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
지고의 선에 기도합니다.
부디 제 마음이 열려 스스로 의식의 진실을 알게 해주소서!!
호모스피리투스(영적 신인류) 부록 D. 양자역학
영적독자들을 위해 실상에 대한 뉴턴적 패러다임과 양자적 패러다임 간의 차이가 개략적으로 진술될 수 있다. 과학적 정신에게 고등이론 물리학의 수학적 이해의 진화는 이론 물리학의 발견을 통한 진보를 필요로 한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뉴턴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체계는 미적분학으로 표현되었다. 19세기 후반 제임스클락크 맥스웰은 '빛의 파동적 본성을 전기역학적'으로 처음 밝혀냈다.
참고) . 맥스웰은 진공에서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해 본 결과 빛의 속도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 하였다. 그는 빛이 전자기파의 한 형태라고 결론을 내었다. 맥스웰에 빛이 파동이라는 것은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유도되었으므로 이는 빛의 파동설을 확고히 하였다
1900년 경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 실험에서 원자의 진동수를 양자화하여 저 유명한 '플랑크 상수'를 도입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광전자 효과를 분석하여 빛이 입자로 구성됐음을 밝혀냈다. 1913년 닐스 보어는 수소원자 복사를 양자화했다.
1923년 콤프턴은 빛 입자를 광자로 규정했다. 1927년까지 데이비슨, 저먼, 드브로이는 빛과 전자가 파동임과 동시에 입자일수 있음을 밝혀냈다. 1930년까지 양자역학이라는 미시물리학이 하이젠벨크, 슈뢰딩거, 보른, 보어, 디랙의 공동노력으로 발전했다.
고등이론 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과학적 사고의 철학속에 포함된 기본적인 인식론의 해석에 지배된다. 양자 발견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의미의 하나는 아원자 현상속의 인과율 붕괴를 포함한다.
양자역학의 기초
양자역학은 보다 관습적인 거시 물리학과의 친숙함에서 비롯되는 일반적 신념과 배치되는 데가 있다. 확정지어야 할 저변의 상태는 가변적이며 위치, 운동량, 시간, 전위, 운동에너지, 각도에 그리고 인간의 관찰행위 그 자체, 이른바 의식과 같은 비물질적 성질에 의존한다.
영적제자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사항은 우리가 실상(reality)으로 추정하는 것의 다양한 기층은 인간관찰이라는 단순한 행위에 크게 영향받고 또 그로 인해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발견한 것은 그가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발견은 발견자의 의도의 산물'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사례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다음의 예이다. 물질 원자가 반물질 원자와 충돌하면 두개의 광자가 방출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다. 광자가 방출되는 순간에 광자에 회전은없다. 하지만 인간 관찰자가 그중 한 광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곧장 회전하기 시작한다. 같은 순간에다른 광자가 동시에 반대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현상은 저절로 시작되지 않고 오직 인간 관찰의 결과로 일어난다. 이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과 물질의 현상적 세계 양자의 바탕이 되는 저변의 모체/격자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설명
양자역학의 발견은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관찰과 참여의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인식론적, 철학적 이해의 혁신을 요구했다. 1927년 코펜하겐 솔베이 회의에서는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이 관찰자 효과를 밝히는데 충분한지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보어, 아인슈타인, 디랙, 폰 노이먼, 위그너와 같은 이들의 서로 다른 해석에 따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나중에 하이젠베르크 선택으로 불렸다.
이것은 선형적 영역에서 비선형적 영역으로 도약하는 경계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러한 이행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사건을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통합요소로서 의식을 포함시킬 것을 거부한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것은 그의 측정수준이 뉴턴과 똑같이 499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전에 근육테스트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것이 '예'나 '예 아님'을 나타내는 반응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폰 노이먼 공식'으로 불리는 양자이론과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서 자연계의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정 1과 과정 2로 불리는 두개의 동시적 과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과정 2는 물리적 특성에 국한되는 반면 과정 1은 의도 및 선택이라는 인간의식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즉 우리가 발견하게되는 것은 질문자체의 성격과 그것의 저변에 깔린 의도에 의해 이미 영향받고 미리 선택된다는 것이다.
과학과 의식의 연구자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기본적으로 맥락과 내용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고 이러한 이해가 내용과 기능이 맥락의 장 효과에 지배되는 뇌기능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선택은 가능한 '예' 답변들에 열려 있거나 혹은 '예아님' 배제에 따라 제외되거나 한다.
의식의 양자론을 창조하려는 지성의 시도(즉 경험은 파동함수의 붕괴의 결과다)가 그 자체의 차원의 한계라는 '유리천정'에 부딪쳐 패러다임 도약(즉 의식수준 500을 넘는 것)을 하지 못한 채 더이상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 다음에 그것은 신비가의 실상의 패러다임으로 이어진다.
양자 물리학자는 내용의 전문가이고, 신비가는 맥락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접점은 선형성에서 비선형성으로, 에고에서 영성으로, ~에 대해 아는 것에서 '실상과의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으로의 도약이 일어나는 중심자리이다.
에고를 해체함으로써 에고와의 동일시를 초월한다는 영적작업의 목적은 패러다임 한계의 해소에 필요한 변형을 촉진시킨다. 자기에 대한 인식은 한정된 내용에서 무한정의 맥락으로 이동하고 그 다음에 여정은 존재자체의 근원-철저한 주관성인 무한한 나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완결된다.
