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가진 선한 것들 2018 02 04.
지난 시간에는 <당신이 하는 말로 재창조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우리가 가진 선한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엄밀히 말해서 십자가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부활의 생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우리가 거듭난 새 피조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조건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主)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의 주(主)가 되신 것을 시인함으로서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은 거듭난 새 생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영적인 거장들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새 피조물이 된 거듭난 새 생명부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새 생명을 발견하고, 생명의 새로움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았기 때문에 원만한 영적 성장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새 생명을 가지고도 자신을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으로 생각하면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며, 죄와 싸우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되풀이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헛된 일입니다. 성경은“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고,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7,18)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멘!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는 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하는 것을 보면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과거가 없는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 다 같이 빌레몬서 1장 6절을 보겠습니다. “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아멘! 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분들이 아직도 자기 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찾아서 그것을 회개하고 자백하면서 고쳐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좌절감만 갖게 되는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써 역사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거듭난 새 생명, 그 생명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인식하므로, 거기서 내 믿음이 시작되고, 내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옛 본성을 가지고 날마다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10년 20년을 그렇게 애써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건 헛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패턴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 안에 있는 거듭난 새 생명, 새 피조물인 나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 특성이 무엇인지 그 능력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 풍성함을 누리며 사셔야 합니다. 아무쪼록 새 생명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되어서, 그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훈련하심으로 그것이 우리의 인격이 되고, 성품이 되어서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적성장이 훨씬 더 빨리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으로만 생각했던 승리하는 삶, 영광된 삶이 결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재 삶인 것을 아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나의 믿음은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 우리가 힘서야 하는 믿음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거듭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1. 우리 가운데 영생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영생은 헬라어로 Zoe 입니다. 이는 God-kind of life 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영생을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말하는데 물론 영원히 사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게 하는 생명입니다.
보십시오. 개는 개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개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 곧 영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거듭난 우리가 이 영생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에 동참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거듭난 나에게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보겠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partakers of divine nature)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아멘! 내 안에 있는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1~13절을 보겠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기서 분명“영생이 있을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가 아니고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편지를 쓴다는 겁니다. 현재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말과 행동에서 항상 그것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안에도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도 이 생명이 나타나야 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영생은 거듭난 내 영에 주어진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새 피조물인 내 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내 영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은 내 혼과 몸에도 놀라운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현재로 말했고, 베드로서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로 말했습니다. 이는 내가 거듭나는 순간에 내 육체에도 치유된 능력이 건강하게 되는 능력이 함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내 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도 내 혼에도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처럼 기능하며 살 수는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6절을 보시면“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을 보시면, 우리의 생각(마인드)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 구절을 KJV로 보면 6절에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위를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특성과 본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기능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이 생각은 예수님 안에도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 우리 가운데 있는 선한 것은 의(righteousness)입니다.
이 의(義)를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정죄감이나 죄책감 없이 열등감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단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 의롭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까? 그건“거듭난 나는 죄지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죄책감이 없고,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날 송사해도 겁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의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우린 오랫동안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의 의식이 도리어 생소하게 느껴지고 때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의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을 보아도 아직은 의인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의로움을 행위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義)는 거듭난 본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우리의 본성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린 아이가 아무리 개와 함께 놀면서 개의 흉내를 낸다고 해도 그 아이를 개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때로 미숙한 상태에서 혹시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때로 실수를 하고 아직은 완벽한 행동을 못한다고 해도 나의 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는 본성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내친김에 의의 의식을 방해하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죄의식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나의 연약한 부분이나 실수가 본성으로 주어진 의(義)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0~21절을 보시면“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말씀해 줍니다. 아멘! 혹 죄의식이 생기면 이 말씀을 외우세요! 우리 마음이 혹 책망할 일이 있어도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신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하시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내가 완벽한 행동을 해야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루 10시간씩 기도를 하고, 매주 철야 기도를 몇 번씩 해야 내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이 담대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 것을 깨달음으로 내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고, 하나님께 구한 것은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담대할 수 있습니까? 이 의(義)를 의식하시고 자꾸 훈련하셔야 합니다. 의 의식이 무의식이 될 때까지 반복하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3~14절을 보면“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죽은 행실’이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 죄책감이나 정죄 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드렸던 번제의식과 속죄의식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욥이 아들들이 죄를 범했을까봐 두려워서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두려움에서 나온 종교적인 의식들이 곧, 죽은 행실인 겁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도 깨끗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는데도, 아직도 양심이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피가 완벽한 것임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의 피로 깨끗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 의식으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의 의식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아모3장 3절을 보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려면 우리의 고백이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해서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어 놓으셨어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 사탄아 까불지 마라, 질병아 까불지 마라.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담대히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을 보면“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말씀해 줍니다.
