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어머니와 작가 공지영
오늘 아침마당에 나오신 해군의 어머니 홍은혜 여사님은 97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예쁘고 귀여움이 가득한 얼굴이셨다
젊었을 때는 얼마나 더 많이 아름다우셨을까.
이제껏 그리도 훌륭하신 분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아침이었다
해군창설과 더불어 남편 손원일 제독과 함께 온몸을 바쳐 해군을 일으킨 여인 홍은혜 여사님.
우리나라에 이러한 분이 계셨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아래 글은 옮긴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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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 제독은 1909년 음력 5월 5일 평양에서 부친 손정도 목사와 모친 박신일 여사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 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상해 임정의 의정원 의장을 지 낸 인물로, 조국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셨다. 그가 6살이 되던 해, 부친이 서울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오면서 손원 일은 정동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절 부친 손목사는 원일 에게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게 된 것은 오로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곤 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이는 어린 원일에게 성실과 근면을 심어주는 말이 되었다. 손목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하자 어린 원일과 평양에 남은 가족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원일은 일제 폭압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키우게 되었다. 손원일이 원광중학교 졸업반 때 아버지인 손목사는 세 남매를 불러 앉힌 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목적과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간절히 독립을 바라지만 일본이 곧 망하거나 금방 독립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 개인이 실력을 갖춰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과학사회와 산업사회가 전개될 것인데 그 때는 개인의 실력과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 세대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므로 너희 세대들이 각 분야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어려서부터 유학공부를 하여 과거 시험을 준비했었던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와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서구의 선진문물과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인식한 선구자였다. 손원일은 이른바 전통을 딛고 서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서구 선진국처럼 만들 수 있을까를 평생 동안 고민했던 선구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훈도를 받고 자랐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실력 제일주의´, 장차 동양사회도 서구처럼 ´과학사회´와 ´산업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는 역사 발전사관은 소년 손원일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손목사의 사망 이후 손원일은 ´너희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견문을 넓히고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였다.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만주로 간 손원일은 1925년 원광중학 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 어느 날 기숙사 창밖 으로 수많은 군함이 정박한 부두를 바라보며, "그렇지! 바다 에는 미래가 있다. 지금은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가야 한다. 바다는 우리 가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라고 해군이 되고자 결심한 손원일은 의대진학을 포기하고, 1927년 중양(中央)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하였다.
3년 후 졸업한 손원일은 외국 상선에서 항해사로 근무하고, 1934년 개성의 누님 방문차 귀국하지만 일본경찰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상해 임정의 비밀 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하 고 2개월 간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난 손원일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고 동화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수입의 일부를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등 항상 조국의 광복을 먼저 생각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조국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 지만 당시 사회는 광복의 기쁨은 잠시이고 수많은 단체와 사상의 대립으로 무척 혼란스 러웠다. 이런 가운데 손 제독은 우리 조국이 바다를 통해서 세계로 뻗어나갈 시발점인 ´해군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6 · 25전쟁 당시 손 제독의 가장 큰 업적은 인천상륙작전 참가다. 이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흥 도와 덕적도 두 섬을 탈환해야 하는 선행과제가 있 었다. 이에 손 제독은 이희정, 함명수에게 섬탈환을 지시했으며, 마침내 1950년 8월 18일과 20일에 두 섬을 탈환하게 된다. 또한 손 제독은 상륙작전부터 9 · 28 서울 수복작전까지 직접 전장에서 우리 함정과 해병대를 진두지휘했으며, 서울 수복작전에서는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전쟁의 상흔에 고통 받는 서울 시민들에게 큰 희망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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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제독은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전쟁 중에서도 내일을 준비하는 선각자였다. 해군력 증강을 위해 PF(호위함)을 추가로 인수하는 한편 군종제도의 도입,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현대화된 군 조직체계의 바탕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손원일 제독은 평소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예의, 정직, 겸손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정신적 지표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국방부 기구를 대폭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연합참모본부를 설치하여 육 · 해 · 공군을 연계한 협조를 도모했다.
재임기간 동안 능숙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막대한 군원을 획득함으로써 국방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면에서도 국립묘지(지금의 현충원) 창설, 군목제독의 활성화,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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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제독은 1960년 대사직에서 사임한 후 1976년 까지 한 국재향군인회, 아시아반공연맹, 한국홍보협회 등의 단체에 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등 한국을 홍보하는데 박차를 가한 게 된다. 그러던 중 1973년 8월에 타이완 중화학술원으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노년에도 불구하고 학업정진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하지만 평소 지병인 신장병으로 7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결국 1980년 2월 15일 72세로 생을 마감하고 국립묘지에 영면하게 된다. 임종을 앞두고 손원일제독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내가 한 일들이 비록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러나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헌신했지만 건군 초기에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을 잊을 수 없으며 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써왔고 오늘날의 대해군의 발전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란을 몸소 겪었으며 일제의 탄압과 그 무서운 고문도 직접 겪었다. 따라서 바라는 것은 이 땅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학정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피로써 싸워준 UN군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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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마당을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몇 년 전 해군을 해적이라고 발언한 통진당원 김지윤과 작가 공지영 문정현 신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아무렇지 않게 해군을 해적이라고 발언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국민 앞은 물론이지만 손원일 제독과 홍은혜 여사 앞에서만이라도 말이다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 . . 만약 대한민국의 해군을 해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면 북한괴뢰군이나 발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북한의 괴뢰군이 아니고서야 어찌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발언을 할 수 있었는지 . . . . 나는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오늘날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국민은 대한민국 안엔 그 어디에도 없다
그 어디에도. . . .
<해군기지 반대>를 <해적기지 반대>라고 말 할 수 있다니 . . . . 그들은 대한민국의 해군을 위해 과연 뭘 한 것이 있는가 묻지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그 발언에 대해 국민앞에 크게 사죄해야 한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점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른 후일지라도. . . . .
나는 해군 아들을 둔 엄마로써 지금도 그들의 해적 발언을 생각하면 온몸이 떨리는 사람이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인가?
아니다 진정 아니다
홍은혜여사님은 음악을 전공하셔서
해군가도 작곡하셨다
'바다로 가자'
작사 : 손원일 / 작곡 : 홍은혜
1)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2) 우리들은 나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대한의 해군
험한 저 파도 몰려 천지 진동해도 지키자 우리 바다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홍은혜 여사와 일본 친구
글/reen
첫댓글 육군 전역의 애비도 남한속의 괴뢰군들의 설침에 다시 내가 입대 해서라도 응징을 하고
백두산에 태극기를 꼽고 싶소이다.
이땅의 붉은 색이 하루 빨리 없어 지기를~~~~~
기쁜소식도 들립니디
통진당해체 국무회의 통과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