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딱 그만큼, 딱 차가 다닐 정도만 포장되어 있었다. 아직 개발되기 이전이었다.
오른쪽은 잡초 우거진 비탈이 저 아래까지 주욱 이어져 있었다. 경사가 심해 깎아내거나
축대로 마감하기 전에는 집을 지을 계제가 아니었다. 집이 들어서지 않은 덕분에
내가 살던 그 집에서 내려다보면 아래 동네들, 멀리 안양 종합운동장과 삼호 아파트,
비산동 주공 아파트 단지, 비산 초등학교, 그 주변들을 에워싼 빌라들, 연립들,
주택들이 보였다. 후에 그 담 건너를, 아래를 얼마나 내려다 보았을까. 옆집, 같은
모퉁이 집인 동일이네 집과 축대 위 연립 주택 사이에 수돗간이 있었고 그 수돗간에서
커튼을 빨면서 배추를, 호박잎을 씻으면서 허리를 펴고 담 건너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 아래 동네들 풍경은 멀고도 멀었다.
산이 시작되기 이전 나지막한 자락인 왼쪽은 공터였고 그 공터는 풀들이 무성한 높은 비탈로 끝났다.
지금 그 공터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악스러운 개발업자들은 비탈을 깎아내려 집
들을 지었을 것이다. 그 공터 옆에 오래 된 아주 오래된 집이 몇 채 있었는데 노란,
아니 황색 대문 집은 왼쪽 첫 번째 집이었다. 아주 낮은 단층집으로 저 집을 드나들려면
허리를 구부려야겠다 싶었다. 담은 없었다. 집이 곧 담인, 개량 한옥 형태였다. 회색
시멘트로 마감한 벽 위에는 역시 회색 슬라브가 얹혀있었다.
황색 페인트를 두텁게 칠한 나무 대문이었다. 대문도 역시 슬라브 기와를 얹고 있어
휘경동 친정 대문처럼 대문 전체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대문 틀 속에서 작은 문이
열리는 형국이었다. 페인트는 한눈에 보아도 서투른 아마추어가 칠했다는 것을 알만큼
마감이 거칠어 여기저기서 페인트가 흘러내리다가 방울로 굳어져 있었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마당이 보였다. ㅁ자 한옥은 가운데가 비어 있기 마련이다.
이 집 역시 그랬다. 그 빈 중심, 마당에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즈넉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집안에서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유독 햇살이 환했던 것은
마당 역시 노란 색이었기 때문이다. 맨마당이었다. 보슬보슬한 노란 흙은 밟으면
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마당은 아버지를 연상시켰다. 어린 시절, 광주 풍향동에 살 때, 서울 올라와 사당동에
그리고 휘경동에 살 때 아버지는 아침마다 마당을 쓰레질 하셨다. 그 습관은 양지에서도
변함없었으리라. 양지를 끝으로 단독주택은 끝이었으니까. 휘경동 집은 진회색 기와얹은
한옥으로 바로 그 집 같았다. 차이라면 친정 집이 더 큰 정식 한옥이었다는 것이다. 진회색
기와를 얹은 대문은 맑은 노란 색이었고 묵중한 나무문이었다. 대문을 열면 삐이꺽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좋았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면 슬리퍼 끌고 나가 빗장을 열고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내 팔뚝만큼이나 굵은 나무 빗장을 빼고 쇠고리를 잡아 당겨 군데 군데
옹이 박힌 나무문을 열었다. 그 집이 그립다. 양철 홈통으로 빗물이 흘러내리던 소리,
맑은 노란 색이던 기둥들. 대청에 누워 위를 보면 흰칠을 한 천정 사이로 굵직굵직한 재목이
가로 지르고 있던 그 집. 아침마다 나는 아버지 쓰레질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두터운 이불 속에서 세상이 밝아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말끔한 그 마당 한 가운데 수도가 있었다. 수도 주위는 시멘트로 말끔하게 칸을 지어 물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마감해 놓았다. 누군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물 받으러 왔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저 안쪽 깊숙한 그늘, 부엌인 것 같은 데, 저 안쪽에서
누군가 나오지 않을까. 금방이라도 누군가 저 한지 문 같은 밀문을 열고 콜록거리면서
“거 누구요?”하고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잠시 기다려보았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계세요?”