사도바울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렇게 말씀했겠습니까? 의의 호심경(흉배)을 붙이라는 것은 “제발 쓸데없이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고, 쓸데없이 열등의식으로 고생하지 말라는 겁니다. 의의 흉배를 가슴에 붙이라는 것은 ”너는 누가 보아도 의인이다. 하나님이 만인 앞에, 정사와 권세 앞에, 천사 앞에, 사탄 앞에서 너는 의인이라고 선포하셨으니, 자신 있게 가슴에 의의 흉배를 붙이고 다녀라“는 말씀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있는 선한 것은 능력(Dunamis: the ability to cause changes)입니다. 우리에게 변화 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면 권능도 함께 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하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우리가 주목하는 것은(consider, regard)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temporal: subject to change)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 신경 쓰는 것, 관심을 갖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잠깐일 뿐이고 일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감정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나의 해석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해도 누가 예수님처럼 상처 받고 어려움을 당한 분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도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몽입니다. 우리의 관점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 눈은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도 인도해 주실 때 가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의 큰 덩치를 보고 두려워서 모두가 떨었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서 “내 생애에 저렇게 큰 표적은 처음 보았다. 내가 놓치고 싶어도 절대로 놓칠 수 없게구나!”하면서 신이 나서 물맷돌을 날렸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시련이 무엇입니까? 그 시련의 분량이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가진 선한 것은 믿음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the measure of faith)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 모두는 거듭난 순간에 일정량의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날 때 받은 그 믿음으로는 기적을 행하거나 어떤 능력을 행하거나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을 키우고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4가지 종류
(1) 적은 믿음(little faith)입니다. 이는 계시의 지식이 부족으로 생긴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했는데 왜, 믿음이 작은 자가 된 것입니까?
믿음이 적은 것은 계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크기는 계시 지식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을 보면“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믿는 사람들이 말씀의 지식이 부족해서 자꾸 세상의 지식을 따라 삽니다. 믿는 사람들도 계시 지식이 부족하면, 의사가 말한 대로, 뉴스에서 말한 대로, 사람의 지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그래서 믿음을 크게 하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 큰 믿음(great faith)입니다. 이는 말씀의 확실한 계시 지식이 있음으로 인해 큰 믿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2~28절을 보면,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다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이 때 여인은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 호칭은 이방인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하셨고 그래도 계속 부르짖으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때, 여인이 자신의 신분이 이방인임 것을 깨닫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자신이 이방 죄인인 것을 인정했을 때, 주님의 은혜가 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하신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확실한 계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받은 말씀으로 그 약속을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으며, 그 주장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 막혀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 성도들은 고난을 받음으로 거룩해 진다는 가르침을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리거나, 재정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그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믿고 있으면, 그 고통에서 치유 받고 벗어나기 위해서 그 문제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느 정도 인과응보 사상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의 문제가 다 처리 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질병이나 가난이나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라는 계시지식이 있으면 단호하게 질병을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채무의 문제도 내가 잘못해서 채무가 생겼어도 “도둑의 영이 역사해서 그렇게 되었다. 내가 채무의 영을 결박한다.”고 단호하게 명령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계시지식이 있어야 나의 믿음이 크게 됩니다. 불경기가 왔을 때 계시지식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나라가 다 이렇게 되었는데” 하면서 그냥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거기에 해당되는 계시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분명한 계시지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권세(authority)란 명령해서 복종하게 하는 권리 또는 힘입니다. 마태복음 8장 10절을 보면“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했는데, 여기서 ‘이만한 믿음’이 영어성경으로 보면 great faith로 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은 권세에 관한 계시지식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말의 권세를 확실하게 아는 계시지식이 있었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역사하는 말에 대한 권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의식이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내 위에 있는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것만큼 나에게도 권위가 부여되는 법입니다. 권세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명령했을 때, 반드시 복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내가 볼 때 질병이 아무리 심해 보여도, 우리 사업이 엉망이 되었더라도, 그러한 것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능력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내가 명령하면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보시면“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묶으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그것이 합당하지 않은 불법이라고 선언하면), 하늘에서는 이미 묶여 있는 상태대로 묶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②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그것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하면), 하늘에서는 이미 풀려있는 상태대로 풀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묶여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친히 사망과 질병과 가난, 실패, 좌절, 분쟁, 슬픔 등을 지고 가셨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불공평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질병이나 가난 등이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확실하게 불법이라고 선포하면 하늘에서 묶여 있는 그대로 땅에서도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대로 하늘에서 풀려 있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생명과 건강과 승리와 성공과 평화와 행복 등 “복음에 예비 되어 있는 모든 축복과 권리를 합법적인 것이라고 선포하면,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세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릅니다.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독은 청산가리가 아니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감기나 전염병이나 감염된 독에 감염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감염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세를 사용하는 것도 연습해야 합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담대히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약한 믿음(weak faith)입니다. 이는 말씀에 관한 지식이 많아도 연습이 없을 때에 약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많이 먹고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도 발달하지 않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내가 연습하지 않으면 나의 믿음이 약해지고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계시지식이 많아도 귀신을 쫒아내지 않고, 뱀을 집어내지 않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지 않는다면 내 믿음이 약해지고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치유 사역자들도 처음에는 모두가 떨리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많은 실패 속에서 그 믿음이 강하여 졌다고 말합니다.
