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6,1-15)
When Jesus raised his eyes and saw that a large crowd was coming to him, he said to Philip,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으로 백 명을 먹게 한다. 사람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제1독서).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신앙인은 일치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시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구원자의 표징을 세상에 보여 주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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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바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으로 백 명이 넘는 군중을 먹게 한다. 시종은 불가능한 일로 여겼지만 예언자는 주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킨다(제1독서). 신앙인은 일치를 위한 노력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한 분이시고 성령께서도 한 분이시다.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이기에 언제나 일치를 위해 애써야 한다(제2독서). 군중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마귀 들린 이를 풀어 주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다.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고팠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적을 베푸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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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는 청하는 것과 감사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제 손에 든 빵을 많이 불려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빵이 불어나기도 전에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경주의 최 부잣집 사연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최 부잣집 가문의 마지막 부자는 가진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느 노스님에게서 들은 다음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똥오줌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재물은 쌓아 두면 독이 되지만 나누면 덕이 됩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저의 하느님, 당신께 모든 것을 돌려 드립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돌려 드릴 것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 나누며 사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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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분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불치병을 낫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빵 몇 개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군중은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으며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고팠습니다. 군중의 동요를 스승님께서 먼저 알아채십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엄청난 돈이 들 겁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기적을 생각하셨고 제자들은 돈을 걱정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는 배고픈 어른 ‘혼자 먹어도’ 시원찮은 음식입니다. 그런데 오천 명 이상을 먹게 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간식이 기적의 음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요? 예수님의 손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니고 있었다면 한 사람의 음식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손’을 거쳤기에 기적의 에너지로 바뀐 것입니다. 어찌 음식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온갖 ‘희로애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인다면 ‘기적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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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적을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도깨비방망이가 일으키는 기적 이야기를 들어 왔습니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이 나오는 그런 도깨비방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아갑니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먹고삽니다. 공장을 다녀 본 적이 없으면서도 옷을 입고, 컴퓨터 놀이를 하고,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우리는 값을 치르지 않고도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시원한 바람을 맞습니다. 표를 사지 않고서도 아름다운 대자연의 경치를 즐깁니다. 자동차는 기름으로, 컴퓨터는 전기로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금치나 빵이나 밥이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고도 힘을 냅니다. 기계는 고정된 작용만을 되풀이하는데 우리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보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일기예보 사이트입니다. 날씨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며칠 뒤에 우리 본당 Camp가 있거든요. 500명 가까운 본당 식구들이 이동하는 캠프이기 때문에 날씨가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캠프가 엉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캠프 가는 기간 동안 날씨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조금 흐리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맑음으로 표시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오늘 아침에 보니 수요일에 그 지역은 비가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왜 날씨가 바뀐거야?’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캠프 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내 앞 길이 항상 평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고속도로를 생각해 보세요. 이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를 갈 수 있도록 만든 도로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없지요. 또한 횡단보도도 없어서 일부러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고속도로라고 해서 막히지 않을까요? 이 고속도로도 꽉 막혀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삶이 무조건 잘 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입니다. 고속도로가 막힐 수 있는 것처럼, 내 삶도 갑자기 막힐 수 있습니다.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자녀와 친구가 나를 슬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뻥 뚫려야 정상인 것 같은 내 삶이 갑자기 막혀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혀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이때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 인간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안목으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생각하지도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아이가 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지요. 하느님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분명히 꽉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라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같은 커다란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이가 가져온 아주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우리에게 아주 작은 정성만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기적은 우리의 삶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기적들을 느껴 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부자인지 알고 싶다면 오늘밤에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고 했을 때 내일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라(보에트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일
-황지원 신부-
수도원 본원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행사를 치를 일이 많이 있습니다. 본원에 있는 형제들이 다들 다른 소임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더불어 행사를 준비해야 하니, 마음 같아서는 그냥 평상시 하던 대로 일을 마무리 하고 싶은 유혹들이 생깁니다. 간혹 행사 기획자가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일 때가 있습니다. 함께하는 형제들은 좋은 계획이라고 칭찬하지만, 일을 진행하는 형제들 입장에서는 너무 무리가 아닌가 하고 지레 소극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의도는 좋지만, 저는 바빠서 못 하겠는데요’라고 둘러대는 제 모습에서 마치 ‘그 일을 추진하려면 한 200데나리온어치의 능력이 필요한데, 저에게 그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일을 추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능력으로도 기꺼이 돕겠다고 나서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그렇게 시작됩니다. 아무리 봐도 무모하고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계획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 하나가 화답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들은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안드레아 사도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시작하십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미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봉헌에서 시작하시며,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일 안에서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일에 그저 우리 각자가 가진 작은 몫만을 내놓게 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전삼용신부-
저는 어렸을 때부터 행복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았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건강해야 하고 사람들과 사이도 좋아야 하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계획 중 이루어 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었고 대학도 결혼도 돈 버는 것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행복합니다.