참다못해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수도꼭지 있는 곳으로 가
호스를 꽂았다. 그 호스 길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이십여미터는 훨씬 넘었을 것이다.
호스를 풀면서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넣은 다음 다시 물을 틀러 갔다. 서툴렀던 것이다.
두번째부터는 한결 나았다. 호스를 풀면서 내려가 수도 꼭지에 꽂은 다음 물을 틀었다.
길을 건너 길게 늘어진 그 호스는 이내 사람들 눈에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 호스를 풀고
감고 하는 내 모습도 역시 모든 이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다.
호스를 연결하고 뛰어온다. 비탈길을, 나무 계단을 뛰어 올라와 헉헉대면서 들어서면
이내 세탁기에서, 욕조에서 물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소리가 나는 동안은 안심이다.
서둘러 설거지를 한다. 갑자기 소리가 끊긴다. 무슨 일이지? 그 집까지 뛰어간다.
혹 노란 대문집에서 물을 쓰느라고 호스를 뺀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낮에만 물을 받았고 그 집은 낮에는 아무도 물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물받아가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서 그랬을 수도 있다. 주인 여자에 의하면 그들 역시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물값조차 안 받았다고 했다.
물 없어서 고생하는 것도 안쓰러운데 그까짓거 수돗물 값이 얼마나 한다고 그걸 받아요?
그 집은 부엌마다 따로 수도가 설치되어 있어 굳이 마당에 있는 수도를 쓸 필요가 없었다.
셋방 포함해. 수도관이 딱 그집까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그 집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그 집 이후로부터는 새로 생긴 동네라는 표식이었다.
수도에서 호스가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호스는 비닐로 만든다. 몇번 수도에 끼웠다 뺐다
하면 당연히 늘어난다.그래서 일쑤 빠졌던 것이다. 서둘러 뛰어내려가보면 호스가 빠져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물을 잠그고 호스를 끼우고 다시 물을 튼 다음 비탈길을,
계단을 뛰어 올라오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 때쯤이면 세 집 사는 중에 물 받기
시작하는 사람은 으레 나였다. 주인 여자도 아랫집 새댁도 내가 먼저 호스를 연결해
물을 받고 나면 호스를 가져다가 물을 썼다. 내가 두어번 쓰면 그들은 한번이나 썼을까.
가장 자주 써야 하는 사람이 나였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 호스가 빠져 뛰어다닌 다음에 주인 여자는 작은 잠금 장치를 달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그 물건은 위의 나사를 돌려 꼭 죄는 것이었는데 그걸 사용하면 빠지지 않았다.
비닐테이프로 꽁꽁 동여매는 것도 한 두번이지 싶었던 모양이다. 비닐테이프로 동여매는
일은 번거로웠다. 그러나 그 잠금장치를 사용한 것은 사실은 노란 대문집 여자가 한 말 때문이었다.
물을 받다가 호스가 빠져 내가 뛰어다니는 꼬락서니를 본 그 노란 대문집 여자가 주인여자에게
한마디 했던 것인데.
애기 엄마가 호스가 빠져 고생하더라는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잠금장치를 사다
달았던 것이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서가 아니라 남의 입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다 달았던 것이 아닐까. 후에도 남들이 하도 수근거리니, 동네 할머니며 아줌마며
다들 한마디씩 하니 그야말로 할 수 없이 물통을 빌렸던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 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집에서 물을 받는 동안 누군가를 만나거나 마주친
적은 한번도 없다. 물을 받는 동안 비탈길을 오르거나 내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동네 사람들은 그 모든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숙맥인 나는 그런 일 하나도 처리 못해 뛰어다니기만 할 뿐 요령을 모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운데가 빠진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길을
건너야 한다는 데 있었다. 호스는 가운데를 잇대은 것이었고 그래서 말썽을 부렸다.
차가 한대 지나가면 그 압력을 못이겨 잇대은 부분이 빠졌던 것이다.
첫댓글 에구, 기억력도 참...
하이고. 그렇게 고생해보삼. 잊혀지나..지금까진 그래도 괜찮아요. 다음엔 더 고생한 이야기가 나와요.
