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5년에 연창군(延昌君) 박효수(朴孝修,?~1337)가 작성한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전지(朴全之,1250~1325)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죽산박씨(竹山朴氏)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를 중시조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788년에 개성부(開城府) 승제문(承制門) 밖 20리 지점인 고산동(高山洞) 삼랑산(三朗山) 남쪽 기슭에서 남편인 박전지(朴全之)가 1316년(충숙왕 3)에 작성한 <해주최씨(海州崔氏,?~1316)의 묘지명[朴全之妻崔氏墓誌銘]>도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박전지(朴全之,1250~1325)의 묘지명(墓誌銘)>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902
公諱全之字返圓系出竹州其先新羅始祖朴赫居世從紫卵而生其卵如瓠自天而降鄕人以瓠爲朴故因姓曰朴封其陵於天興君繼紫三韓壁上功臣朴奇悟十三世之孫
공의 이름은 전지(全之)이고, 자는 반원(返圓)이다. 가계는 죽주(竹州)에서 나왔으니, 그 선조는 신라(新羅)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 자주빛 알에서 태어났다. 그 알이 박[瓠]과 같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고을 사람들이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에 성을 박(朴)으로 삼고, 그 능(陵)을 봉하여 천흥(天興)이라고 하였다. 군은 자주빛[紫 : 박혁거세]을 이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의 13세손이다.
묘지명 개관
이 묘지명은『죽산박씨파보(竹山朴氏派譜)』(宣川, 1938)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1788년(정조 12) 개성부(開城府) 승제문(承制門) 밖 20리 지점인 고산동(高山洞) 삼랑산(三朗山) 남쪽 기슭에서 부인인 최씨(崔氏)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1325년(충숙 12) 박효수(朴孝修)가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인 박전지(朴全之 : 1250~1325)의 자는 반원(返圓)이다.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군 일대) 사람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휘(輝), 어머니는 경원군대부인(慶源郡大夫人) 이씨(李氏)로 장용(藏用)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박전지는 삼분(三墳 : 중국의 3황제)과 백가서(百家書)와 음양비결(陰陽秘訣)을 꿰뚫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악장(樂章)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1267년(원종 8) 국자감시,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충선왕 즉위때 사림원(詞林院)의 학사로 즉위개혁에 참여하였다. 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때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부인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이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된 최씨(崔氏)로서, 염(恬)의 딸이다.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원(瑗)이다. 장녀는 정탁(鄭倬)에게, 차녀는 이직(李稷)에게 각각 시집갔다.
부인 최씨[朴全之墓誌銘], 아들 원[(朴遠墓誌銘)] 및 부인 홍씨의 묘지명[朴援妻洪氏墓誌銘]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참고가 된다.
출처 : 《삼탄집(三灘集)》과 《국역 국조일물고》 <박원형(朴元亨)의 행장>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6143&cid=49618&categoryId=49618
1515년 간행된 이승소(李承召,1422∼1484)의 문집 《삼탄집(三灘集)》14권에 실린 <박원형(朴元亨,1411∼1469)의 행장>을 보면,
公諱元亨。字之衢。號晚節堂。新羅宗姓也。遠祖三重大匡諱奇悟。自雞林徙居竹山。子孫蟬聯。
공의 휘는 원형(元亨)이고, 자는 지구(之衢)이며, 호는 만절당(晩節堂)이고, 신라의 종성(宗姓, 왕실의 성씨. 임금의 부계 혈족.)이다. 원조(遠祖)인 삼중대광(三重大匡) 휘 기오(奇悟)가 계림(鷄林)으로부터 죽산(竹山)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자손들 가운데 고관대작이 많이 나와 드디어 죽산의 대성(大姓)이 되었다.《삼탄집(三灘集)》
공의 휘(諱)는 원형(元亨), 자(字)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이고 신라(新羅) 왕실의 성씨이다. 먼 윗대 선조 삼중대광(三重大匡) 박기오(朴奇悟)가 계림(鷄林)에서 죽산(竹山)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드디어 죽산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국역 국조일물고》
1864년에 간행된 나세찬(羅世纘,1498~1551)의 문집 《송재유고(松齋遺稿)》3권에 실린 <박린(朴嶙)의 묘표>를 보면,
公姓朴。諱嶙。字彥秀。號遯湖。新羅宗姓。世爲三韓甲族。先祖諱奇悟。始徙竹山。以壁上功臣。賜食鄕。後代之顯名於當世者。考諸乘牒可見。
공의 은 박(朴)이고 자는 언수(彥秀), 호는 둔호(遯湖)이다.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박기오(朴奇悟)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식읍으로 죽산(竹山)을 받아 본관을 옮겼다.
1814년 간행된 이이(李珥,1536~1584)의 문집 《율곡전서(栗谷全書)》17권에 길린 <박종문(朴宗文,1512~1565)>의 묘갈명>을 보면,
朴氏爲著姓。有諱奇悟。始顯於高麗。有三韓功臣三重大匡者。其十八代孫也。
박씨(朴氏)는 저성(著姓, 이름난 성씨)으로 휘 기오(奇悟)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