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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장애인 세례의 신학적 정당성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하는 정승원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이 글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세례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최홍석 교수의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I. 서론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유아에게 세례를 거행한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마치 구약 시대에서 남아에게 8일 만에 할례를 거행했던 것처럼 유아에게도 세례를 거행한다. 최홍석은 한 논문에서 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에 관해 많은 분량(43쪽)을 할애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유아세례에 관한 여러 신학적 논쟁거리가 있다. 그것의 핵심은 다름 아닌 지적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발적 고백 없이 구원과 밀접한 세례를 베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부모가 믿는다고 해도 부모의 믿음이 유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도 논쟁거리이다. 이러한 예민한 논쟁이 오랫동안 개신교에 있어 왔던 가운데 최홍석은 위 논문에서 성경에 흐르고 있는 언약 사상을 설명하고 또한 교회사적으로 귀한 자료들을 소개하며 조직신학적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잘 증명하였다.
최홍석의 유아세례에 관한 옥고는 단순히 성례전(sacrament)에 관한 글이 아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을 다루고 있고 개혁주의 교회론의 정수를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 논문은 최홍석의 위 논문을 근거로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지 그 정당성을 피력하고자 한다. 지적 장애인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입관은 그에게 구원 얻을 길이 원천적으로 막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복음을 이해할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지적으로 알 수 없고 회개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적 장애인은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짐승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어떤 근거로 그에게 구원은 원천적으로 막혔다고 할 수 있는가? 구원이 원천적으로 막히지 않았다면 어떤 차원에서 그런가? 또한 세례를 줘야한다면 어떤 차원에서 줘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지적 장애인에 대한 구원 문제와 세례 문제는 장애인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차대하고 예민한 사안들이다. 지적 장애인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구원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 한쪽 구석에는 지적 소통을 요구하는 통상적인 구원 과정으로 인해 더 이상 깊이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언급하기도 꺼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자녀들은 제외되기 때문에 아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구원의 과정이 비성경적이지는 않지만 피상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에는 여러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인간의 지적 혹은 의지적 능력에 달린 문제인가? 지적 이해를 전제로 하는 고백이 정말 구원의 조건인가? 등등의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문제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러한 복음주의 구원 과정으로는 지적 장애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 혹 신자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고 3-6세경에 사고로 지적 장애인이 된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 역시 구원은 원천적으로 막혔는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면 안 되는가? 혹 그들 중 장로교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 해도 지적 능력이 없어져서 입교(confirmation)도 받지 못하고 예수를 주로 영접하지도 못하고 고백도 못한다면 이러한 지적 장애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적 장애인의 구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한 신비로운 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의 구원을 쉽게 속단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문답도 받지 못하고 이해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적 장애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적 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간 쪽에서 원천 봉쇄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유아 세례가 구원의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듯이 지적 장애인 세례 역시 구원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사변적으로 혹은 인간적 마음으로 무조건 지적 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을 추측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그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간절함과 요청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최홍석의 유아세례 정당성에 관한 논문에서 찾고자 한다. 즉 최교수가 내세우는 개혁주의 구원관은 통상적인 구원 과정과는 다르다. 지적 능력을 포함한 인간의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개혁주의 구원관은 지적 장애인에게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할 여지를 제공한다.
II. 인간론적 고찰
최홍석은 존 머리의 인간론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자연 상태(natural state)에 있는 인간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에 반응하게 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식하게 하고,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하게 할 이해력(understanding)과 성정(affection)과 의지(will)를 가지는 것은 심리학적으로(psychologically), 도덕적으로(morally), 영적으로(spiritually) 불가능하다. 그 어떠한 이해력도, 어떠한 성정도, 그 어떤 의지도 율법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적절할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 요구되는 그러한 반응을 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에 반응할 이해력, 성정(affection) 그리고 의지를 가지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존 머리 그리고 최홍석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복음에 반응하는 차원에서는 일반 사람과 지적 장애인 사이의 지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적 장애인에게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할 능력조차 없고 혹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복음에 대한 이해력이 없는 것에는 일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해력, 성정 그리고 의지를 기대하는 것은 개혁주의적 전통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반응할 이해력, 성정, 그리고 의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개혁주의적 가르침과 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복음에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복음에 대한 반응과 영적 변화는 필연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반응과 변화 역시 인간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부분적인 타락이 아니라 전-인격적 타락을 의미한다.
