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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 1부 7
방문은 요전과 마찬가지로 빠끔히 열리고, 또다시 어둠 속에서 의심에 찬 두 눈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이때 라스콜니코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그는 자기와 노파 두 사람뿐이라는 데 노파가 공포를 느끼는 것이 두려웠고, 또한 자기 모습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다는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노파가 다시 문을 닫아버리지 못하도록 문짝을 앞으로 홱 잡아당겼다. 노파는 그것을 보고도 방문을 도로 닫으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손잡이를 쥔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그는 문과 함께 노파를 거의 층계 어귀까지 끌어낼 뻔했다. 그래도 노파가 문간에서 앞을 막고 서서 그를 들여놓지 않으려 하자, 그는 노파를 밀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놀라 비켜서면서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안 나오는 듯 눈만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알료나 이바노브나." 그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하려 했으나, 음성은 자꾸만 끊어지면서 떨려 나왔다. "당신한테....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자, 저쪽으로 가시죠.....밝은 곳으로........" 이렇게 말한 그는 노파를 내버려둔 채 허락도 없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뒤따라 달려 들어왔다. 그녀의 혀가 겨우 풀리기 시작했다.
"이봐요! 대체 무슨 용건이오?.....당신은 누구요? 용건이 뭐요?"
"왜 그러세요, 알료나 이바노브나....다 아시면서... 라스콜니코프입니다.....일전에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노파 앞에 저당물을 내놓았다.
노파는 물건을 바라보려다가, 곧 다시 이 불청객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고도 심술궂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1분쯤 지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무언가 조소에 가까운 빛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가 몹시 당황하고 있음을 느끼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렇게 그녀가 30초쯤 더 아무 말 없이 그냥 노려보았다면 그는 노파 앞에서 도망을 쳤을 것이다.
"왜 그렇게 보시죠?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하고 그도 역시 퉁명스런 어조로 불쑥 뇌까렸다. "마음에 들거든 잡아주시고, 안 들거든...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바쁘니까요."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오고 말았다.
노파는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손님의 분명한 어조가 겨우 그녀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젊은이, 너무 뜻밖이라서....대체 이건 뭐요?" 물건을 보면서 그녀는 물었다.
"은으로 만든 담뱃갑이에요, 요전에 말해두었었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죠? 저런, 손을 다 떠는군! 무엇에 놀라기라도 했나요?"
"열이 좀 있어서요." 그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별수 있습니까,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먹을 것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는 간신히 입을 놀려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고는 또다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대답은 그럴싸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노파는 물건을 집어들었다.
"대체 이게 뭐요?" 노파는 다시 한 번 라스콜니코프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는 손으로 무게를 달아보면서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담뱃갑이죠....은으로 만든 ....보면 아실 겁니다."
"글쎄, 아무래도 은 같지가 않은데....단단히도 묶었군."
끈을 풀려고 애쓰면서 노파는 밝은 창문쪽으로 몸을 돌렸다(이렇게 무더운데도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녀는 몇 초동안 그를 내버려둔 채 뒤로 돌아섰다. 그는 외투 단추를 끄르고 도끼를 올가미에서 벗겼으나, 아직 완전히 빼지는 않고 외투 속에서 오른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양손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마비되고 굳어져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도끼를 꺼내다가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뭣 하러 이렇게 꽁꽁 묶었을까!"하고 노파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하며 그에게로 조금 몸을 움직였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도끼를 빼 들자 몽롱한 의식 속에서 두 손으로 도끼를 추켜들었다. 그리고 거의 힘도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노파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이때는 힘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으나, 일단 도끼를 내리치자 금방 그의 몸속에 힘이 솟구쳤다.