저는 공부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유학 나가기도 싫었고 기도만 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 유학을 나갔고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석사만 하고 박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꾀를 썼습니다. 논문 점수를 낮게 받는 것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지막에 논문 지도 교수님께 짜증을 내게 되었고 성격이 좋지 않은 그 교수님은 박사를 하지 못할 성적을 주었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유학가라는 주교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과목을 바꾸어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른 석사를 하나 더 따게 되었습니다. 석사 하나 더 할 때는 매우 힘이 들었지만 성경을 하고 교의를 하니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잔꾀 부리다가 제 자신이 당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하느님 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폭넓게 공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획대로 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계획이나 계산이 안 통하나봅니다.
오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외딴곳까지 몰려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필립보에게 이 많은 사람을 다 먹이려면 그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이는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세상적인 계산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입니다. 그는 열심히 계산해보고 그들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하라고하신 다음에 한 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고작 두세 명이 먹으면 끝나버릴 것을 가지고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배고픈 군중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바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각자 모여 앉은 백성들은 개별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제들입니다. 또 빵은 신자들이 봉헌하는 예물이고 예수님의 성체를 의미합니다. 이 복음 말씀에서 조금 더 읽어보면 이 기적의 빵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내려오게 했던 만나와 이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인 당신의 몸과 음료인 당신의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심으로써 이 기적이 단순히 빵만 늘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당신의 성체를 사제들을 통해 배부르도록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것임을 알게 됩니다.
미사 때 사제들도 빵과 포도주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빵과 포도주는 사실 신자들이 농사를 지어서 봉헌하는 예물입니다. 신자들은 이 때 일주일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소득의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사실 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셔서 받게 되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감사의 표로 십분의 일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사제는 그것을 받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봉헌제물을 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천 배, 수만 배 더 늘려서 다시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되돌려주시려고 미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작은 예물과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주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혈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십일조를 바치는데 하느님께서 다시 갚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감사’가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 벌게 해 주셨어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쳐야 참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란 희랍어로 하면 ‘에우카리스티아’라고 하고 ‘미사’를 ‘에우카리스티아’라고 불렀습니다. 미사 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봉헌이 없다면 진정한 미사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체와 성혈을 영하더라도 각자의 마음 자세에 따라 그 받는 은총의 정도가 다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하면서도 만 원짜리가 지갑에서 나오면 깜짝 놀라서 다시 천 원짜리를 찾다가 천 원짜리가 없으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일단 줄을 섰으니까 오천 원짜리를 내고 갑니다.
정말 모든 것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봉헌은 그 봉헌한 것의 수천 배, 수만 배로 돌려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예전에 제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한 여자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무언가를 더 찾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을 해 보시고 결혼을 해 보신 분들은 그런 느낌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만을, 남편은 아내만을 바라보고 만족해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겨도 남편만, 혹은 아내만 있으면 길에 나 앉아도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장담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오천 명을 배불리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을 깨달을 때, 그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줄 알게 되고 그 봉헌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수많은 사람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제가 혼자서 한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저는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 것이니 당신이 가지십시오.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했더니 수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제가 하느님께 제 자신을 봉헌하고 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강론과 강의를 듣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전화를 하기도 합니다. 봉헌의 삶이란 마치 봉헌된 밀떡이 주님의 살로 변화 되듯,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은총이 왜 이렇게 오지 않는지 불평하지 말고 진정으로 많은 은총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었는지 먼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카인과 아벨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카인은 봉헌 할 줄 몰라서 가진 작은 은총마저 빼앗긴 사람이고 아벨은 봉헌할 줄 알아서 은총을 부풀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천 명이 아니라 오만 명, 오십만 명이라도 충분히 배불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은총을 받으려는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도 감사하는 맘으로 봉헌하실 줄 알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한 아름 안겨주실 수 있었습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큰 그릇이란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오롯이 그 분께 맡길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불평불만만 하면 불평불만할 일이 더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와 봉헌을 드리고 그것에 합당하게 주시는 은총을 받아가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 이 미사 동안 우리에게 일주일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봉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찬미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크게 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가도록 합시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고
-김찬선신부-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안 돼”라는 말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Negative Thinking 말입니다. 이 Negative Thinking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생각은 씨앗이기 때문이고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고’라는 로고송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대로 된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능성을 닫아 버리기에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안 될 것이고 된다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믿는 구석이 없는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구석이 있을 때 생각대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차원에서는 생각과 믿음이 동의어입니다. ‘생각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와 ‘생각대로 된다고 믿습니까?’는 같은 뜻입니다.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보았는데 다른 차원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 같이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용, 쓸모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안드레아 사도처럼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하면 써보지도 않고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버리고 버리는 순간 그것은 보물이 아닌 쓰레기가 됩니다. 所用과 所重. 용(用)이 있는 곳에 중(重)이 있는데 用이 없다 하니 重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는 오병이어가 소용이 있고 그래서 소중한데 안드레아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합니까?
