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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된 기도의 때와 시간을 지켜야 한다. [2,1]
시편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기도할 때 소리 내어 기도한 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길 것이다. [2,3]
노래로 하라고 지시되어 있는 것만 노래하고, 노래로 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노래하지 말 것이다. [2,4]
매일 공동으로 거행되는 전례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친교로서 영혼들을 더 밀접하게 서로 연결시켜 주는 끈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전례가 공동체를 이루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굳게 확신했다: “사람은 유형한 표시, 즉 구원의 성사들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수도 공동체 안으로 결속될 수 있다”(『파우스투스 논박』 19,11)) (78쪽)
그는 한 설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무리와 관현악단의 조화로운 음색을 생생히 비교한다: "여러분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모두가 하나의 황홀한 소리를 내는 찬미의 노래에서 트럼펫, 하프, 치터, 팀파니, 현악기, 플루트와 심벌즈인 것입니다”(『시편주해』 150,8)(78쪽)
☕ 따로 또 하나로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기도다.
"열심히 기도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변덕이나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한결같은 신심을 갖기를 촉구한다. 만일 우리가 단지 기분에 따라 기도한다면 아마 하루는 아주 열렬히 기도하고 다음 날에는 그렇게 기도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기도를 완전히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79쪽)
☕ 기도는 무엇보다도 항구함이 중요하다.
공동체의 기도생활은 이에 관한 어떤 정해진 체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규칙서는 정해진 기도 시간에 대해 말한다. 수도자들에게 하루 일과 중 정해진 기도 시간이 없이 육체노동과 기도를 함께 했던 초기 이집트의 수도원들과는 달리, 아구구스티누스는 처음부터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기도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일 시간과 공동 식사 시간이 적절히 규정되어 있었듯이 또한 일정한 기도 시간도 있어야 했다. 하느님께 바치는 공동 전례를 포함하여 하루의 정해진 일과표가 수도생활에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 준다. “수도자들이 활동에만 너무 열심히 몰두해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열의가 없어진다면”(『신국론』 19,19) 잘못된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말한다. (79쪽)
서방 수도생활에서 기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규정은 『수도원 규정서』에 나오는데, 초기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와 함께 전해졌음이 분명한 이 짧은 규정서는 북아프리카에서 기원된 것 같다. (80쪽)
우리가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즉, ‘아침기도’에는 세 개의 시편을 하고 … ‘제3시 기도’에는 먼저 응송과 함께 시편 하나를 하고 그다음 후렴과 함께 두 개의 시편, 독서 그리고 끝맺는 기도로 할 것이다. ‘제6시 기도’와 ‘제9시 기도’도 이와 같이 할 것이다. ‘저녁기도’는 응송과 함께 시편 하나, 후렴과 함께 다른 네 개의 시 편, 다시 응송과 함께 다른 시편 하나, 독서 그리고 끝맺는 기도로 할 것이다. '저녁기도’ 후 적당한 시간에 모든 이가 앉은 자세로 독서를 하고, 그다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통상의 시편들로 기도할 것이다. ‘야간기도’에는, 11월, 12월, 1월, 2월에는 열두 개의 후렴과 여섯 개의 시편과 세 개의 독서를 하고, … 5월, 6월, 7월, 8월에는 여덟 개의 후렴과 네 개의 시편과 두 개의 독서를 할 것이다. (80쪽)
☕ 수도자는 온 삶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수도원의 이러한 시간경 전례 가운데 이른 아침에 바치는 기도는 요즈음 우리가 바치는 ‘아침기도’와 같은 것이었다. 낮 시간에 바치는 3개의 시간경, 즉 ‘제3시 기도’, ‘제6시 기도’, ‘제9시 기도’가 있고, 저녁에 바치는 '저녁기도’가 있으며, 조금 후에 성경 독서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통상의 시편들을 바쳤다(이 마지막 것은 우리가 ‘끝기도’라 부르는 시간경이다). (81쪽)
☕ 오늘날 성무일도의 전형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전례 기도는 교회,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 전체”의 기도라는 점에서 모든 개인기도와 구별된다. 전례 기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체들 안에서 직접 기도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의 몸의 유일한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또 우리는 그분에게 기도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이신 그분에게 기도드립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목소리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목소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81-2쪽)
☕ 전례기도는 머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온 공동체가 하느님께 함께 바치는 기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결함투성이인 우리의 기도 안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합해진 우리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82쪽)
☕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노래하는 것이 전례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이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고백록』 10,33, 49 -50 참조). 그는 "기도 내용이 전달하는 진리보다 노래하는 것 자체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윗의 시편들을 아름다운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것을 사람들이 성당에서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배제하려는” 반발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시편과 찬미가를 들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깊이 감동했는지, 또 주교가 된 지금도 시편들을 암송할 때보다 노래로 부를 때 얼마나 큰 신심을 불러일으키는지를 회상한다. 그는 노래로 기도하는 것이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께 향한 사랑으로 마음을 뜨겁게 하는 데”(『서간』 55,18,34)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노래하는 데도 규정을 올바로 지켜야겠기에 그는 규칙서에서 이런 원칙을 제시한다: "노래로 하라고 지시되어 있는 것만 노래할 것이다.”(83쪽)
☕ 노레도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다.