노파는 언제나처럼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흰 머리털이 드문드문 섞인 숱 적은 금발 머리칼은 여느 때처럼 번지르르 기름을 발라서 쥐 꼬리처럼 가늘게 땋았는데, 그것이 뿔빛 조각에 감겨 뒤통수에 삐죽 꽂혀 있었다. 도끼는 바로 정수리에 맞았다. 그녀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내질렀으나, 극히 약한 소리였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로 가져가긴 했지만 털썩 그대로 마룻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 손엔 아직도 '저당물'을 쥐고 있었다. 그때 그는 다시 한두 번 도끼뿔로 정수리를 힘껏 내리쳤다. 피는 컵에서 엎질러진 듯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노파의 몸은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 노파가 쓰러지는 것을 본 다음 곧 노파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벌써 죽어 있었다. 눈은 금방 튀어나올 듯이 부릅드고, 이마아 얼굴 전체는 주름투성이가되어 경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도끼를 시체 옆 마룻바닥에 놓고, 흐르는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얼른 그녀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전번에 열쇠를 꺼낸 바로 그 오른쪽 호주머니였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되찾고 더는 혼미나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래도 손만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훗날 그는 이때까지 자기가 무척 주의 깊고 세심하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고심했던 것을 상기했다......곧 열쇠를 꺼냈다. 요전처럼 모두 둥근 쇠고리에 꿰어 있었다. 그는 열쇠를 들고 다짜고짜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방은 몹시 조그만 방으로, 큼직한 성상함이 있고 벽 쪽에는 비단 헝겊 조각을 모아 만든 솜이불이 덮인 크고 깨끗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또 다른 벽 앞에는 장롱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열쇠를 장롱에 끼려다가 열쇠꾸러미의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 속에서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또다시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었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하여 문득 또 한 가지 불안한 상념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을 때 그는 스스로 냉소하듯 히죽 웃기까지 했다. 다름 아니라 어쩌면 노파는 아직 살아 있어서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열쇠도 장롱도 다 내버려두고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도끼를 집어 들고 다시 한 번 노파 위에 추켜들었으나 내리치지는 않았다. 노파가 죽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까이 허리를 굽히고 더 자세히 노파를 살펴보니 두개골이 부서져 옆으로 조금 처져 있는 것까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려다가 얼른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사태는 명백했다. 그사이에 피는 웅덩이같이 괴어 있었다. 그는 문득 노파의 목에 끈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잡아당겨보았으나 단단해서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가슴팍에서 그냥 꺼내려 했으나 무엇인가 방해가 되어 걸렸다. 그는 초조한 나머지 다시 도끼를 들고, 끈을 시체 위에 놓은 채로 끊으려 했으나 차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거기서 2분쯤 안달을 하며 손과 도끼를 피투성이로 만든 끝에 겨우 시체에 도끼를 대지 않고 끈을 잘라냈다. 과연 그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갑이었다. 끝에는 나무와 동으로 만든 십자가가 두 개, 그밖에도 에나멜 성상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기름때가 묻은 그리 크지 않은 양피 지갑이 달려 있었다. 지갑은 터질 듯이 불러 있었다. 라스콜리코프는 조사해보지도 않고 그것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십자가는 노파의 가슴팍에 내던지고는, 도끼를 들고 다시 침실로 달려갔다.
그는 몹시 서둘렀다. 열쇠를 잡고 다시 옷장을 열려고 했으나, 왜 그런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열쇠가 구멍에 들어맞지 않았다. 손이 그다지 심하게 떨리는 것도 아닌데 자꾸 틀리기만 했다. 예를 들어 열쇠가 틀려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같은 것을 집어넣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생각이 났다. 다른 작은 열쇠에 섞여 흔들거리는 톱니 모양의 큼직한 열쇠는 분명히 장롱 열쇠가 아니라(이것은 전에도 그의 머리에 떠올랐던 일이지만) 아마도 트렁크 열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렁크 속에 전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장롱을 내버려두고 곧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늙은이들은 대개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어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과연 거기에는 길이 1아르신(약 70센티미터)이 넘는, 불룩한 뚜껑이 달리고 붉은 양피가 씌워져 강철못이 가득 박혀 있는 제법 훌륭한 트렁크가 놓여있었다. 톱니 모양의 열쇠가 딱 들어맞더니 뚜껑이 열렸다. 위에는 하얀 천 밑에 빨간 안감을 댄 토끼 가죽 외투가 들어 있었다. 그 밑에는 비단옷, 또 그 밑에는 숄, 그리고 밑바닥에는 너저분한 옷들뿐인 것 같았다. 그는 우선 피투성이 손을 빨간 모피 외투에 씻으려고 했다. '붉구나, 붉은 데다 씻으면 피도 눈에 띌 리 없겠지'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갑자기 제정신이 들었다. '아아, 나는 지금 미치지 않았을까?' 그는 공포에 질린 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너저분한 옷가지를조금 들추자 느닷없이 모피 외투에서 금시계가 떨어져 나왔다. 그는 트렁크 안을 들추기 시작했다. 과연 옷가지 사이사이에는 금붙이가 들어 있었다. 아마 기한이 지났거나, 아직 기한이 안 된 저당물일 것이다. 팔찌, 목걸이, 귀고리, 핀 등이 어떤 것은 주머니에 어떤 것은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꼼꼼하고 면밀하게 종이를 두 겹으로 해서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는 속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포장지를 풀지도 않고 일각도 지체함 없이 그것들을 바지와 외투 호주머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이 집어넣을 여유는 없었다......