가난한 사랑과 욕심의 차이가 아닐까요? 욕심 없는 사랑을 하면 쓸모가 적어도 크게 쓰고 설사 쓸모가 없어도 소중합니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훌륭한 지도자는 다른 모든 사람이 쓸모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래서 포기한 사람을 발굴하여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운동과 예술의 지도자들이 이러 할진데 종교와 신앙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더 쓸모없는 사람에게서 쓸모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얼마나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일의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사람의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큰 사랑의 주님이시기에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소용이 있고 소중하다 하시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나도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그도 소중히 여기시며 당신 사랑의 도구로 요긴히 쓰십니다.
너희는 내게 먹을 것 주었느냐?
-배광하신부-
나누어 주어라
▤밥상 공동체
민중 신학자로 불리는 ‘안병무’(1922-1996) 박사는 그리스도교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모이는 공동체’와 ‘보내는 공동체’로 구별할 수 있는데, 갈릴래아의 공동체는 보내는 교회였습니다. 특히 지도층이 곳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거기서 어떤 계층성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상은 예수님과 민중이 식탁을 함께 하는 얘기가 많은 것과 특히 마르코 복음에 5000명을 나누어 먹이는 예수님 이야기(6,30 이하)와 또 한 번은 4000명을 나누어 먹이는 이야기(8,1 이하)가 기록된 것에 의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4복음 사가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이 기적 이야기에서 특별히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 사가의 증언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기적은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랑의 나눔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측은지심을 갖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가령 많은 수해가 났을 때 수재민을 돕기 위한 TV 모금 운동의 예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방송국에서는 수해의 처참한 현장을 보도한 뒤 수재민들의 울부짖음을 화면에 내보냅니다. 그러면 그같은 슬픈 현장을 목격한 시청자들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수재민들을 돕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 빵의 기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군중에 대한 가엾은 마음, 그리고 먹을 것이 있는 이들의 나눔, 모두가 십시일반 나누게 되자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어쩌면 빵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다면 그 기적은 예수님에게서만 그칠 일회성의 기적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뒤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 나눌 수 있는 진실한 빵의 기적, 늘 연속성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기적을 가르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 이전에 당신께서 혼자 하시지 않고 함께 기적을 이루자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실천하는 삶에서
사랑은 너와 내가 서로를 부르며 대답하는 영혼의 목소리입니다. 고독한 생의 여정에서 서로의 고독한 자리, 고통의 자리, 굶주림의 아픔을 함께 채워주고, 달래주고, 나누는 관계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만남입니다. 그같은 사랑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2).
