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은 언제부터 성을 갖게 됐나? ◆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
한국인의 절반은 김.이.박씨이며, 5명중의 한 명이 김씨다.
7세기 삼국시대 부터 성을 갖기 시작하여 고려 때는 천민을 제외한 양민도 성을 사용했다. 태조 왕건 때 토착세력 친화정책으로 많이 생겨났다.
● 한국에는 5,582개의 성이 있다. ●
우리나라 성씨에 대한 최초 기록은 1486년 성종 때로 '동국여지승람'에 277개 성씨였고, 1930년 일제 때는 250개, 1960년에는 258개로 조사됐다.
1507개의 성은 한자가 있고. 나머지 4,075개 성들은 한자가 없고, 귀화하여 본래 태어났던 나라의 외래 성을 발음 그대로 한글로 사용한다.
15년마다 조사하는 인구센서스에서 1985년 통계에는 275개의 성이었으며, 그것이 본래 토속적인 한국의 성씨로 본다.
아무튼 5천만명의 한국은 14억명의 중국 보다 성이 많다. 다문화 가정의 탓이려니...
● 백성(百姓) ●
16세기 때 생겨난 이 말은, 100가지 성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일반 국민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17세기 때에는 55%가 성을 가졌으며, 이무렵부터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동서양의 뿌리찾기 특징 ●
서양에서는 자기로 부터 조상을 더듬어 찾아 올라가고, 우리는 시조로 부터 줄기를 따라 내려온다.
● 관련용어를 바로 사용하자 ●
나로부터 조상을 지칭할 때는 '몇 대조' 할아버지,
할아버지로 부터 나는 '몇 세손'이라 한다.
● 세와 대의 구별(예) 및 호칭 ●
1세(世) 현조(玄祖) 5대조(五代祖)
2세(世) 고조(高祖) 4대조(四代祖)
3세(世) 증조(曾祖) 3대조(三代祖)
4세(世) 할아버지(祖) 2대조(二代祖)
5세(世) 아버지(父) 1대조(一代祖)
6세(世) 자기(己) →
● 중국의 성씨와 족보의 수난사 ●
약 5000년 전의 헌원황제의 후예들은 중국 전역에서 살고 있으며, 중국 성씨는 약 3천개로 왕, 리, 장씨 순이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는 황제의 고향에서 성대한 제사가 열리고 200만명의 참배객이 몰린다.
129개의 성씨 깃발이 이곳에 걸려있고,
전체 인구의 88%를 차지하기에 이곳 하남성 신장을 중국 성씨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방, 서, 위, 제갈, 해씨 등이 이곳에서 왔다.
9개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황하유역 낙양(뤄양) 이 인근에 있는 중원지역이다.
중국에서는 1966~1976년까지 마오쩌뚱의 주도로 벌어진 극좌 사회주의 운동 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신분을 감추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스로 족보를 불태웠다.
● 게나 고동이나 왕손들 ●
김해 김씨 440만, 밀양 박씨 310만, 전주 김씨 260만, 경주 김씨 180만명이다.
다시 말해 왕손들만 해도 1200만명이다.
조선 말기에 너도 나도 새치기 짝퉁족보 탓이다.
● 족보에 대한 이중성 ●
김, 이, 박씨 등의 대부분은 모두가 왕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족보의 90%가 가짜로 생겨났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자기 집안 족보만은 진짜라고 믿는다.
● 유언비어에 대한 팩트체크 ●
각도는 달라도 당사자들이 들으면 큰 싸움으로도 번질 수 있는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또 있었다.
2007년 이후 가수 마골피의 등장으로 황당한 유언비어가 재점화되었다.
''성이 없던 백정, 가파치 등의 7개 업종의 천민에게 임금이 성을 하사했다.''는 근거 없는 내용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축씨와 골씨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천방지마피''씨가 유언비어에 해당되는 셈이다.
● 이순신 장군의 처가 방씨
영의정을 지냈던 이준경의 중매로 21세에 두 살 위 방수진과 혼인하여 32세에 무과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무예를 닦고 정신수양을 했고, 방진이 후손이 없어 자연스럽게 처갓집이 현재 충무공 고택이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이 제사를 모셔왔다.
12척의 판옥선으로 절치부심 재기하여 명량해전의 승리가 있기까지에는 방진 보성군수와 군민 완도 진도 등지의 백성들의 물심양면 후원이 있었다.
방씨는 방뢰의 134세손인 방지가 당나라 한림학사 로 669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설총과 교류했고 장씨와 혼인하여 가유현(현재 경북 상주시)에 정착했다.
후손 중시조 방운은 대장군과 좌승지, 지성사, 좌복야를 역임했고, 993년 거란 침공 때 공을 세워 배방산 일대를 봉토 받고 온수군에 봉해졌다.
2세 방중탁은 목종 때 도첨의 정승을 지냈고,
3세 방휴는 현종 때 중랑장을, 6세 방유는 숙종 때 문화시랑을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을 했었고,
방유령은 조선시대 이조참판을 지냈다.
덕수 이씨 이순신 장군의 장인 보성군수 방진의 집안 내력이다. 이래도 방씨가 천민인가?
1905년 김좌진 장군이 노비 30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안동 김씨 족보를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 무렵 10%였던 양반이 90%로 급등했고, 너도 나도 가짜족보를 구해 신분세탁을 했다. 이때 왕의 성이라하여 전주 이씨가 급등했던 계기다.