개인의 의견과 일시적 기분이 경신 예식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에서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노래로 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노래하지 말 것이다.” (84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생활이 ‘거룩한 여가’ 즉 은둔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설립한 모든 수도원에서는 공동 신심 행위와 개인 신심 행위, 영적 독서와 ‘관상’을 위해 정해진 시간들이 일상생활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였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는 기도만을 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수도원의 기도생활에 큰 공헌을 하였다, (84쪽)
☕ 수도생활은 공동기도와 개인기도로 이루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소에서는, 그 말이 뜻하는 바대로, 세워진 목적 이외의 다른 것을 아무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에 나오는 이 말은 서방 수도원들 안에 기도소가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증언이며, 수도생활 발전사에 있어서 결정적 단계를 나타낸다. 이 개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분명히 얼마간의 세월이 걸렸다. 성 베네딕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규정을 자신의 규칙서에 도입할 만큼 요긴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로부터 120년 후였다. (85쪽)
“시편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기도할 때 소리 내어 기도한 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길 것이다.” 마음을 모으는 것은 훌륭한 기도를 바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86쪽)
아우구스티누스는, “목소리는 크게 나도 마음은 여전히 벙어리인”(『설교』198,1) 그러한 기도와 노래를 하지않도록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86쪽)
☕ 마음이 깃들이지 않은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가 함께 소리 높여 노래하는 내용을 깨끗한 마음으로 의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시편 주해』 18,2,1). 왜냐하면 하느님은 마음, 즉 인간이 자기의 사고와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내는 내적 태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온 존재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을 찬미하는 것은 혀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분의 확신과 생명과 행동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시편 주해』 148,2). (86쪽)
☕ 기도는 행동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산만한 공상에 빠지면,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크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느님 앞에서 그들은 벙어리입니다”(『시편 주해』 86,1). 실제로 엄밀히 따져 보면, 고의적으로 분심 중에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을 모욕하는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비유로써 깨우쳐 준다: “만일 여러분이 주교인 나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여러분의 하인을 돌아보고 나를 거기에 서 있게 내버려 둔다면 … 나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매일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렇습니다”(『시편 주해』 140,18).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건전한 권고를 한다: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모으십시오. 만일 당신이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문을 닫아야 하는데, 즉 감각들과 상상력을 통제해야 합니다”(『산상수훈에 대한 설교』 2,3,11). (86-7쪽)
☕ 고의적으로 분심 속에 바치는 가도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분심에 빠지지 않으려면 끊임 없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7쪽)
☕ 분심없는 기도를 바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인에게는 이 점이 특히 어렵다. 기계문명의 시대에 소음과 분망과 삶의 격동은 우리 가정의 문턱에서도 그칠 줄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다. 주교직 업무에서 오는 걱정거리들이 자주 그의 기도에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세속적인 잡다한 업무에서 오는 어두운 점들과 혼돈에 의해 방해받고 마비되기까지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의 업
무는 “숨돌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힘겨웠다”(『서간』 48,1). “주님 대전에서 마음의 소리를 당신 귀에다 속삭일 때도 대체 어디서 헛된 생각들이 몰아닥치는지, 이런 큰 일(기도)이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고백록』 10,35,57). (87-8쪽)
우리가 기도를 짧게 하거나 공동기도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비록 불완전한 기도라 하더라도, 기도는 우리가 완덕에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여, 당신은 선하시고 자비하시니”[시편 85(86),5]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의 말을 이렇게 주석한다: “제 소견으로는, 여기서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불리는데, 왜냐하
면 그분께서 우리의 나약함을 참아 주시고, 게다가 우리를 완성에로 이끌어 주십사 하고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기를 기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주해』 85,7),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찬미는 우리가 그 나라(천상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분의 천사들처럼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시편주해』 146,2; 참조: 마태 22,3). (88쪽)
☕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기도에서 매일 체험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실패들은, 이를 통해 우리가 정화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련들 중의 하나이다. 이 실패들은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해 주기 때문에 우리를 정화시켜 주는 것이다. (87-8쪽)
☕ 신앙인에게 실패는 정화의 과정이다. 실패를 통하여 완덕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실패에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 즉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신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거만하게 자랑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시편 주해』 85,2). (89쪽)
☕ 부족함이 없는 부자에게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부유함보다 가난함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도움이 된다.
“소리 내어 기도한 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길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태도가 기도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기도의 혼은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마음의 끊임없는 열망이기 때문이다: “열망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혀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찬미의 노래를 계속 부른다"(『시편 주해』 86,1). (89쪽)
☕ 하느님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적 기도의 내면적 본질을 다음과 같이 꿰뚫어 봄으로써 ”끊임 없이 기도하라“(루카 18,1; 1테살 5,17)는 성경 말씀을 새롭고 의미 깊게 해석한다.
“우리는 전혀 중단하지 않고 계속 무릎을 꿇거나 땅바닥에 엎드려 있거나 양손을 쳐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만일 이러한 행동만이 기도라고 주장한다면, 제 소견으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기도가 있으니, 끊이지 않고 하는 내적 기도입니다. 나는 그것이 열망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계속적인 열망은 여러분이 하느님을 계속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사랑이 중단되면, 여러분은 침묵하게될 것입니다. … 사랑이 식어지는 그만큼 마음은 침묵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타는 사랑은 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큰 외침입니다”(『시편 주해』 37,14). (89-90쪽)
☕ 하느님을 향한 열망 또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제와 마음을 다해 화해하는 것이 훌륭한 기도를 위한 또 하나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구절에서 “너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 때문”에 받은 모욕을 신속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 줄 것을 수도자들에게 권고한다. 왜냐면 진심으로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신심이나 인내가 부족한 것보다 더 기도에 해롭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의견의 일치를 보셨습니다.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진심으로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 말을 덧붙이지 않거나 진심으로 남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면, 앞의 청원은 헛된 것이 됩니다”(『설교』 58,6,7). “왜냐하면 남과 불목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목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찬미할지는 모르나, 마음으로는 모독하는 것입니다" (『시편 주해』 132,13). (90-1쪽)
☕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거짓말이며’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첫댓글 기도는 행동으로 완성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