사실 빵의 기적은 나눔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심판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기도에 열심하였는지, 성당에는 얼마나 잘 다녔는지, 우리가 세상에서 직업이 무엇이었고 성당에서 직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묻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느냐?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들였느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와 주었느냐?”(마태 25,35-36 참조)
A.F.I.(국제 가톨릭 형제회)의 일원으로 1962년 한국에 온 프랑스의 ‘콜레뜨 누아르’는 오늘 빵의 기적 복음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 무려 여섯 번이나 등장한다. 바로 초대교회가 거기에 부여했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분명코 바로 거기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기주의를 부수고 깊은 나눔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자기완성으로 가는 데는 이런 나눔의 좁은 길밖에 없다. 인간은 남에게 내주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것은 유일하게 좋은 인간관계다.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는 것, 그것은 퇴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군중을 먹이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스스로를 양식으로 내주실 수 있었던 것은, 사막에서 겪은 유혹에서 돌을 빵으로 바꾸기를 원치 않으셨고, 당신 혼자 배를 채우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빵의 기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천하며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 또한 당신의 나눔을 본받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3실링과 하느님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이기양신부-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말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 역시 이런 논리에 빠져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가난과 기아, 전쟁 등 사회악에 손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 전 세계의 가난 구제 문제는 둘째치고, 국내에서조차 결식아동과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도와야할지 걱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 빵은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른에게는 간식거리 정도의 적은 양일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오천 명에게는 있으나마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필립보 역시 지치고 배고픈 군중을 염려하시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라며 군중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기 위해서는 바로 돈 계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모습이요.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 역시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라며 불가능하다는 필립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모두 자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자기들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빠지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두 제자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 지금 함께 하고 계시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내 계산만 앞세워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무대책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고는 어린이가 내놓은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게 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며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 만연해 있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처럼 세상의 굶주림 앞에 '나 한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무엇이 변할 것인가?'하는 실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작더라도 먼저 믿음을 갖고 봉헌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주 적은 것으로도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인도 캘커타에 큰 고아원을 세우겠다고 발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 일을 하자면 막대한 공사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부대시설비가 들어갈 터인데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수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준비해 놓으신 돈이 얼마나 됩니까?" 마더 데레사가 주머니에서 3실링을 꺼내 보이며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습니다. "3실링과 데레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3실링과 하느님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분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나도 배고프고 부족하지만 먼저 내어 놓음으로써 기적을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
-장광재신부-
오늘 복음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풀이 많은 들
판에 지쳐 있는 이들이 떼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과 그들을
산 위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까지마음속으로그려보노라면이런성가가떠오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가톨릭 성가 54번입니다. 이 성가를 저는 장례식장에서
많이 듣고 부릅니다. 왜 장례식장에서 자주 불릴까요? 그
것은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유족들에게‘주님께서 그의
목자시니 하늘나라에서도 아무것도 아쉽지 않도록 책임
져주실 것입니다’란 의미가 위로와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
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아이가 가지고 온 물
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를 유심히 보시고 오히려 그
걸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작
은 집보다는 큰 집이 좋고, 소형차보다는 중형차가 더 멋있
어 보입니다.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리는 것이 많을 때도 있
습니다. 그냥 있으면 좋으니까 또 없으면 불편할 것 같으니
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장만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짐이 되어 버립니다.
인사이동 때마다 힘든 것이 바로 이삿짐을 싸는 것입니다.
읽지 않는 책을 정리하면서도 맞지 않는 옷을 정리하면서
도 언젠가는 읽을 거야, 살을 빼면 입어야지 하며 다시 짐
속으로 넣어버리는 저 자신을 보면 이삿짐이 아닌 욕심 덩
어리들을 챙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많지 않아도 되고 부족해
도 되며 없어도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마음, 겸손한 마음, 주님을 바라보려는 열의만으로도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 (마태6,25-34).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알
려주시려는 뜻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작거나 부족한 것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믿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산다면 오늘 복음의 기적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러 주시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덧셈은 이상하고도 특별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90에 10을 더해 100을 만드십니다. 또 70을 가지고 있
는 나에게 30을 더해 100을, 50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50을,
10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90을 보태 100을 만들어 주십니
다. 우리는 복음에서‘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합니다’라
고 말하는 제자와 아이의 작은 음식으로도 감사를 드리신
예수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런 주님께서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군중을 피해 혼자
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주일을 지내는 우리도 주님
을 따라 고독 속으로 물러가는 시간을 가져봄이 어떨까요?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이스라엘에서 ‘보리빵’은 빵 중에서 가장 흔하고 값싼 빵이었기에 동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빵이었다고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아이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아주 가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시면서 가난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중요한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중요한 일은 배고파 하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일과 그 일을 통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라고 물으시자 필립보는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용하실 재료를 따로 보시고 계셨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아닌 가난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필요한 재료는 부자의 인색한 예물보다 는 가난한 사람의 정성 어린 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데려오기를 잘 하는 안드레아에게 가난하고 착한 아이를 찾게 하셨습니다. 이 아이는 계산을 잘 할 줄 모르고 가진 것을 다 내놓는 단순한 아이였습니다 .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9 절 ) 오천 명을 먹이 려고 하시는 예수님 앞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선 아이의 모습은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과 같이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1 사무 17, 4-7 참조 ) 계산 잘 하는 필립보는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해서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예수님께 보고를 드렸는데 , 지금 예수님 앞에 선 가난한 아이의 손에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 그런데 홍해를 건널 때나( 탈출 15, 21 -22참조 ), 예리코 성을 함락할 때나( 여호 6, 20 참조 ) 골리앗을 무너뜨릴 때(1 사무 17, 48 -49 참조 ) 사용하신 하느님의 계산법은 사람들의 계산법과 아주 달랐습니다 .