고려가 망하자 왕씨들이 전씨나 옥씨로 성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추노꾼에게 쫒기던 노비가 어쩌다 돈벌어서 흔한 성으로 신분세탁하고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인구 수가 많은 성씨 보다 ''천방지마피''씨가 순수한 양반의 혈통이 더 잘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천씨
천씨는 본래 중국 성씨로,'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
에 의하면 시조 천암은 명나라 홍무(주원장 연호)
연간에 도총장, 판도승상을 역임했고 양양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천만리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했고, 중국에는 높은 벼슬을 했던 천씨들이 많다.
반기문씨가 유엔사무총장에 오르자 중국 반씨들이 자기 가문에서 큰 인물이 나왔다고 환영했다.
제주 사적지 삼성혈에서 비롯되었다는 부씨, 고씨, 양씨 역시도 본관은 다르겠지만 중국에도 부, 양, 고씨도 많다.
중국의 한족 중에는 우리나라의 성씨와 같은 성이 거의 다 있고, 안산, 수원, 광주, 해남, 청도, 안양, 광명 등 한자까지도 같은 지명도 많다.
상주 주씨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후예들이며,
주자(주희)의 증손이며 신안 주씨 시조 주잠은 1224년 원에게 남송이 망하자 능성 구씨 시조가 된 사위 구존유 등 동료 한림학사 8명과 함께 고려에 망명하여 능성(현 전남 화순)에 살았다.
경주 이씨 이알평, 강성 허씨 허문숙, 밀양 손씨 손순, 악안 양씨 양만수, 평강 채씨 채송년, 남평 문씨 문다성, 창녕 조씨 조계룡, 청주 한씨 한란, 평택 임씨 임갈곡 등 성씨 별 시조의 탄생 신화를 살펴보면 정말 흥미롭다.
신안 주씨는 700여년간 능주, 나주, 전주, 웅천, 함흥 등을 본관 삼아 각기 번성해오다가 1902년 중종의 합의로 의정부 찬정 주석면 공이 대표로 고종의 허락을 받아 신안 주씨로 본관을 통일했다.
고려 전기 상장군 장금용은 구미시 인의동에서 번성한 인동 장씨 시조이며, 흥덕 장씨 시조 홍성 출신 장유는 신라 말기 난을 피해 오월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고려 초 광종 때 광평시랑을 했다.
이렇듯 성씨들마다 시조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건너왔으려니 생각되어도 토속 성들도 많기에, ''천방지마피''씨는 물론 다른 성씨들까지도 함부로 속단하여 비하하면 매우 곤란하다.
● 마씨
시조의 근원이 불분명하여 끊기고 뒤엉킨 실타레를 풀어야하는 숙제를 안고있는 장흥 '마'씨 등이다. 마씨의 원조 시조는 삼한시대 마한의 초대 임금 '마겸'이다.
마겸의 증손 '마환'이 목지국 신지였으나 기록이 끊겨 시조를 잊고 살다가, 온조의 최측근 참모로 백제 개국공신 '마여'를 시조로 모셨다.
그러나 그 뒤 다시 계보가 끊기고, 백제 패망시 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나당연합군에 항거하여 백제 재건을 도모했던 대징군 '마육신'을 시조로 받든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초 왕건이 난을 자주 일으켰던 목천(현 천원군) 사람들에게 우, 마, 상, 신, 돈 등의 짐승 이름을 성으로 쓰게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때 짐승을 본따서 우, 마, 저씨가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과 함께 상나라 패망 후 기자를 따라온 씨족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백제 때 마곤우. 마윤성 장군과 마철원 대장군, 마직정. 마선구. 마윤충 좌평, 마무 시덕과 고려 마병혁. 마정중 이부상서, 마순흥 문하시중, 마현 대학사가 있고, 조선 개국공신이며 영의정 마천목이 있다.
● 피씨
괴산 피씨 시조는 조선 개국공신 피득창이며 충북 괴산에 정착하여 본관으로 삼았고, 2015년 기준 전국에 2,569명이 살고있다.
득창의 아들 피강지는 장령, 손자 피정은 진사, 증손 피소는 목사를 역임했다.
조선병조판서. 전라도 감사를 역임한 피득창 등
높은 벼슬에 올랐던 인물들은 수없이 많다.
● 지씨
지용수는 고려의 일등공신이고, 조선 태조의 첫 사돈은 지윤이고 인조의 사돈은 지계최이다.
봉산 지씨 시조 지채문이 밌고, 청주 지씨 시조 '지경'은 송나라 홍농 사람으로 960년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했다.
후손 중에 고려 고종 때 시중을 지낸 지순과 대장군 지윤심, 평장자를 지낸 지도관을 각기 시조로 모시고 있으나 중간 계통을 잊어 촌수 구분이 어렵다. 그외에도 울진 지씨와 단양 지씨도 있다.지씨 역시 훌륭한 조상이 많고 왕의 사돈이 천민일 수가 있겠는가?
일제시대 왜놈들이 왕실과 백성 간에 이간질의 책동으로 이씨들만의 나라이니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이씨조선'이라는 용어와 함께, 역시 백성 상호간의 이간질 시키려고 퍼뜨린 전혀 근거없는 모함이다.
''영조대왕 모친도 무수리였는데 조상 신분이 뭐가 중요한가?''라는 등으로 21c 현 시대를 살기에 부질없는 논쟁이라 치부한다 해도 유언비어에 해당되는 '천방지축마'씨는 기분 좋을리 없기 때문에 행여 모르고 실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