최홍석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인간의 지혜를 내세우려는 유혹에 대해 경고한다. 복음을 전하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혜가 개입되는 것을 경고하면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은총이 중심점이다. 구원의 모든 것은 오로지 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결과일 뿐이다”라고 강조한다. 어쩌면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 전파함에 있어서도 성격은 다르지만 인간의 지혜를 요청한다는 차원에서 비슷한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지적 무능력 때문에 그리고 복음의 효과와 열매가 보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인간의 지혜에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지혜에 기준을 두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만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도 인간적 지혜를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파하는 자, 듣는 자 모두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강조해 온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은 단지 영적 혹은 윤리적 차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지식에 관한 인식론에도 해당된다. 최홍석은 인식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은 로마 천주교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 신학처럼 낙관적이지 않음을 강조하다. “개혁신학은 그 성향에 있어서 로마신학이나 아르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유한성뿐 아니라 전적부패와 무능력으로 표현되는 심각한 죄성을 항상 더불어 강조해왔기 때문에 인식론에 관한 한 낙관적 인간 이해에 근간을 둔 로마교나 아르미니안파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이 인식을 할 수 있고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립적이거나 때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식 혹은 지식조차 부패되고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영적 차원 혹은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지적 무능력을 얕잡아 봄으로 마치 영적 축복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지적 장애인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유로 문답과 같은 지적 소통이나 습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내세워서는 아니 될 것이다.
최홍석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극히 실용주의적 관점이며 인간 중심의 경험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유아세례의 진정성 여부는 실용주의적 결과나 경험주의적 접근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계시적 명령에 근거한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계시적 명령은 인간의 실용주의적 판단이나 경험주의적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며 언약적 순종에 따라 거행되어야 할 기준인 것이다. 최홍석은 창17:1-4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과만 관련된 언약이 아니라 대대의 모든 후손들이 포함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구약의 교회 안에 속한 자들은 참된 신앙을 고백하기에 충분히 성숙한 온전한 지성을 구비한 자들과 함께 그들에게 속한 어린이들과 유아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죄는 특정적(particular)이지 않고 보편적(universal)이다. 롬3:10-12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말씀한다. 앞서 9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말씀한다. 그리고 19절에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말씀한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두 다 죄 아래에 있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씀에 순진한 유아나 지적 장애인이 예외일 수는 없다. 죄의 보편성은 지적 장애인, 유아, 태아 할 것 없이 모두 해당된다. 지적 능력의 유무는 죄문제 해결책인 구원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 원죄(original sin)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고 인식론적으로도 부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자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다.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행2:38-39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와 네 자녀들에게 하신 것이라” 말씀한다. 죄가 보편적인 것처럼 구원의 필요성 역시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유아, 지적장애인 할 것 없이 모든 자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세르베투스를 향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자는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가 사실이라면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께 축복을 받았으니(마19:15; 막10:16) 당연히 그들이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빈은 예수께서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이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칼빈은 단순히 예수님의 개인적 축복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간적 기준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아이를 받으시고 축복하셨는데 인간인 우리가 왜 유아 세례를 거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도 인간적 기준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최홍석은 흥미롭게도 그의 인간론을 다룸에 있어서 뇌사 상태의 사람의 존엄성을 다음과 같이 변론한다.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인간 영혼의 의식적 존재는 결코 소멸되거나 멸절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주장하는 의학적 판단에 의하면 뇌의 신경 세포들이 그 작용을 멈추게 되면, 동시에 정신 현상도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견해는 유물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의식적 현상의 종결을 죽음의 시점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영혼의 의식적인 작용은 지속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해 볼 때 정신 현상의 종결을 죽음의 시점으로 보려는 시도는 결코 성경의 교훈과 일치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뇌사 상태라고 해서 결코 죽은 상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혼의 의식적인 작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적 장애인은 어떤 차원에서 뇌사 상태의 환자보다 의식적 작용이 더 분명하다. 사람의 의식적 상태의 유무는 겉으로 나타나는 육체적 상태로 판단할 수 없다. 심지어 최홍석은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주장하는 의학적 판단은 비록 몸은 소멸되었다고 해도 영혼의 의식적 작용은 지속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몸은 소멸된다고 해도 영혼의 의식적 작용은 지속된다면 육체적, 외형적 상태가 일반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해서 영혼의 의식적 작용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뇌사 상태의 사람과 지적 장애인을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사람의 의식적 활동을 겉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최홍석의 주장은 지적 장애인의 존엄성과 영혼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는 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
III. 구원론적 고찰
지적 장애인이나 유아나 노인이나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간이면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품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지적하듯이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아세례는 로마 천주교에서 주장하듯이 “사효적 효과”(Effectum ex opere operato)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아세례는 언약적 차원에서 부모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순종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와 같은 지적 장애인의 세례도 같은 차원에서 베풀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동으로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지만 세례를 받는 이유는 먼저는 하나님의 언약적 명령 때문이요 또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구원의 여부가 100% 결정되지 않았다고 세례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의 많은 학자들은 일찍 죽은 유아의 구원 문제와 유아세례와 연결시키곤 한다. 차영배는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유아 세례를 은혜언약에서 중생의 인친 것으로 봤다고 한다. 