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2007년 5월 2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국회의원 이원영 의원실과 세계평화청년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이란 제목의 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이 봉 원 (기록영화제작가)
[머리말]
발제자께서 작성하신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의 실태와 보존 방안>에 대한 원고를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유적이나 유물도 근대 문화재로 지정해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고, 독립기념관 안에 국내외 유적을 묶어서 조사하고 관리하는 팀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또한, “독립운동 유적지 기념 사업을 함에 앞서 무엇보다도 정확한 현장 조사가 선행돼야 하고, 이미 조사된 곳이라 하더라도 미흡하거나 수정되어야 할 경우에는 추가 조사 작업을 해야 한다.”고 언급하신 점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이 문제, 잘못 지정됐거나 조사가 미흡한 독립운동 유적지들은 실제 유적지가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신속히 재조사를 벌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뜻에서, 몇 가지 사례와 함께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방면의 전공자가 아닙니다. 방송작가이고 다큐멘터리 제작가일 뿐입니다. 제가 중국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한 직후였습니다. (TV 드라마 한중 합작 촬영에 집필 작가로 참여, 1992년 9월 24일부터 32일 간) 그때 저는 일제가 우리 땅을 강점하던 시기에 대한의 망명정부가 중국 땅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것이 계기가 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7년 역사와 중국 안에서 임시정부가 이동한 경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정이 험난한 현지를 여러 차례 답사하게 됐습니다.
아래는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 목적으로만 떠났던’ 저의 중국 여행 기록입니다.
[1차 답사] 1994. 4. 5 - 4. 27. (23일 간)
북경→서안→중경→귀양→유주→광주→장사→남경→소주→항주→가흥→상해
[2차 답사] 1998. 10. 7. - 10. 17. (11일 간, 노광복군들과 함께)
북경→서주→고진→숙주→부양→임천→서안→중경→상해
[3차 답사] 1999. 3. 4. - 4. 15. (45일 간)
북경→서안→상해→가흥→해염→항주→남경→진강→구강→무한→장사→광주→오주→유주→귀양→준의→기강→중경→북경→대련
[4차 답사] 2007. 1. 17. - 1. 24. (8일 간, 세계일보 기자와 함께)
장사→중경→기강→상해→부양→무한→북경
이렇게 여러 차례 중국 땅을 헤짚고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도 임시정부와 관련한 유적지를 반세기 만에 처음 찾는 한국인이 되기도 했고,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생존 지사님들의 증언과 현장 확인 조사를 통해 다행스럽게도 몇 군데 중요한 유적지를 제가 처음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하나씩 둘씩 사라지는 우리의 중요한 유적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중국 역시 도시마다 재개발 바람이 무섭게 불고 있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련 건물들은 세월의 무게가 너무 커서 현재 남아 있는 것들도 언제 자취를 감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내용들을 다큐멘터리와 소설에 담았습니다. 역사 다큐멘터리 3부작 <임시정부 27년 대륙 3만리>는 1999년 광복절에 맞춰 KBS-TV에서 방송했고, 이어 2권 짜리 장편소설 <국새>를 2006년 여름에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가 이런 내용을 담아 사회에 발표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부의 관련 기관은 물론 관련 사학계에서도 냉담했습니다. 제가 전공자도 교수도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서, 십수 년을 매달렸고, 모두 87일 동안 중국 내 26개 도시와 이동 경로를 수 차례 여행했으며,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생존 인사 35분을 만나 증언을 청취하고 녹화했습니다.
[제 작품에서 처음 소개한, 중국 내 임시정부 주요 유적지들]
1. 항쩌우(杭州), 임시정부 판공실이 있던 건물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社)’
[현주소] 仁和路 22호 群英飯店
* 항주 임정의 첫 임시판공처 (1932. 5. - 1932. 10.)
* 1910년 新泰飯店으로 설립, 손문 숙박. 1933년 ‘청태제2여사’로 개명. 1967년 ‘군영반점’으로 다시 개명하여 현재에 이름.
