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창고에는 오래된 추억 하나가 저장되어 있다.
초등학교 사오학년 시절 오후반이었을 때 일찍 도착한 운동장은 조용했다.
학교 교정은 따사로운 햇볕 속에 적막하게 잠들어 있는데,
그때가 음악시간이었는지 풍금 반주에 맞추어 어느 교실로부터 아이들 노랫소리가 내 귀에 날아들었다.
브람스의 자장가였다. "잘 자라 내 아가 내 귀여운 아가~"
순간 내 마음에 아늑하게 젖어드는 그것은 그 노래가 일으키는 감성적 행복감이었다.
그것은 빵이나 초콜릿이 내 미각에 주는 즐거움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서,
그때 어렸던 나는 빵이나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이나 즐거운 놀이가 주는 것과는 다른 기쁨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연히 느끼게 되었다. 감정적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신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힘이 된다.
밥만 먹고도 살 수 있고, 돈만 벌면서 살아갈 수도 있으며,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곤충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것만이 삶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이 건강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삶을 활성화시키는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 요소 중 하나가 아름다움이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감정을 일으키는 것, 자신의 삶을 순화시켜주는 것,
자신의 공허한 정신을 채워주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기분 좋은 것, 쾌감을 주는 것, 붕 뜨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것이어야 한다.
그게 무엇일까?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있으며, 종교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에 따라 그가 경도되는 아름다움의 종류는 다르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찾을 때 그것이 내 기분을 만족시켜주는가,
내게 감각적 만족을 주는가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분이나 감각보다 월등하게 중요한 것이 인간의 영과 마음이다.
판단의 기준은 그것이 내 마음을 진실하게, 내 생활을 순화시켜 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인간을 방해한다.
이 시대는 진실보다는 감각에 민감하고, 진리보다는 정보에 열중한다.
이 시대는 가치보다는 이익에 치중하고, 원칙보다는 변칙에 익숙하다.
이 시대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홀대하고 육체적 쾌락을 우대한다.
그런 생활방식은 인간의 마당에 벚나무 향나무 단풍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거기에 플라스틱 조형물을 세워버리는 격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마당에서 봄날의 벚꽃도, 여름의 버찌도, 바람결에 실려오는 향도,
가을날의 빨간 단풍도, 겨울날의 눈꽃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극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우주에는 물질보다, 인간보다, 자연보다, 이 세상의 모든 우열한 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은혜(빛)다.
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은혜(빛)가 집약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11:7)"
빛은 예수님이다. 끝도 없이 그를 바라보라. 그때 당신은 궁극적 아름다움을 머금게 된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이 빛이 스며있는 독서도 하고, 이 빛이 스며있는 음악도 듣고,
이 빛이 스며있는 글도 써보고, 이 빛이 스며있는 주변 경관도 음미해보라.
언젠가 당신의 귓가로 브람스의 자장가가 아니라 천상의 음악이 흘러들 수도 있으리라.
2023. 1. 25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11:7)" 깊이 공감합니다.
빛은 아름답고, 신비롭고, 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