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 ”( 이사 55, 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아이는 가지고 온 ‘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를 몽땅 예수님 앞에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 어린이들은 단순해서 복잡하게 계산 하지 않습니다 .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계산 할 줄도 몰랐습니다 .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단순한 아이의 마음과 생각을 보시고 그것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의학적 · 경제적 ·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계산하면서 산다면 일 년을 살기도 힘들 것입니다 . 그러나 단순하게 계산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70 년을 살아도 어려움 없이 즐겁고 여유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복잡하게 계산하는 사람을 도구로 쓰시기보다는 단순하게 생각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지식이든 재능이든 재물이든 아름다움이든 생명이든 보리빵과 물고기이든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시들고 낡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주님의 손에 갖다 드리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난하고 착한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몽땅 예수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요한 6,11) 드렸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리 빵과 물고 기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14절)하고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오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냥 있을 때는 어린아이의한끼식사밖에되지못하지만이작은것을나눌 때는 풍성한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강복은 우리가 많이 가질 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놓을 때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가진 것이 작더라도 내놓으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베풀고 할 수만 있다면 섬기고 할 수만 있다면 나눌 수 있어야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몽땅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일을 행하시도록 믿음을 갖고 기다려야겠습니다. 예수님께 서는 지금도 착하고 가난하지만 계산하지 않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아이를 찾고 계신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고자 하실 때 우리는 이 아이와 같이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기쁘게 맡겨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해 봅시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고 있는데 급한 전화가 온 것이에요. 얼른 성지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도로 하나만 건너면 저의 목적지인 가게였거든요. 따라서 저는 조금 늦더라도 물건을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신호를 바뀌지 않던 지요. 그렇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널 수도 없고……. 이 신호등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파란 불이 켜져 있으면 갈 수 있고, 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빨간 불이라고 해서 ‘내가 저기로 건너갈 수 없구나.’하면서 절망에 빠질까요? 그 누구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빨간 불일 때에는 건너갈 수 없지만, 분명히 어느 순간에는 파란 불로 바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신이 도로를 건너려고 할 때, 항상 파란 불만 켜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서 항상 파란 불만 켜져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멈춰서 기다려야 하는 빨간 불일 때가 있는 것이지요.
이 빨간 불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시련과 실패, 그리고 고통의 순간이 아닐까요? 그 순간에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하셨는지요? 혹시 시련과 실패, 고통이라는 빨간 불 앞에서 그 길 가기를 아예 포기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
빨간 불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파란 불로 바뀌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삶이 계속 파란 불이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걷다가 잠시 쉬고, 또다시 걷고를 반복하는 파란 불과 빨간 불의 조화가 가장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십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만 있다면 항상 파란 불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분만 임금으로 모시고 산다면 먹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파란 불만 놓인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이지요.
빨간 불이 내 앞에 켜졌다고 뒤로 돌아선다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삶 의 빨간 불인 고통과 시련 역시 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를 참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모습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꾹 참고 이겨냅시다. 빨간 불 후에 반드시 파란 불이 켜집니다.
빠다킹신부
나눔 -여성국 신부-
“어떤 것을 자기 혼자만 갖고 싶다는 소원은 악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소원이다. 사람이 행하고 경험하는 일이 참된 행복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행복은 더욱 절실하게 남에게 주고 싶어진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한 말입니다. 사회가 각박해져 가다보니 사람들 사이엔 ‘내가 받는 것만큼만 주겠다’는 인식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아니 이 정도라면 양호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내 밥 그릇만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되었든 상관없다는 듯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좋은 것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혼자서만 소유하기보다는 더 주고 싶고, 더 나누고 싶은 마음이며, 그런 마음을 소유해야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안드레아나 다른 모든 이들에게 가치 없어 보였던 아이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가치 없어 보이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정원순 신부-
◆10년 전 나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민다나오 섬 다바오에서 2년간 산 적이 있다. 그곳 학생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던 나는 매주 토요일에 가난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주일에 돌아오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그룹은 한 신자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저녁식사는 밥과 반찬 한 가지뿐이었는데 그 반찬이라는 것도 검지 크기만한 멸치였다. 그 가족은 멸치 대가리와 꼬리를 먹고 우리에겐 몸통을 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고 당황했다. 함께 간 필리핀 동료 수사가 내게 이 가족은 손님이 와서 대접은 하고 싶은데 있는 것은 멸치뿐이어서 그러니 맛있게 먹어야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음날 수도원에 돌아온 나는 아침기도 중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떠올렸다. 그 가족은 비록 가난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나누는 그 태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삶의 자세가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1테살 5,16-18) 살아가기에 그 조그마한 멸치로 외국에서 온 수사를 감동시킨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기적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시는 주님
-홍승모 신부-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빵의 기적을 통해 성체성사와 신앙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적인 배고픔뿐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까지도 채워 주십니다. 성체성사는 이런 사랑의 주님과의 일치를 표현합니다. 이 일치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앙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성장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 일상생활의 점진적인 변화로 서서히 완성되어 갑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영적인 측면과 육신적인 측면이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질문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실 기적과 같은 일을 필립보가 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가 아니라, ‘네가’라는 용어를 쓰셨을 것입니다. ‘우리가’라는 의미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도록 요청하신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을 마련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8). 다만 제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믿음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아니 인간적인 우리의 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의 고픈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뻔히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나머지를 예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은총은 부족하기는커녕, 차고 흘러넘칩니다. 엘리사 예언자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도다”(시편 145,18).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육신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굶주림을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시지만,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때가 많습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처럼, 또 다른 기적의 표징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이 권고는 우리가 각자의 처지에서 해야 할 최선의 것 중에 하나입니다.