■ 1994. 4. 24. 이봉원 발견 촬영
(서울에서 자료를 통해 확보한 건물 주소가 현지에 가 보니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항쩌우 시에 살고 있는 노인들을 막연히 찾아다니며, 62년 전에 이 도시에 있던 ‘청태제2여사’란 데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중에 도시 변두리 다리 밑에서 친구들과 장기를 두던 한 노인이 그 곳을 안다고 말했다. 반가움에 곧장 ‘群英飯店’(여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현지로 달려갔으나, 정작 그 곳 종업원들은 ‘청태제2여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몹시 허탈한 심경으로 발걸음을 돌려 막 그 곳을 나오는 순간, 저녁 햇살이 현관에 있는 커다란 유리문짝을 비추는데, 거기에 옛 여관 이름인 ‘淸泰第二旅社’란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것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그때의 기분은 ‘아, 선열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이끄셨고 내게 여기라고 일러 주시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2. 난징(南京), 1933년 5월 김구와 장졔스가 회담한 방으로 추정되는 ‘난징 총통부 관저 소접견실’
[현주소] 南京煦園 內 孫中山臨時大總統辦公室
* 장졔스 총사령관 기거 (1927년 - 1937년)
■ 1994. 4. 21. 이봉원 발견
■ 1999. 3. 18. 이봉원 촬영
(한때 장졔스도 사용했다는 4층 짜리 총통부 관저 건물은 1999년 3월 당시에도 난징 시가 주요 기관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일반인은 출입할 수가 없었다. 5년 전 내부 진입에 한 번 실패했던 나는 이 날도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는데, 마침 그 건물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발견, 무작정 그를 붙잡고, ‘나는 한국에서 온 역사 연구가인데 어떻게 저길 들어갈 수 없냐?’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는 자신도 바로 옆 건물에서 근무하는 역사 연구원이라면서, 내게 그 건물에 대한 역사부터 설명해 줬다. 그런 뒤에 그는 나보고 자기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오라며 앞장을 섰다. 건물 3층에는 큰 방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작고 고풍스러운 접견실이 있었다. 그 곳이 장졔스가 사령관 시절 주로 썼던 소접견실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정신없이 몰래 촬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 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복도 쪽으로 난 소접견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 직원으로 보이는 남녀 세 명이 험악한 기세로 들어왔고, 나는 연구원이 그들한테 뭐라고 얘기를 하는 사이에 얼른 밖으로 나가 줄행랑을 쳤다. 친절한 중국인 학자한테는 미안스런 일이었지만 내겐 그 귀중한 필름을 빼앗기는 불상사를 피하는 게 더욱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3. 우한(武漢), 조선의용대 창설지로 추정되는 ‘대공중학(私立武昌大公中學)’ 자리
[현주소] 紫陽路 省總工會處 (옛주소, 黃土坡上街)
* “대공중학(1932년 - 1950년)에서 1938년에 혁명활동이 있었다.” (1999. 3. 22. 현지 교육청에서 자료로 확인)
*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창설일 (1938. 10. 10.)
* 대공중학 터에 한때는 ‘무창31중학’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2년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학교가 폐쇄됐음. (현지 교육청 자료)
* 김승곤 전 광복회장 증언 참고
■ 1999. 3. 22. 이봉원, 무창31중학 답사 촬영
■ 2007. 1. 22. 이봉원, 성총공회처 답사 촬영
4. 창사(長沙), 임시정부 청사 ‘서원북리(西園北里) 8호’
[현주소] 北區 通泰街 西園北里 2號 湖南省交通規劃勘察設計院 西園居住小區
* 임시정부 청사 (1937. 11. - 1938. 7.)
* 당시 서원북리 5, 6, 7, 8호는 한 건물에 똑같은 집 네 채가 들어 있는 2층 연립주택이었음.
(서원북리 6호가 청사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애국지사 신순호 님의 증언에 따르면 8호가 청사였다고 함. 그런데 6호나 8호나 연립주택의 일부라서 각 호의 집 모양은 똑같음.)
* 청사로 썼던 연립주택은 1997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현재 아파트가 들어섬.