존 머레이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인치는 표지로서 유아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르트 신경은 유아는 부모와 함께 은혜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일찍 데리고 가셔도 선택과 구원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유아 세례가 구원의 100% 확실한 근거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례는 실체를 향한 표지(sign)요 인침(seal)이 되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고 일찍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이들에게 복음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능력이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속단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지적 장애인은 비록 신체적으로 성숙하고 활동적이긴 해도 지적으로는 유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유아세례가 자동으로 구원을 100% 보장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유아세례로 인해 유아 때 죽는다 할지라도 부모가 그의 구원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다면 또한 지적장애인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적 장애인의 세례가 그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새생명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은 그 세례를 통해서 부모들과 형제들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최홍석은 유아세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아세례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설명한다.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행위와 그의 계시가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근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 행위는 언약을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그러한 것들이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렇듯이 유아세례는 재세례파나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자체에 어떤 효력이나 마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아무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아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한 최홍석의 답은 유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 없다면 이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최홍석의 답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근거로 볼 때 ‘아니라’고만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최홍석은 개혁주의에서는 유아들의 경우 “자신의 지식 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방식에서 유아세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총은 서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성령의 조명으로 전도 없이도 내면적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게 하는 일이 있다”는 칼빈의 주장을 인용한다.
최홍석이 인용한 칼빈의 주장을 확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인데(롬10:17) 유아들은 아직 들을 능력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세의 가르침처럼 어린아이들은 선악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1:39). 그러나 이 사람들은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다만 주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실 때에 흔히 사용하시는 일상적인 절차와 경륜을 지칭하는 것 뿐이며, 다른 방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불변의 절대적인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그런 다른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복음 선포의 수단과 관계없이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그런 내적인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구원을 위한 일상적인 절차와 경륜,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절차와 경륜 외에 다른 방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믿음이 들음에서 나오는 절차와 경륜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는 절대적 기준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과 내적 수단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아의 지적 능력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최홍석은 칼빈의 주장을 언급한 후 “물론 여기서의 유아는 일단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로 제한한다. 이러한 경우, 유아들이 그들의 지식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의한 방법 외에 유아들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 그 길밖에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부연 설명을 한다. ‘지식 없이 구원 받은 유아는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로 제한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오해의 여지가 있다.
겔14:20에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말씀한다. 즉 구원은 자기에게 달린 것이며 부모 신앙을 근거로 유아세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 최홍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의 신앙으로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라는 것이다. 언약 공동체 안에서의 세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혁주의적 원리가 지적 장애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외형적 지식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도 없이 무식한 중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성령의 조명으로 전도 없이도 내면적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게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만 속한 “내면적 방법”으로 또한 성령의 조명으로 지적 장애인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지적 장애인에게도 하나님께 속한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언약 공동체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의 전제조건은 물론, 세례의 전제조건인 믿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유아의 믿음은 가능한 것인가? 더불어 지적 장애인의 믿음은 가능한 것인가? 칼빈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일상적인 절차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구원 얻는 절차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주장이 아니다. 믿음에 앞서는 성령의 조명과 하나님의 내면적 방법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최홍석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지만 믿음 자체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다만 구원의 원인인 은총의 방편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편에서 공로 차원에서 만들거나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여전히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믿음이 구원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있어서 필요한 믿음의 의미를 최홍석은 같은 맥락에서 다룬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시작하는 것 이전에 인간이 신앙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구원의 표를 받는 일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 구원의 표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구원의 표(sign)란 구원 받는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체를 지명하는 표라는 뜻이다. 표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 즉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세례에 앞서 지적 장애인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즉 그에게 지적 동의 차원의 믿음을 먼저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홍석은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로서의 ‘다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오직 은혜로써만 구원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일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의 실체는 믿는 개인의 의지적, 심리적, 지적, 심지어 영적 능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최홍석은 세례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구속사적으로 그리고 예정론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진정한 세례는 우리의 믿는 반응에 달려있는, 혹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지식 없이’ 되는 그 어떤 것이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더 깊이 말한다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롬 5:8).”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예정론적 설명은 우리와 상관없이 형식적으로 혹은 유명론적으로(nominally)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삼위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속사적-예정론적 표현은 다음과 같은 최홍석의 글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것이기에 물리적으로 현상적으로 파악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연합은 창세 전, 시간을 초월한 영원으로부터, 시간 너머의 종말론적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이므로 유한하고 죄악된 인간의 이해력으로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이란 표현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달렸다는 것은 구원의 신비적 특성을 의미한다. 