殊異, 公亦有所觀感而體行者。 前後居喪, 一遵禮制, 顔色哭泣, 瞻聆悅服, 及其葬日, 數郡畢至。 鄕中多士倚以爲重, 凡係校院大事, 非公莫決。
志尙高潔, 足不及勢貴之門, 如趙相師錫少時契密, 及其秉銓, 公輒絶之。 趙相薦公於朝, 以書招徠, 而公亦不答。 己巳後, 趙相失勢, 來寓全義, 公卽一訪, 趙相驚喜曰: “洛下無緣奉袂, 鄕廬始得逢迎, 乃知無官勝於有官。” 公笑答曰: “無官之勝, 止此一事耶?” 趙相亦大噱焉。
癸未, 道臣金公演登公名于薦牘, 宗伯閔公鎭厚啓請褒錄, 蒙允。 甲申秋, 除光陵參奉, 辭以老病不仕。 丁亥五月, 有疾。 廿八日, 忽命子弟鋪淨席遷臥, 以新衣覆體, 悠然而逝。 訃聞遠近識與不識, 無不齎咨歎嗟。 九月, 葬于活源西正安洞丁坐原。
公氣貌莊重, 制行貞固, 勢利之談, 不出於口, 聲色芬華, 視之若浼。 姊妹貧不能自活, 則竭心力而撫恤, 及其歿後, 取其稚甥育養成立。 從姪胄五年饑乏食, 計口分濟, 俾不顚隮, 推以至於疏遠, 各得歡心, 其周窮急難之義, 皆可書而不能盡書也。 平生不營財産, 以爲子孫計, 嘗以疏太傅語申申戒曉。 勸誘後生, 極其誠心, 雖尋常啽囈之間, 未嘗不寓警, 諸生帖之壁上, 敬之如神明。 其樂於及人類如此。
金氏胄于新羅敬順王, 在麗大官相望, 承繼軒裳。 入我朝, 威靖公定卿以開國元勳封蓮城君。 歷數世有曰珌, 己卯第壯元, 神武禍作, 以大成金公門徒被斥, 因佯狂自廢。
曾祖諱守儉, 僉樞。 祖諱希賢。 考諱在鍵, 行義峻潔, 世稱雲峯。 妣淸州李英暉之女。 公之配坡平尹氏, 其考通德郞玶。 性慈順端潔。 先公十九年沒, 葬活源北金蘭癸向原。
生四男一女: 男長重五, 無子早歿; 次定五, 直長: 次麗五: 次秀五, 進士。 女適士人鄭始友。 長房一女權聖淵; 直長二女, 長兪彦爕: 三房一男命德: 進士一男命集, 以公命爲直長後。 鄭婿男東亨、東復、東績、東緝, 女尹聖集、金應洙、許鈗、尹聖徵。
余嘗觀篤學力行之士數奇, 不食其報, 則必發於後承, 天道昭昭, 斷可知矣。 進士君以學術趾美, 見重於士友間, 余亦與之相親, 習聞其先懿。 玆於墓文之托, 有不能辭者。 謹摭其狀, 略敍如右。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