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회] 환영객 없는 귀국, 미국의 홀대에 분노
장준하 평전/[7장] OSS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 2008/11/26 08:00 김삼웅 비행기는 저녁 무렵에 여의도 공항에 도착했다.
환영객 하나 없는 공항은 11월 하순의 찬바람이 불어 황량하기까지 했다. 일행은 밀폐된 미군 장갑차에 분승하여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서대문의 경교장에 이르렀다. 장준하는 귀로에 흰 옷을 입은 농부가 소를 몰고 가다가 장갑차 행렬에 놀라 길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 미군 병사에게 제지되었다.
일행은 경교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경교장은 광산업을 하던 최창학이란 사람이 기증한 것이다. 국내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위원회’(환영위)가 경교장과, 충무로에 있는 한미 호텔을 임정요인들의 숙소로 마련해 놓았다. ‘환영위’ 조차도 이날 임정요인들의 환국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 군정은 무엇 때문인지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미 군정청 공보과는 요인들이 경교장에 도착한지 1시간이 지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간략한 하지 중장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 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개인자격’을 유난히 강조한 하지의 성명이었다. 미국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승국 미국이 임정대표인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들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나 통일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되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김주석의 환국 소식을 전해 들은 각계 지도자와 기자들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이승만 박사였다. 저녁 8시에 환국기자회견을 갖기로 하여, 장준하는 엄항섭 선전부장을 도와 준비를 서둘렀다. 환국 첫날 저녁을 눈코 뜰 사이 없이 분주하게 보냈다. 임시정부의 환국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환영위’는 서둘러 이것저것 준비하느라고 했지만, 저녁 식사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임정 요인들은 늦은 시각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장준하는 환국 다음날 새벽 4시 경에야 잠시 눈을 부쳤다가 6시 반에 일어났다. 이날은 날씨가 청명했다. 해방된 고국에서 맞은 첫날이었다. 여전히 미군복 차림이었다. OSS대원으로 지급받았던 국방색 미육군 군복셔츠와 자켙에 타이를 매고 가죽각반이 달린 군화를 신었다. 영낙없는 미군정복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서 그냥 그 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날이 밝자 각계 인사들이 찾아왔다. 감창숙ㆍ권동진ㆍ정인보ㆍ김병로ㆍ안재홍ㆍ송진우 등 그동안 국내에 있었던 지도자들이 주석의 면담을 요청하며 경교장을 찾았다. 엄항섭 선전부장은 공적으로 내방하는 원로급 국내인사는 주석선생이 직접 면담하도록 하고, 그 외에 중요 인사들은 엄부장이 만나고, 기타 문의사항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장준하가 담당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연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주석을 만나고자, 얼굴이라도 한번 뵙겠다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가족이나 친지의 소식을 듣고자 하여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기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 장준하가 맡아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다.
내방객 중에는 친일파들도 끼어 있었다.
구명을 위한 발걸음이었겠지만 철면피들이다.
대표적인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500만 원의 거금을 들고 경교장을 찾았다가 쫓겨나는 촌극도 벌어졌다.
김구 주석의 환국소식을 안 국민들은 육성방송을 직접 듣기를 원했다. 신문기자들도 여러차례 이것을 요청했다. 미군정은 환국 이틀이 지난 뒤에야 마지못해 이를 ‘허가’ 하면서 2분 내외로 할 것을 전제로 삼았다.
환영객 하나 없는 공항은 11월 하순의 찬바람이 불어 황량하기까지 했다. 일행은 밀폐된 미군 장갑차에 분승하여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서대문의 경교장에 이르렀다. 장준하는 귀로에 흰 옷을 입은 농부가 소를 몰고 가다가 장갑차 행렬에 놀라 길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 미군 병사에게 제지되었다.
일행은 경교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경교장은 광산업을 하던 최창학이란 사람이 기증한 것이다. 국내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위원회’(환영위)가 경교장과, 충무로에 있는 한미 호텔을 임정요인들의 숙소로 마련해 놓았다. ‘환영위’ 조차도 이날 임정요인들의 환국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 군정은 무엇 때문인지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미 군정청 공보과는 요인들이 경교장에 도착한지 1시간이 지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간략한 하지 중장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 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개인자격’을 유난히 강조한 하지의 성명이었다. 미국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승국 미국이 임정대표인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들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나 통일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되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김주석의 환국 소식을 전해 들은 각계 지도자와 기자들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이승만 박사였다. 저녁 8시에 환국기자회견을 갖기로 하여, 장준하는 엄항섭 선전부장을 도와 준비를 서둘렀다. 환국 첫날 저녁을 눈코 뜰 사이 없이 분주하게 보냈다. 임시정부의 환국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환영위’는 서둘러 이것저것 준비하느라고 했지만, 저녁 식사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임정 요인들은 늦은 시각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장준하는 환국 다음날 새벽 4시 경에야 잠시 눈을 부쳤다가 6시 반에 일어났다. 이날은 날씨가 청명했다. 해방된 고국에서 맞은 첫날이었다. 여전히 미군복 차림이었다. OSS대원으로 지급받았던 국방색 미육군 군복셔츠와 자켙에 타이를 매고 가죽각반이 달린 군화를 신었다. 영낙없는 미군정복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서 그냥 그 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날이 밝자 각계 인사들이 찾아왔다. 감창숙ㆍ권동진ㆍ정인보ㆍ김병로ㆍ안재홍ㆍ송진우 등 그동안 국내에 있었던 지도자들이 주석의 면담을 요청하며 경교장을 찾았다. 엄항섭 선전부장은 공적으로 내방하는 원로급 국내인사는 주석선생이 직접 면담하도록 하고, 그 외에 중요 인사들은 엄부장이 만나고, 기타 문의사항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장준하가 담당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연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주석을 만나고자, 얼굴이라도 한번 뵙겠다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가족이나 친지의 소식을 듣고자 하여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기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 장준하가 맡아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다.
내방객 중에는 친일파들도 끼어 있었다.
구명을 위한 발걸음이었겠지만 철면피들이다.
대표적인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500만 원의 거금을 들고 경교장을 찾았다가 쫓겨나는 촌극도 벌어졌다.
김구 주석의 환국소식을 안 국민들은 육성방송을 직접 듣기를 원했다. 신문기자들도 여러차례 이것을 요청했다. 미군정은 환국 이틀이 지난 뒤에야 마지못해 이를 ‘허가’ 하면서 2분 내외로 할 것을 전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