■ 1994. 4. 19. 이봉원, 청사 건물 발견 촬영
5.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 병영이 있던 자리 ‘두곡양참(杜曲糧站)’
[현주소] 長安縣 杜曲鎭 杜曲糧站
* 1994년 4월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
* 1998년 10월에 당시 현지에서 훈련을 받았던 노광복군들을 모시고 가서 재확인
■ 1994. 4. 9. 이봉원 발견 촬영
(광복군 제2지대원이며 이범석 지대장의 부관으로 현지에서 OSS특공훈련을 받았던 김준엽 님이 쓴 자서전 ‘장정’에서 관련 정보와 사진을 구해 1994년 4월 현지를 방문했다. 그런데 광복군이 주둔했던 곳이라던 사진은 현지에서 찾아가 보니, 전혀 관련이 없는, 고찰 흥교사였다. 사찰 주지를 만나 면담을 했는데, 1945년에도 자신이 이 사찰에 있었는데 그때 한국사람이라곤 지나가다 들렀다는 두 남자를 본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허탈해진 마음에 흥교사를 나와 두곡 마을을 헤매며 주민들을 만났다. 마침, 마을 사랑방 같은 원두막에서 놀고 있는 너댓 명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한테서 결정적인 증언을 들었다. “마을에 노야묘(老爺廟)라 불리는 관운장 사당이 있었어요. 지금은 양곡 수매 창고가 들어섰는데, 당시 그 곳에는 한동안 2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살았지요. 미국인도 있었지만 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었어요. 가끔은 조선인 여자들도 보였고요. 그런데 그들은 동네 주민하고는 일절 말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는 ‘두곡양참’이 광복군 병영이 있던 자리란 것을 즉각 알 수 있었고, 2008년 10월에는 당시 그 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노광복군님들을 모시고 가서 거듭 확인을 했다.
참, 1994년 4월 말 귀국한 뒤, 몇 년 지나서, 김준엽 님을 뵈었을 때, 내가 자서전에 올라 있는 사진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여쭸더니, 선생님께선 껄껄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자서전을 쓸 때 그 두곡마을을 다녀온 어느 분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이 곳에서 특공훈련을 받지 않으셨냐고 묻는데,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그런 것 같기도 해서 그 사진을 자서전 초판에 실었었어요. 그런데 최근 내가 직접 현지에 가서 보니 그 사진은 흥교사 사진이 맞더라고요. 우리가 있던 곳하곤 전혀 상관이 없는··· 허허허!” 하셨다.)
6. 시안(西安), 김구 주석이 해방 소식을 처음 들은 곳 ‘황루(黃樓)’
[현주소] 산시성(陜西省) 성정부 구내
* 당시 산시성 주석 쭈싸오쩌우(祝紹周)의 관저
* 현재 지방문화재로 일반인 접근 금지
■ 1999. 3. 9. 이봉원 발견 촬영
7. 노광복군(일본군대 탈출 학병)들의 탈출 경로와 현장
- 서주, 고진, 숙주, 부양, 임천, 서안, 중경
■ 1998. 10. 노광복군들과 함께 답사
8. 기강(綦江),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임강가(臨江街) 43호’ 자리
[현주소] 重慶市 綦江縣 古南鎭 沱灣 8호
* 당시 입주 때 지명은 타만(沱灣)이었고, 머무는 동안에 임강가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다시 타만으로 바뀌었음.
* 애국지사 박영준, 신순호, 지복영과 유족 김자동 님들의 증언 일치
■ 2005. 9. 현주소 확인
■ 2007. 1. 19. 현지 촬영
[독립기념관 현지 실태 조사 보고서의 오류]
한국근현대사학회는 문화관광부와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2001년 12월 31일 독립기념관과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학술 용역을 체결하고, 조사 대상 지역을 중국 남부, 중국 서북부, 중국 동북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일본, 미주, 유럽 등 7개 지역으로 나눠, 2002년 1월부터 8월까지 주로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각 20일 안팎의 기간 동안, 현지를 조사하였습니다. 조사 팀은 국외 유적지 답사에 경험이 많은 대학교수와 강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는데, 책임연구원 1명과 연구원 2명, 독립기념관 연구원 1명, 사진기사 1명 등 5명이 1조를 이뤘습니다.
보고서는 2권으로 나눠, 2002년 11월 30일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란 제목으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8월 7일과 8일, 백범기념관에서는 관련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현황과 보존 문제’란 제목으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고, 자료집이 발간됐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이 만든 이들 보고서 속에서 지금까지 제가 조사한 것과는 다른 내용들이 있어서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조사한 중국 현지 유적지들은 보고서에 나오는 유적지들 가운데 극히 일부이고, 비교는 그것에 한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