나를 내어 놓을 때 기적 일으켜
-김영수 신부-
요즘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급식으로 하고 있어서 도시락에 얽힌 추억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배고픈 학창시절에 도시락은 가장 큰 위안이며 즐거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도시락을 다 까먹고 젓가락만 들고 다른 친구들의 도시락을 전전하는 얄미운 친구들도 있었지만, 학생들 중에는 정말로 집안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점심시간이면 수돗가에 나가 물로 배를 채우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서로 한 숟가락씩 모으면 금방 도시락 한 개가 새로 만들어져 굶는 친구의 점심을 마련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열 숟가락의 밥을 모으면 한 그릇의 밥을 만든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사랑이 현실이 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음식을 드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신 중에 모처럼 마련한 휴식도 포기하시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엄청난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나라의 식탁이 차려지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넌지시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장정만도 오 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일 빵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필립보의 대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한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몰려든 군중을 먹이기에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안드레아가 가져온 보잘 것 없는 빵과 물고기는 불가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안드레아의 대답은 필립보 보다도 훨씬 절망적인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께 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마련하는 길을 보여주시기로 마음의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해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이 먹고 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알려줍니다. 모두들 배불리 먹었고 남은 것을 거두어들이니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는 이야기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먹고도 남을 것을 마련하실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십시일반의 정신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내어 놓을 때 모든 이가 함께 누리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먼 길을 떠나 예수님께로 몰려든 사람들이 자기 배를 채울 것을 마련하지 않고 올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자기의 것을 내어 놓을 용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서로가 자기의 빵만을 움켜쥐고 있을 때에는 모두가 부족하지만, 가진 것을 내어 놓으면 모두가 충분히 먹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이가 내어 놓은 빵과 물고기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였고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다 배불리 먹고도 남는 사랑의 기적을 스스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 놓고도 그것을 구실 삼아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빵을 던져주고 그것을 미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하는 거짓 사랑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거짓 사랑에 대한 유혹 앞에서 단호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능력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을 채우는 일에 머무르도록 하는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돌을 빵으로 만드는 구세주로 만들려 했던 유혹과 똑같은 유혹입니다. 사랑을 베풀 때에 겸손하지 못하면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들 안에 이루어 내신 빵의 기적이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빵을 찾도록 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인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당신의 몸과 피를 다 내어 놓으시고 목숨마저 내어 놓아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의 식탁을 준비하십니다.