그 신비적 특성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판단을 보류해야 함을 의미한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유아가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신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례를 받은 유아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신비인 것이다. 구원을 신비로 돌리는 것은 어떤 신비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홍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이 은혜로 세례 받은 유아들 역시 그의[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목된다. 유아들, 그들은 확실히 아직 어떤 이에 대해서도 모방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 … 그는 또한 그의 성령의 가장 비밀한 은총을 신자들에게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비밀스럽게 유아들에게까지도 부어주신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구원의 섭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신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말씀처럼 우리는 나타난 계시의 말씀대로 행할 뿐이며 모든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계시로 주어진 명령을 행하는 것이며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감추어진 일을 마치 알게 되었다는 단순 추측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적 장애인의 세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적 장애인의 지적, 의지적, 영적 능력에 근거하여 그의 세례의 정당성을 논할 수 없다. 그 정당성은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지적 능력만 아니라 믿음에서도 앞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세례는 물론 구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칼빈은 선택(예정)과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고서 선택이 사람의 동의에 의하여 인준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지에 따르면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다. 마치 성경이 우리에게는 믿을 능력만 주어지며, 믿음 그 자체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 약화시키지는 않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선택이 믿음에 의존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믿음으로 확증되기까지는 선택이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비록 지적 장애인의 믿음과 구원의 가능성을 100% 확신할 수 없다고 해도 그의 세례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가늠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예정론적 섭리와 신실하심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역사가 분명 세례를 받은 지적 장애인 위에 임할 것이다. 그가 구원을 받을지는 역시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다. 지적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축복과 은총을 우리 개인의 판단과 추측으로 막는 것은 성경적이라 하기 힘들다.
IV. 교회론적 고찰
유아세례는 성례전적으로만 아니라 구원론적으로도 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례는 교회 일원들이라면 다 받아야 하는 성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 한다면 분명히 구원을 받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유아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은 지적 장애인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의 가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최홍석은 누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거듭남과 신앙, 그것들의 결과는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 자체는 육안으로 파악되지 아니한다. 즉 육신의 차원을 뛰어 넘는 신령한 영역에 속하는 일들이다. 이렇게 볼 때 인생들 가운데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속하여 있는지를 아무런 오류 없이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거듭남과 신앙 자체는 육안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지적 장애인의 구원 역시 육안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적 장애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참된 교회에 속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지적 장애인이 세례를 받든지 받지 않든지, 교회를 다니든지 다니지 않든지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으로 세례를 받게 해야 하며 함께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홍석은 가시적(유형) 교회와 불가시적(무형) 교회를 구분하면서 루터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소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문제는 루터에게 있어서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bilis)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교회의 두 국면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바빙크에 따르면 루터가 의미하는 바는 선택 받은 자들은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개혁파에서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도 선택 받은 자들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바빙크는 주장하기를 “실제적으로 개혁파 교리는 하나님이 보통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말씀과 성사의 수단을 통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여 있지 않으며, 매우 드물게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을 베푼다고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즉 유아나 지적 장애인처럼 말씀과 성사의 수단과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얻을 수 있으며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홍석도 이러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교회의 본질, 그 본질이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참으로 거듭난 자들로만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거기서부터 가시화되는 현상으로서의 보이는 교회가 현시(顯示)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실제 경험 속에 보이는 교회는 전적으로 그러한 자들, 곧 거듭난 자들로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오류가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내면을 투시함으로써 경험적인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과 삶을 집중함으로써만 교회의 회원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최홍석은 종말론적으로 해결한다.
“따라서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같이 그 경게선이 중생과 신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고백과 외형적인 삶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에 또한 그 평가가 현실적인 경계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종말에 이르러서만 그 시시비비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 점은 예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13:24-30)를 통해 교훈하신 바 있다.”
최홍석의 한계 인정과 종말론적 결론은 비가시적 교회란 현실성이 없고 이 땅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권적 은총을 더욱 신뢰하고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비록 가시적 성도들로 구성되어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예정하시고 택하신 그의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가시적 차원에서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예정론적 섭리에 근거하여 유아나 지적 장애인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V. 결론
신1:39에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말씀한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 말씀이 유아들은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 선악을 분별하는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알 수는 있다.
같은 맥락으로 어떤 방법인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선악을 분별할 지적 능력이 없는 유아들이나 지적 장애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 그 모든 자라는 범주에 결코 지적 장애인이 제외될 수는 없다. 지적장애인의 구원의 가능성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신실함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우리는 지적 장애인의 세례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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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