물지개 지던 사람, 물차 앞에 줄 서서 물 받던 사람, 물에 관한 추억이 새삼.... 마당깊은 집이라는 연속극도 생각나고.... 희야님의 추억 곱씹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독자입니다. ^^*
물차. ㅎㅎ 저도 기억납니다. 바께스랑 양은 그릇이랑. 주전자랑.....들고 줄 서 있었지요. 마당 깊은 집을 읽으셨어요? 아 연속극이라고 하는 걸 보니 드라마로 보셨군요. 전 읽었습니다. 지금도 새록새록 해요. ^^ 형태는 다르지만 다들 고생을 했지요. 아마 그래서 먹먹하실 듯. ^^
꼭 읽으려고 마음 먹은 책이에요. 그 책 사러 갔다가 천변 풍경이던가? 천변이야기던가를 사 와서는 같은 감정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페인트는 한눈에 보아도 서투른 아마추어가 칠했다는 것을 알만큼 마감이 거칠어 여기저기서 페인트가 흘러내리다가 방울로 굳어져 있었다.===>이런 문장은 증말 문학적이에요. 희야님, 소설로 바꾸시죠. 번역해봤자 그거 뭐 얼마 주남요? 소설 한 권으로 퇴직금까지 다 해결 납니다. 소설 한 권에 만 원일 경우, 초보작가에겐 천 원 줍니다.(참 저보다 더 잘 아실텐데..^^) 우리나라 요즘 소설 조금만 인기 있다하면 100만 권 팔립니다. 1,000,000권*1,000원=10억 원. 참 괜찮죠?^^
흠. 문학적이라. 논리적인 문장인데요. ^^ 소설도 번역도 학위를 따고 난 후의 이야기예요. 논문이 남았거든요. 어떻게든 올해안에 끝내야 하는데.
글 쓰시느라 수고했다는 말도 않고, 그 당시 그런 생활 하시느라 수고하셨다는 말도 않고, 느닷없이 소설 쓰시라고 권해 올리다니... 제가 하는 일이 다 이렇습니다. 죄송요!^^ 늘 제 생각에만 골똘하게 파들다 보니, 남의 사정 잘 안 보입니다. 이것 땜에 마눌에게 맨날 잔쇼리 듣구요. ㅋㅋ 눈치 없다구요.
권해 주신 것 고맙습니다. 돌아가신 김양헌 선생님 생각이 나네요. 그 분이 소설쓰라고 적극 권하셨거든요. 오늘도 그 분 생각을 했는데. 이거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게요. ㅎㅎ 무섭죠?
아뇨, 저의 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기에 어떤 걸 물어보시더라도 자신 있습니다. 얼굴 크게 나온 사진을 한장 주시면 성심성의를 다하여 相을 한번 봐드리고 싶습니다. 진정으로요.
희야님. 제가 여기 저기 돌아 다니다가 며칠전에 바람재에 잠시 들어 왔다가 오늘은 본격적으로 희야님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바님의 의견에 저도 한 박수 보탭니다. 지금도 희야님의 그집을 시작으로 단숨에 클릭 클릭을 하면서 여기 까지 읽고 있거든요.
맞습니다 맞고요, 바라지님도 그 시절 이야기 묻어두시지 말구요 함 쏟아 놓으세요.
고생스럽고 힘들었던 옛기억을 끄집어내고 풀어 놓을 수 있다는 건 그 기억이 추억이 되었다는 반증이겠지요. 이젠 옛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다는....
창넘어하늘님도 그 아픈 이야기들 여기 쏟아 놓으시고 우리 꽃님들에게 박수 받으세요. 아니, 위로 받으세요. 사람이 평생 몇 번은 위로를 받아야 하죠.
희야님 글 읽을때마다 놀랍습니다..이건 분명 기억력으로만 쓰는것은 아닐터인데...^^
기록을 해 주셨단 말씀이군요. 어진내님은 이런 기억 없으시죠? 맨날 기사가 리무진으로 출퇴근 시켜 주지, 요리사가 삼시세때 안 물리게 알아서 척척 구워주지... 침모가 세탁 및 바느질 다림질 다해 주지...
표현할 재주가 없어 그렇지 왜 없겠어요...근데 시기가 좀 다르게 기억나지요...결혼해서가 아니라 제가 어릴때 기억으로요...신혼때는 가진것 없어도 그냥 저냥 살아졌어요..관리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살구요 ㅎ 아..내 기사는 어디로 간거야..침모는 어디가서 안나타나구...요리사는 또 왜이렇게 안오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