갑자기 노파가 쓰러져 있는 방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멈추고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주위는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별안간 가느다란 외침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끙끙 낮은 소리로 신음을 하고는 잠잠해진 것 같은 인기척이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다시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1,2분 계속되었다. 그는 트렁크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을 죽이고 동태를 살피다가, 벌떡 일어나며 도끼를 집어 들고는 침실에서 뛰쳐나갔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보따리를 손에 든 리자베타가 온몸이 마비된 듯 우뚝 서서 피살된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서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달려 나온 그를 보자 그녀는 나뭇잎처럼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고, 경련이 얼굴 가득히 스쳐갔다. 그녀는 한 손을 조금 들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역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똑바로 그를 응시하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한쪽 구석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려 해도 공기가 부족하기라도 한 듯 여전히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는 도끼를 추켜들고 덤벼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가련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조그만 어린애가 몹시 놀라서 무서운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금방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것과 똑같은 꼴이었다. 이 불행한 리자베타는 너무도 순박하여 밤낮 학대를 받고 아주 기가 죽어버린 여자인지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도끼는 이미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졌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오른손을 가까스로 쳐들기는 했으나, 그것도 얼굴보다는 훨씬 아래쪽이었다. 그러고는 상대방을 밀어젖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천천히 그 손을 그에게로 뻗쳤다. 도끼날은 바로 두개골을 내리쳐서 이마 위를 완전히, 거의 관자놀이께까지 깨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만 얼떨결에 그녀의 보따리를 낚아챘으나, 다시 그것을 내동댕이치고는 문간방으로 뛰어갔다.
공포는 점점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더욱이 이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살인 뒤에는 점점 더 공포가 더해갈 뿐이었다. 그는 한시바삐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이 순간 좀 더 정확하게 보고 또한 판단할 수 있었다면, 현재 상태의 곤란과 절망과 추악함과 우열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이보다 더한 갖가지 곤란을 극복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더 큰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분명 모든 것을 내던지고 곧장 자수하러 갔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걱정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포와 혐오때문에. 더구나 혐오감은 시시각각 그의 마음속에서 성장해갈 뿐이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트렁크 옆은 고사하고 그 방에조차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종의 방심 상태라고나 할까, 명상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이 차차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잊고, 아니 그보다는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자꾸만 사소한 일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 부엌을 들여다보고 반쯤 물이 든 물통이 의자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손과 도끼를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끈적끈적했다. 그는 도끼날을 아래로 물속에 집어넣고, 창틀 위에 있는 이 빠진 접시에서 비누 조각을 집어서 물통 속에 넣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손을 씻고 나서 그는 도끼를 꺼내 우선 도끼날부터 씻고, 오랫동안, 거의 3분이나 걸려서 비누칠까지 해가며 피 묻은 도낏자루를 씻었다. 그러고는 부엌 가득히 널어놓은 빨래로 깨끗이 닦은 다음, 한참 동안이나 창가에서 주의 깊게 도끼를 조사했다.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도낏자루가 축축할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도끼를 외투 안의 올가미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어두컴컴한 부엌의 빛으로 외투와 바지와 구두를 살펴보았다. 얼른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구두에 얼룩이 져 있었다. 그는 넝마에 물을 축여 구두를 닦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로서는 잘 분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은 몰라도 남이 보면 금방 눈에 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괴롭고 암담한 상념이 그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 순간 사물을 판단할 수도 없고, 자신을 지킬 힘도 없으며,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이거 큰일 났군!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해! 그는 중얼거리며 현관 쪽으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다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으나 아무래도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이, 현관에서 층계로 통하는 바깥문이, 아까 그가 초인종을 울리고 들어온 그 문이 열린 채 손바닥이 들어갈 정도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잠그지도 않고 빗장도 지르지 않은 채 그동안 죽 열려 잇었던 것이다! 어쩌면 노파는 만일을 위해 그가 들어온 다음에 일부러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그 후에 리자베타를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녀가 어디로 들어왔는지를 생각도 안해보다니! 설마 벽을 뚫고 들어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문쪽으로 달려가 빗장을 질렀다.