사랑은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어 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 당신의 몸과 피를 모두 내어 놓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마저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어 놓으신 봉헌으로 세상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두가 나누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눔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근방 어느 산등성이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들을 선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어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들은 그것이 사실인 지를 묻기 전에,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들은 정확한 사실만 기록한 현대식 전기가 아닙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 시대 독자들이 알아듣고, 같은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초기 교회가 이미 거행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하게 하는 표현들이 여럿 있습니다.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는 말로써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하신 파스카, 곧 해방절 식사를 상기시킵니다. 그 식탁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당신의 몸,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파스카를 언급하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나누어 주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은 최후만찬 식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초기 교회는 성찬에서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교회가 거행하던 성찬을 염두에 두도록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열왕기 하권의 엘리사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 고사(故事)를 바탕으로 발생하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 그것을 참고했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의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빵 한 개로 다섯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한 개로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그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면서,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땅에 와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먹이셨다, 마실 것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먹고 마시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방하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그를 해방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의 엘리사 이야기에서 보면 사람들은 가진 빵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빵은 사람들의 눈에 형편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었더니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나누는 곳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나누어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있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우리 눈에 부족해도, 나누는 우리의 실천 안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되고 풍요로움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인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을 암시하는 것은, 성찬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나누면서, 하느님이 우리의 나눔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듣고,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축복과 풍요로움의 기적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먹을 것을 해결하려는 군중을 예수님은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衣食住) 해결의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미는 나눔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질도, 지식도, 자격증도 모두 우리 자신을 가꾸고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도 흔히는 하느님께 조금 바치고 더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자신이 풍요롭게 살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때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세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나눔의 풍요로움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나눔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사는 길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오늘 있다는 사실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동쪽 하늘에 해가 뜨는 일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모두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 풍요롭게 잘 되겠다고 노력하는 세상에, 이웃과 나누고 이웃을 도우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왕으로 우리 생사의 대권을 쥐고 우리를 위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바친 만큼 받겠다는 우리의 약삭빠른 이해타산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십자가를 지는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서 이웃이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데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누어서 이웃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성체성사의 근거인 빵의
-조욱현 신부-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제1독서: 2열왕 4,42-44: 먹고도 남을 것이다
1독서는 복음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44절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43절)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 있어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 때는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4절)고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의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 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남자만 오 천명”(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출애 16,20) 예수께서는 “조금도 버리지 말고”(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eo’(11절)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15절)고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던 것이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제2독서: 에페 4,1-6: 주님도 한 분이시고, 몸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2독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
-이수철신부-
어느 투병중인 수녀님의 다음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전에 건강했을 때 병으로 고통중인 이들을 대할 때
‘잘 참아 견디라’라는 등 쉽게 말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리고 부끄럽습니다.
내가 아파보니 말은 쉽게 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털어 놓으며 도움을 청할 때 참 답답한 심정입니다.
소위 난치병이나 불치병,
경제적인 큰 실패,
실직,
미취업,
가족 간의 불화,
이혼을 앞둔 부부,
알콜이나 도박 중독,
재산 다툼,
심한 우울증 등,
복잡한 사회만큼이나 복잡하고 힘든 일들 얼마나 많은지요!
요즘 나라 안팎의 사정은 얼마나 또 복잡합니까? 수해에다 가중되는 정치적 불안에 경제적인 어려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따른 남북의 긴장과 국제적 냉기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참으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절대 믿음의 끈, 생명의 끈 하느님을 놓쳐선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해선 안 됩니다. 시련과 유혹이 크면 클수록 기도도 열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바로 여기서 떠오르는 게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초점은 다급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있습니다.
내 소원 간절히 아뢴 다음,
이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소원 기적처럼 이뤄지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내 소원 이뤄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고
훌훌히 자신의 뜻을 털어버리고 즉각 주님께 순종하는 것,
이게 진정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군중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굶주림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치유 받았던 이들 결국은 모두 죽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진리,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랄 수는 있지만 궁극의 초점은 하느님께 두는 것이요
온통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내적 평화요 자유로움입니다.
기적도 치유도 일어납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진정 믿음의 사람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햇곡식 이삭 자루의 적은 양에 실망하지 않고
아버지께 전적으로 위탁합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후회함이 없고 하느님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의 시종의 낙심어린 말, 오늘 복음의 안드레아의 반응과도 흡사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 부족한 우리 모두의 보편적 반응입니다. 그러나 사람 눈에 하찮은 것이지 하느님께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와 정성이 담겼으면 하느님은 기적의 도구로 쓰십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런 철석같은 믿음 있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반응도 똑 같습니다.
전혀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최선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온전히 아버지께 그 결과를 맡겼을 때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내 뜻대로의 기적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인사 대천명 믿음의 결과 후에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덕분에 배불리 먹은 군중들,
그 육신의 양식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여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아 현실적 욕구를 채우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도 기적입니다. 내적 깨달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 내적 기쁨, 내적 평화의 체험이 더 큰 기적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 언젠가는 죽습니다. 건강하게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심으로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게 우리의 궁극 목표입니다.
온전히 ‘하나’의 깨달음 속에 살 때 영원한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 ‘한 분’ 안에 있음의 자각이 바로 구원체험입니다. 이 ‘한 분’에서 벗어나 있기에
고립 단절감의 외로움 속에 영육이 황폐화 되어가는 겁니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이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을 위해
복잡하고 산만한, 천박한 얕고 가벼운 세상에서
때때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래야 기적으로 가득 찬 삶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본 ‘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란 책 제목도 떠오릅니다.