(4) 강한 믿음(strong faith)입니다. 이는 많은 연습에 의해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9~20절을 보면“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strong)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이런 오해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역시 믿음의 선진이야.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지고 있었을까?!”
그런데“약해지지 아니하고 견고하여져서“ 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많은 연단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도 의심도 있었으나 거절했고, 그의 의지로 계속 믿는 훈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해졌고 결국 아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저절로 견고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이 오면 거절하고, 아닌 부분은 명령해서 떠나가라고 하고, 내가 주장할 것은 자꾸 주장해서 강한 믿음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잠재의식으로 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꺼내서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우리에게 은혜(Grace; Charis)가 있습니다. 이 은혜는 어떤 사람에게 외부적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그 사람의 영에 임한 신성한 능력이나 또는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삶에 아름다움과 따뜻함, 호의, 매력, 품위를 창출해 내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나 장소나 상황을 끌어당기게 하여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보시지 않았습니까? 관공서나 은행에서 어떤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그곳의 직원이 “이 서류로는 안 되는데, 왠지 해 드려야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이런 호의를 입는 것이 은혜입니다.
쉽게 말해 보면, 산에 올라가는데 진달래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멈추어서 그 진달래를 한참 바라봅니다. 진달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매력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에 어떤 특정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내가 개발한다면 나도 모르게 어떤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나, 호의를 느끼게 하는 힘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는 반드시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며,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나 친절함이나 따뜻함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7절을 보면“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grace)를 주셨나니”아멘!! 이 구절이 리빙 바이블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각 특별한 능력들이 주어졌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을 보면“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반드시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며, 알아도 개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자기 달란트나 은사를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우리에게 있는 선 한 것 중에 <사랑>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아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냉랭한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는 사랑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의식하고 개발하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7. 우리에게 탁월한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면“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여기서 절제하는 마음으로 번역된 것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sound mind>입니다. 즉 건전한 생각의 영으로서 이는 excellent spirit (탁월한 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생각의 영은 탁월한 영(excellent spirit)입니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영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탁월한 영을 가진 것입니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안 믿는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탁월한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회사에서도 앞서 가는 것은 탁월한 영을 가졌기 때문임을 의식을 하고 개발하시면 도저히 못할 것 같은 불가능한 일이라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으며, 어떤 분야에서도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영의 특성(character,캐릭터)은 성령의 열매에도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오직 성령의 열매(거듭난 영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내 거듭난 영의 캐릭터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유, 절제이며, 이것이 거듭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한 선한 것들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시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썩지 아니할 씨로 심겨져야 하는 겁니다.
씨의 비유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받는 자라고 했으며, '받는다.'를 영어로 'receive'이며, 이는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요 receive는‘to take’의 의미가 아니라, arrest입니다. 이는 경찰이 범인을 잡을 때 말하는 체포한다(arrest)는 의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의 것으로 취한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뜻입니다. 체포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 말씀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이 모든 상황이 나에게 선을 이룬다고 고백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대로 모든 좋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고난, 질병, 실패 등은 사실상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1장 3절에“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아멘!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이라고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모든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육적인 축복은 자연스럽게 모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누가 누리는 것입니까? 말씀을 체포(arrest)하듯이 절대로 놓치지 않고 나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 모든 축복을 (1) Receive 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Lambano입니다. 이 뜻은 to arrest입니다. 내게 주어진 축복과 권리를 체포하듯이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to take possession until it is mine입니다. 이 축복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내 자리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2) 감사기도(Thanksgiving)입니다. 이는 내가 구한 것을 받을 줄로 믿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 Practice (연습. 훈련)입니다. 믿음을 훈련을 통해 견고해 지고 강해집니다. 믿음은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활성화 되어질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은 훈련을 통해서만 활성화 되고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 실재가 될 때,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