'아니, 이게 아니다, 또 엉뚱한 짓을 하는구나!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해......'
그는 빗장을 빼고 문을 연 다음, 층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 멀리 아래쪽, 아마도 출입문 옆이리라, 누군가 두 사람의 높다란 목소리가 외치고, 싸우고,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자식들, 뭘 하는 걸까.......'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드디어 뚝 끊어진 듯 일시에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가버린 것이다. 그는 복도로 나가볼까 했다. 그러나 이번엔 바로 아래층에서 층계로 향한 문에 요란스레 열리더니,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렇게 계속 시끄러울까!'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고 기다렸다. 이윽고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인기척도 없어졌다. 그가 층계에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또 다시 누군가의 새로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꽤 멀리서, 아마도 맨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이때 어째선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 이것은 분명히 이곳으로, 4층ㄹ 노파의 방으로 오는 것이 틀림없다고 의심했다. 그는 후에도 이 일을 매우 똑똑히 기억했다. 어째서였을까? 그 발소리에는 뭔가 특수하고 뜻있는 울림이라도 깃들어 있었던 걸까? 그것은 무섭고 규칙적이고 느린 발소리였다. 아아, 벌써 그 사내는 1층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고 있다. 점점 발소리가 뚜렷해진다! 올라오는 사나이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3층이다......이리로 오는 것이다! 갑자기 그는 자기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속에서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는데, 자기는 땅에 붙어버리기라도한 듯이 옴짝달싹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손님이 드디어 4층 층계를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로소 부르르 몸을 떨고 미끄러지듯 재빨리 방쪽으로 들어가서 뒤로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다음 빗장을 잡고 살며시 소리 나지 않게 고리에 걸었다. 본능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마치자, 그는 숨을 죽이고 바싹 문 옆에 붙어섰다. 미지의 사나이도 벌써 문밖에 와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로 마주 서 있다, 마치 얼마 전에 그와 노파가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귀를 기울이던 것처럼.
손님은 몇 번이나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놈임에 틀림없군.' 손에 든 도끼에 힘을 주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손님은 초인종 끈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양철 소리 같은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문득 방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몇 초간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까지 했다. 미지의 사나이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울리고 잠시 기다려보더니, 더 참지 못하고 힘껏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공포에 질려 빗장 고리 속에서 날뛰는 돌쩌귀를 바라보면서, 금방 빗장이 벗겨질 것만 같은 공포를 안고 기다렸다. 사실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만큼 세차게 잡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빗장을 누를까도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면 사나이가 눈치챌 염려가 있었다. 그는 또다시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 쓰러질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이 번득였다. 그런데 이때 미지의 사나이가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고 있는 건가, 아니면 목 졸려 죽기라도 했나? 제리갈!" 하고 그는 통 속에서라도 외치는 듯한 소리로 짖어댔다. "이봐요, 알료나 이바노브나, 마귀할멈!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절세의 미인, 문을 열어요! 쳇, 제기랄, 모두 잠들었나?"