중요한 건 외적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개안이요 회심입니다. 마음이 눈이 열렸을 때
온통 삶은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이런 개안(開眼)이나 회심(回心)보다 더 좋은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처신, 그대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세속의 감미로운 유혹을 직감하신 주님,
아버지와 깊은 일치의 친교를 나누려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이제 영혼이 살기위해 고독과 침묵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혼자 고요히 고독과 침묵 중에 하느님 체험하며 영육을 충전시켜야
늘 ‘한분’이신 주님과 일치감 속에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큰 기적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시니 참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주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한 아이의 전재산
-박상대신부-
오늘은 나해 연중 제17주일이다. 오늘 주일부터 연중 제21주일까지 주일미사의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봉독된다: 연중 제17주일(요한 6,1-15), 연중 제18주일(요한 6,24-35), 연중 제19주일(요한 6,41-51), 연중 제20주일(요한 6,51-58), 연중 제21주일(6,60-69).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인간이 매일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성체성사를 (간접적으로) 제정하시고 그 신비를 밝혀주시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앞선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자, 유다인들의 예수의 권한에 시비를 걸어 논쟁을 벌이는 5장 전체의 내용이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보도되고 있는 반면, 6장의 내용은 갈릴래아 호수와 바로 근처인 가파르나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긴 대목의 요한복음 6장은 구조상 대략 6단락으로 구분된다. ① 단락: 예수께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다.(1-15절) ② 단락: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16-21절) ③ 단락: 군중들이 호수 동편에서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한다.(22-24절) ④ 단락: 예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대화형식으로 내리신다.(25-59절) ⑤ 단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제자들의 불신을 토로하자 예수께서는 배신자를 예고하신다.(60-66절) ⑥ 단락: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12사도 중에 배반자가 있음을 예고하신다.(67-71절)
오늘의 복음은 6장의 첫 번째 단락에 속하는 대목으로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빵의 기적(표징)을 보여주고 있다.(1-15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조그만 산등성이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리를 잡자, 그 주위로 무려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앉았다. 다들 지치고 굶주린 모습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물론 불가능함을 알고 하신 말씀이다. 돈도 없고, 그만한 양의 빵을 살 곳도, 파는 곳도 없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제자들과 군중들을 살펴보신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허리춤을 움켜쥔다. 무엇이 잡히는 모양이다. 사실 사람들은 길게 내려 입은 겉옷 속에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기 위해 무명이나 베 따위의 헝겊으로 만든, 중간을 막고 양끝을 튼 긴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속에 며칠 먹을 빵이 들은 게다. 그들은 통상 집을 나설 때 누룩 없이 납작하게 만든 빵(무교병)을 몇 개씩 전대에 넣어 다녔다. 그냥 먹어도 되고, 쨈을 발라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다니다 보니 빵을 다 먹어버린 사람도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아가 용케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지목한다. 아이가 자기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잘못 간수한 것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 때문에 허리춤이 불룩해서 안드레아에게 들킨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아이 마음이 자기의 것을 몽땅 식사의 음식으로 내어놓은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건네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복음서는 그저 "감사의 기도"라고 하지만 분명 이 기도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기도였을 게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렀던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은 군중들 가운데 빵도 마른 물고기도 수북히 쌓여있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따금 한바탕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것도 예수님의 손을 통하면 모두를 위한 큰 사랑의 기적이 된다
나눔으로써 소유한다
-상지종신부-
'나눔'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눔'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을 보지 못하기에 갈수록 나누기를 꺼립니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서로가 자신을 것을 챙기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요즈음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곧 나눔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빵 한 개를 백 개로 만들고, 물고기 한 마리를 천 마리로 부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내 빵'을 '네 빵'으로, '내 물고기'를 '네 물고기'로 내어놓을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닫혀져 있던 마음을 열고, '나'와 '너'라는 울타리를 깨부수어 하나의 '우리'로 묶어 세우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함께 한 사람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체험은 세상이 주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 이 체험, 나눔으로써 얻어진 소유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소유, 인간적인 욕망에 따른 소유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안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서로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소유가 되라는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소유는 지배를 뜻하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는" 소유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유야? 이런 소유는 필요 없어.' 라고 말입니다. '소유'를 '지배'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의 소유가 된 신앙인들은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나눔은 성체 성사를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게서는 성체와 성혈로 자신을 완전히 나누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소유물로 만드십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소유는 곧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완전한 나눔을 통해 완전한 소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나'와 '너'가 하나가 됩니다.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소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이 담긴 완전한 소유입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신 아름다운 소유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우리 자신을 벗들을 위하여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어놓음으로써 서로를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를 완전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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