토론
양자역학은 기적적인 일의 발생, 기도의 효력, 의지의 행사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한다. 자유의지의 행사에서 '선택'은 맥락을 바꿈으로써 잠재성을 바꾸고 이는 차례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낮은 힘(force)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낮은 힘은 연쇄가 암시적 인과관계에 기인할 경우에 필요할 것이다. 만약 우주가 결정론적 인과관계에 속박되어 있다면 모든 사건은 낮은 힘의 귀결로 일어날 것이고 이는 종속적 원인들의 무한한 사슬로 귀착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어떤 영적책임이나 자유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실상(reality)에서 모든 행위는 단순히 조건들을 변화시키는데 그치고 만다. 뒤이어 일어나는 현상은 그 자체의 본질의 표현이며 그 어떤 외적근원에서 유래되지 않는 반작용이나 반응들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는 사건들의 표면상의 연쇄에 대한 추정되고 관찰된 지각이 실제로는 자극과 반응이고 그 속에서 인간의식은 다수의 가능한 반응가운데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들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들거나 혹은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 양자론의 발견이 인과율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은 주목을 요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는 인과율이 입증 가능한 실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신작용이며 작용하는 이론이고 하나의 설명임을 명료히 드러낸다.
우리는 이 중대한 이해의 유용함을 '그 사상의 시대가 왔다'는 예를 이용하여 보여줄 수 있다. 그 사상은 내용이고 시대가 왔다는 맥락이다. 맥락은 사실상 수백만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에 균형,강도, 밀도의 임계점에서 사상은 실상으로 현실화 될 수 있다.
현실화의 메카니즘은 원인이 아니라 대중의 의지와 인간성향의 변덕스러운 흐름에 의지한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편이 갑자기 지나간 한 시절을 불러내 그 시절의 온갖 음악, 장식, 의상, 태도를 유행시킨다. 예를 들면 2001년 9월 11월 이후 성조기 게양이 다시 붐을 이루었다.
상징은 내용이나 맥락 혹은 둘다 일 수 있고 가치관, 행동, 우선순위에 미묘하지만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스캔들이 제국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반적인 불특정한 조건들(맥락)이 무수한 잠재성의 출현가능성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세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태도의 온전성은 비할바 없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사회적 맥락을구성하고 그 속에서 무수한 선택이 이루어져 광범위한 귀결을 갖는 결정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주와 의식의 상호작용을 보다 명료히 밝히기 위해서는 '내용과 맥락'간의 표면적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용과 맥락이 사실상 주의의 초점의 임의적 선택임이 금세 명확해진다. 두 용어는 다른 범주나 조건이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정신화와 관점을 가리킨다.
대상의 장에서 주의나 고찰을 위해 어느 한가지나 몇가지를 선별할 수 있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맥락으로불린다. 만약 우리가 선별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애초에 선별한 대상들은 이제 내용에서 새로운 맥락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용어상의 변동이 일어난다. 예를들면 우리가 행성지구(내용)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머지 우주는 맥락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기위해 행성 화성을 고른다면 행성 지구는 나머지 우주라는 맥락의 일부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조전체의 전부임에는 임의적 지각과 관찰점을 통해 그것에 대해 정신화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실제적 분리가능성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오직 관찰가능한 것뿐 증명가능한 것은 없고 관찰대상은 마음 자체내에서의 임의적 선별의 귀결이다.
단순히 주의의 초점을 이동하는 것만으로 내용은 언어적으로 맥락이 되고 그 역의 관계도 성립된다. 그리하여 우주의 표면적 반짝임과 시간 및 사건으로의 그것에 대한 묘사는 연쇄이자 원인, 선행요인, 귀결,여기와 저기인데 사실상 이들은 가설적인 객관적 실상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정신화에 대한 묘사이다. 모든 지식은 어떤 인식론적 모체에 근거하고 그 속에서 태어나는데 그 인식론적 모체는 저절로 이해의 맥락을 형성한다. 인식론의 맥랑은 차례로 의식의 비선형적 성질들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보체계는 그것에대해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의식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모든 인식은 순수히 주관적이라는 것과 인식은 사실상 연구자의 참나가 존재하는 전부를 이미 포함하기 때문에 가능할 뿐이고 그렇지 않다면 인식하는 성질과 능력이 애당초 불가능했으리라는 각성에 불가피하게 도달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선별된 그 모든 사건의 목격자는 그리하여 내용이자 맥락이며 따라서 이원성의 인식론적 딜레마 자체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진정으로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저 ~~에 대하여 알 수 있을 뿐인데 진정으로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의식과 본질이 하나임으로 합쳐지는 비언어적 각성이다.
위에서 든 비유와 사례들로부터 우리는 비선형적 영역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무한한 수의 복잡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장을 이루는데 이 장은 무수한 수의 알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무한한 수의 가능한 반응들을 배태하고 이 모든 반응은 그 자체가 무한한 수의 가능성에 지배된다. 그래서 우리는 지각될 수 있는 것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가설적 원인이 전시대에 걸친 그 집단적 전체속의 온 우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원인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무한한 차원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모든 창조 전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정신이 어떤 것의 원인을 실제로 식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망상이자 오만함이다. 존재하는 전부와 전 가능성의 무한한 맥락은 명백히 신이다.
첫댓글 인간정신이 어떤 것의 원인을 실제로 식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망상이자 오만함이다. 존재하는 전부와 전 가능성의 무한한 맥락은 명백히 신이다.
인간정신이 어떤 것의 원인을 실제로 식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망상이자 오만함이다. 존재하는 전부와 전 가능성의 무한한 맥락은 명백히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