그리고 또다시 화가 난 듯이 계속해서 열 번쯤 힘껏 초인종을 울렸다. 물론 이 사나이는 이 집에서 세력이 있는 친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이때,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는 빠른 발자국 소리가 가까운 층계 위에서 들려왔다. 또 누가 온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처음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도 없습니까?" 다가온 사나이가 초인종을 울리고 잇는 먼저 온 손님에게 잘 울리는 쾌활한 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코흐 씨!"
'목소리로 보아 아주 젊은 사내인가 보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자물쇠를 부숴버릴 뻔했소"하고 코흐는 대답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아시죠?"
"아니, 엊그제 함부리누스에서 당구를 칠 때 내리 세 번이나 당신을 이겼잖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두 사람 다 없나요? 이상한데. 이거 정말 놀랄 일이군요. 대체 그 할멈이 어디 갈 데가 있을까? 좀 볼일이 있는데."
"나도 볼일이 있다오!"
"그러나 하는 수 없군요, 돌아가는 수밖에. 제기랄! 돈을 좀 꾸러 왔더니만!" 젊은 사내가 소리쳤다.
"물론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왜 시간까지 정했을까? 망할 놈의 할멈 같으니, 자기가 시간을 정해놓고선.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군. 이거 괜히 돌아가게 됐는걸. 제기랄. 밤낮 들어앉아서 다리가 아프니 뭐니 엄살을 부리더니만, 하필 지금 놀러 나가다니!"
"문지기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무엇을?"
"어딜 갔는지, 그리고 언제쯤 돌아오는지."
"흠.....빌어먹을....물어볼까....그러나 그 할망구 어디 갔을 리가 없는데......"
그는 다시 한 번 손잡이를 잡아달겼다. "제기랄, 할 수 없군, 가보지!"
"잠깐만!" 하고 갑자기 젊은 사내가 소리쳤다. "보세요, 잡아당기면 문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문은 잠긴 게 아니라 빗장이나 고리만 걸려 있는 거예요! 들어보세요, 빗장 소리가 달그락거리죠?"
"그래서?"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둘 중 한 사람은 집에 있어요. 만약 둘 다 나갔다면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지, 안에서 빗장을 지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때요, 자, 들어보세요, 빗장 소리가 달그락거리지요? 안에서 빗장을 질렀다면 집에 사람이 있어야죠, 그렇잖아요? 그러고 보면 집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열어주지 않는 거예요!"
"음, 과연 그렇군!" 코흐는 놀란 듯이 말했다. "그럼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맹렬히 문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잠깐만!" 젊은 사내는 다시 외쳤다. "잡아당기지 마세요, 여기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습니다....당신이 초인종을 울리고 문을 잡아당기고 햇는데도 열리지 않으니, 두 사람 다 기절해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우리 이렇게 합시다! 문지기를 불러봅시다. 그 사람을 시켜 깨우게 하죠."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잠깐! 당신은 여기 남아 계십시오. 내가 얼른 달려가서 문지기를 불러올 테니."
"왜 남아 있으라는 거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나는 예심판사가 될 준비를 하는 중이에요! 이건 반드시 뭔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젊은 사내는 열을 올려 소리치면서 재빨리 층계를 내려갔다.
코흐는 남아서 다시 한 번 조용히 초인종을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초인종은 한번 짧게 울렸다. 그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검사라도 하듯이 살며시 문의 손잡이를 움직여보았다. 문이 안에서 빗장만 질려 있는지 어떤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이 밀어보고 당겨보곤 했다. 그러다가 그는 씨근거리며 쭈그리고 앉아서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안에서 열쇠가 꽂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일 리는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도끼를 움켜쥔 채 서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이 들어온다면 두 사람과 싸울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며 말을 주고받을 때, 그는 대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고함을 칠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또는 그들이 문을 열기 전에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실컷 놀려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빨리 결말을 내다오!'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1분, 2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코흐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쳇, 이게 무슨 꼴이야!" 갑자기 그는 이렇게 외치며 더 참지 못하고 감시하는 일을 포기한 채 황급히 층계를 구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발소리도 사라졌다.
'아아, 어떻게 한다?'
