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백제를 찾아서/靑石 전성훈
온 동네 방방 뛰며 봄이 깊어진다고 노래 부르는 계절에 만나는 인문학 기행, 길 떠남은 수줍은 처녀와 선머슴의 풋풋한 마음처럼 언제나 설렌다. 15년 동안 세 번이나 찾아가는 곳인데도 첫 만남처럼 기대가 부푼다. 계절은 그때와 다름없는 봄이지만, 흘러간 세월은 세상의 모습과 사람의 생각을 저 하늘 끝까지 멀리 날려버린 듯하다. 오전 6시 반에 도봉문화원을 떠난 관광버스는 서울 시내를 거쳐서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선다. 눈을 감고 살짝 쪽잠을 청하는데 뒷자리에서 이야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여느 때처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여성 목소리가 아니라, 걸쭉한 목소리의 남성 두 분이 온갖 세상 걱정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고속도로에는 익어 가는 봄을 축복하는 듯이 소리 없이 비가 내린다. 아침 해가 나지 않은 탓에 차창 바깥이 어둡다. 망향휴게소에 들려서 어묵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비 내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 만경평야는 풍요의 꿈을 잉태하면서 하늘의 선물을 흠뻑 들이마신다. 밭 사이로 틈틈이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둥글고 하얀 마시멜로처럼 생긴 곤포 사일리지가 수없이 많다. 곤포(梱包) 사일리지(Silage)는 볏짚, 건초 등 농작물을 기계로 압축하여 발효시켜 만든 숙성 사료로 겨울철 가축 먹이로 사용한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제멋대로 저 멀리 사라진다. 산자락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의 모습은 계절이 완연히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익산이라는 지명보다는 이리가 귀에 익은 세대에게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1995년 5월 도농(都農)통합에 따라 이리시와 익산군이 합쳐져 익산시가 되었다. 익산에는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있고, 마한 54개국 중 건마국, 감해국, 여래비리국 등의 소국(小國) 있었다고 한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하고 이곳을 금마저라고 했으며,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의 주인공이자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이곳에 도성을 두어 사비성, 웅진성과 함께 3경제(三京制)를 경영하였다고 한다. 익산에 도착하여 첫 번째 찾은 곳은 왕궁리(王宮里) 유적지이다. 봄비 내리는 왕궁터, 망국의 슬픔을 간직했던 왕궁터는 누구의 솜씨인지는 몰라도 사찰로 변한 채, 원한에 사무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개한 벚꽃이 멋지게 그 자태를 뽐내는 벚나무들 사이로 5층 석탑이 무심한 듯이 비를 맞고 있다. 1989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이곳은 백제 무왕(600~641년) 때 조성된 궁성 터로 추정한다. 한동안 왕궁으로 사용되다가 백제말~통일 신라 시기, 그 터에 탑, 금당(金堂, 부처를 모신 곳), 강당으로 구성된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2015년 7월에 송산리고분군, 부소산성,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 ‘공주. 부여. 익산’ 지역 7개 문화유산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왕궁터를 벗어나 미륵사지로 향한다. 왕실 사찰인 미륵사지,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단한 백성들에게 ‘미륵 정토’의 세계를 펼쳐주려고 창건하였던 미륵사, 고승의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 전설 따라 기록이 남은 황폐해버린 절터에는 그 잔재가 어딘가에 남아있을는지도 모른다. 미륵사지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배치된 우리나라 유일한 ‘삼탑삼금당’ 사찰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50년이 넘는 1971년 2월 어느 날 친구의 고향 ‘이리’에 들렸다가 처음 보았던 미륵사지, 한쪽에는 시멘트를 뒤집어쓴 추한 몰골로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외롭게 서 있는 미륵사 석탑, 안개 낀 아침에 탑을 만지면서도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탈바꿈한 미륵사지는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모습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느낌이다. 빗속에 보이는 그다지 높지 않은 미륵산(430m)은 예나 지금이나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소를 전해주는 듯하다.
이른 아침부터 인문학 기행이 끝날 때까지 추적추적 비가 내려 조금 차갑게 느껴진 하루다. 전날 날씨를 생각하며 옷을 가볍게 입었더니 몸이 느끼는 기온은 어제와는 전혀 딴판이다. 여행길에는 비가 오는 날도 맑은 날도 있다. 비가 내리면 돌아다니기 불편하지만 잊지 못할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마음을 열고 봄이 무르익어 가는 봄날의 모습에서 활기찬 새날을 기약해 본다. 2009년 4월 처음 참여한 인문학 기행,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익산지역이다. 그때는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쪼이던 그림 같은 봄날이라면, 오늘은 울긋불긋한 우산이 한들한들 떠도는 한 폭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정감을 주는 날이다. 늘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물과 자연과 사람을 대하며 인문학 기행을 떠나고 싶다. (202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