라스콜니코프는 빗장을 빼고 문을 빠끔히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와 되도록 문을 꼭 닫고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층계를 세 단 내려갔을 때 갑자기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숨을까! 그러나 숨을 곳은 없었다. 그는 노파의 방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야, 이 새끼야! 좀 기다렷!"
이렇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아래층 방에서 뛰어나와, 달린다기보다 데굴데굴 구르듯 계단을 내려가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미치카! 이 뒈져버릴 놈앗!"
이윽고 그 외침은 외마디소리로 끝나고, 마지막 소리는 밖에서 들렸다.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몇 사람의 목소리가 큰 소리로 지껄이면서 요란스럽게 층계를 올라왔다.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아까 그 젊은 사내의 목소리를 가려 들을 수 있었다. '그 패거리다!'
이제는 완전히 자포자기가 되어 그는 곧장 그들 쪽을 향해 나갔다. 될 대로 되라! 불러 세우면 만사는 끝장이다.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어차피 마지막이다. 얼굴을 기억하게 될 테니까. 이미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과의 사이에는 이제 층계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의 구원이 나타났다! 몇 계단 밑 오른쪽에 열려 있는 빈방 하나가 있었다. 칠장이들이 페인트칠을 하던 2층 방인데, 마치 일부러 방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 모두 일을 마치고 나간 뒤였다. 조금 전에 떠들며 내려간 것은 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마룻바닥은 방금 칠이 끝나서, 방 한가운데 조그만 통과 페인트 솔이 든 이 빠진 접시가 놓여 있었다. 순간 그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벽 뒤에 몸을 숨겼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다. 이때 그들은 2층 어귀에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그들은 옆을 지나 4층을 향해 올라가면서 큰 소리로 지걸여댔다. 그들을 지나 보내자, 그는 발끝으로 걸어 나가 곧장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층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문가에도 역시 없었다. 그는 재빨리 대문에서 거리로 빠져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이미 노파의 방에 들어갔으리라는 것도, 바로 조금 전까지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리라는 것도, 그들이 이미 시체를 발견했으리라는 것도, 방금 그곳에 있던 범인이 어디엔가 숨었다가 그들의 옆을 빠져 도망쳤다고 상상하고 추정하기까지 단 1분도 안 걸리리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위로 올라가는 동안 범인이 빈방에 숨어 있었음을 알아챘으리라는 것도....이 모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첫 모퉁이까지는 이제 100보쯤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그는 도저히 걸음을 빨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 집 문 밑에라도 숨을까, 아니면 어디 남의 집 층계 같은 데서 기다리면 어떨까? 안 된다! 그건 그렇고, 도끼는 어디다 버리는 게 어때? 마차를 잡아탈까? 아, 큰일 났구나!'
이윽고 옆 골목 어귀까지 왔다. 그는 초주검이 된 채 골목 어귀를 돌았다. 여기까지 오면 벌썬 반은 산 셈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혐의를 받을 염려도 적고, 게다가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므로 그는 모래알 같은 사람들 속으로 끼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갖가지 괴로움이 심신의 힘을 죄다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려 목덜미가 흠뻑 젖었다. "흥, 어지간히 마셨구나!" 그가 개천가에 나왔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이미 분명한 의식이 없었다. 앞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개천가에 나왔을 때, 그는 오가는 사람이 적다는 데 놀라서 이런 곳에선 남의 눈에 띄기 쉬우니 다시 골목길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으나, 그래도 길을 돌아서 정반대 방향으로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 집 대문간을 지날 때도 그의 의식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층계를 오르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도끼 생각이 났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직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도끼를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도끼를 지금 당장 갖다 놓지 말고 나중에 언제라도 좋으니 남의 집 뒤뜰에라도 던져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사는 무사히 끝났다. 문지기 집 문은 닫히기는 했으나 잠겨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문지기가 방에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도 그는 전혀 사물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곧장 문지기 방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만약 문지기가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면, 그는 대뜸 도끼를 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지기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의자 밑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처럼 장작개비로 가려두기까지 했다. 그는 거기서 자기 방에 갈 때까지 아무도, 누구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네 방문도 닫혀 있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는 잠들지는 않았지만 망각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면,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을 것이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단편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중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었고, 또 어느 하나에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