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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묵상글 들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 은총의 악용.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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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의 악용
어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해졌다는 말씀에 이어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은총의 악용이 있지요.
악용이란 선을 악하게 이용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은총을 악용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늘 용서하고 내 편인 엄마가 있으니
그 엄마의 약점을 이용하여 죄악을 저지르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도 엄마도 사랑이 약점입니다.
하느님도 엄마도 사랑하기에 모든 고통과 시련에 강하기도 하지만
자녀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고 은총을 악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선 은총을 악용하면 은총은 은총이 아니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은총을 악용하면 은총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은총 때문에 인성이 타락하여 죄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은총 지위를 상실함은 물론 죄의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방금 인성이 타락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점점 욕망을 쫒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우리의 욕망이 상선이 아닌 하선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이 진리를 따르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싫어도 하느님 뜻을 따르게 해야 하는데
우리의 감성이 당장 좋은 것만 쫓기에 욕망이 설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것을
욕망에 순종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쫓지 않으면 하선을 쫓게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성향의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기 전의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좋은 것을
감각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최대한 즐기며 살았는데
그런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주인과 종 중에 누구를 섬길 것인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이고, 즐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상선인 은총을 즐기고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인과 종 중에 어떤 것을 섬길지
프란치스코처럼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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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김레오나르도김찬선
그제부터 저희 <여기 선교 협동조합>에서 주변 어려운 분들의 선교 차원에서 <여기 국밥>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에 대해 자유 게시판에 소개하는 글을 올렸으니 들어가 보시고 주변에도 알려주시기를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복된 나날이 되시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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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제, 우리는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있음”에 대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부분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뒷부분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를 요구됩니다.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충실함이 주인을 섬기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청지기에게는 바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는 ‘슬기로움’이 요청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움’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 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곧 주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주님!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하오니,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에 따라 처리하게 하소서.
하여,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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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카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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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서양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귀족들이 솔선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조선 왕조 시대에는 신분상 특권을 누리던 양반들이 오히려 병역도 세금도 면제받았습니다. 이 야만적이고 비공동체적인 전통이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해치고 있습니다. 많이 배웠거나, 많이 가졌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이 병역이나 납세 등의 의무에 있어 더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반사회적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믿는 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믿음에 따른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이것이 더 근본적인 믿음의 원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갈 은총을 받으며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간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세속적인 어느 특권보다도 더 귀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주라고 먼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특권이자 혜택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귀하게 살아가는 삶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책임으로 남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관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책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된 존재로서, 그 뜻에 따라 행한 결실을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이고도 사회적인 책무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오늘 독서에서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우리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인간의 기본적 의무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 인간 본연의 자세를 회복한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하는 근본 이유는 우리 자신도 예수님처럼 제사를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믿는 이들이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의무이며, 복음화는 이를 충실히 이행한 결과로 얻어질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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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50대 후반의 이 형제님은 당뇨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 사실은 형제님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 재활치료를 받는 데 비참함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떤 환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그래도 열심히 재활치료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면서 함께 치료를 잘 받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두 다리가 그대로 있잖아요.”
그러자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고로 제 아내를 잃었습니다.”
누구의 상실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상실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상실 속에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태에서도 힘차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나의 모습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삶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힘을 내는 삶을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하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우리가 할 준비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그 모든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해야 할 준비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세상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이라는 구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술, 마약 등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받은 만큼 많은 것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시는’(루카 12,48)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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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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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어느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하루 15분씩 나흘 동안 본인 인생의 가장 상처가 되는 경험에 대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강점’을 글로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학생들은 상처가 되는 경험이 귀중했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98%의 학생들이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학생들은 글로 쓰는 것을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경험을 통해 건강이 오히려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상처가 된 경험을 글로 썼던 학생들은 이 연구 이후에 교내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든 것입니다.
글을 쓰면 객관적 시각을 얻게 됩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책을 찾는데 쓸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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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알고, 더 잘 할 것 같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급병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제대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사제가 되면 이제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가 되면 사목을 더 잘할 것 같았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과거의 굴레에 잡혀있으면,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린다면 현재는 늘 근심과 걱정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몸을 맡기고, 즐기면 언제나 마음은 햇살 가득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중세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따르기 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민족, 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댕, 메튜 폭스, 토마스 베리, 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였고, 늘 기도하였고,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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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궁극 목표
- 충실하고 슬기로운 참 사람이 되는 것 -
삶의 궁극 목표는 무엇일까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참 중요한 공부가 참 사람이 되는 공부입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진선미眞善美의 ‘하느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공부는 평생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학인에 평생공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제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강조하는 바는 성인이, 성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참 사람이 되라는 말씀도 결국은 성인이, 성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인이 되는 평생 삶의 평범한 원리는 넷으로 요약됩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 일하라.” 여기에 필히 하나, “운동하라(걸어라)”를 더하여 넷입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요 참 행복의 비결이겠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는 이런 성인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이런 성인이 되고 싶은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끝까지 평생 분투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불러 주신 고유의 참 나가 되는 평범한 성인이요, 이는 우리 모두의 성소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고백성사중 가장 많이 써드리는 다음 보속 처방전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이대로 살면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절대로 무지와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저절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형성되고,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지면서 사랑의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로마서에서 세례받아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또 격려합니다.
“여러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 주님의 종인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으로 살 수 있겠는 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고맙게도 그 답을 줍니다.
첫째, 깨어 있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온갖 환상이 걷힌 참으로 본질적 투명한 진짜 삶을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참으로 늘 새롭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삶입니다. 깨어있음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늘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깨’자 돌림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어제에 이어 주님은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바로 주님은 유비무환의 자세를 주문합니다. 비단 주님의 도래만이 아니라 언제 뜻하지 않은 죽음이나 사고나 병등 불행이 닥칠지 모릅니다. 이때에 대비하여 늘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을 인생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이 죽음입니다. 선종의 죽음에 대한 최상, 최고의 준비는 한결같이 오늘 지금 여기 집중하여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둘째, 분수에 맞는 삶,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참으로 제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이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이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 주님의 종입니다. 오늘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각자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주님은 물론 형제들을 감동케 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자세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끝까지, 한결같이 자기 책임을 다할 때 구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이들의 특징이 바로 책임감입니다. 착해서, 사랑이 많아서 구원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책임을, 소임을 다할 때 구원입니다. 저도 수도 형제들이 농장에서, 주방에서, 문간에서 말없이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시로 감동하고 회개하고 보고 배웁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도 의미심장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은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몰라서, 보이지 않아서 못하거나 하지 안했을 때의 무지로 인한 경우는 책임이 많이 경감되겠지만, 알면서 고의적이고 태만함으로 책임을 다 못했을 때 결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그 책임이 더욱 엄중함을 일깨웁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청구하신다.”
그릇의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르듯 사람의 모양과 크기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한없이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다리며 건들이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평등한 종들입니다.
형제들과 비교할 것 없이, 형제들에게 요구함이 없이, 자기 그릇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묵묵히 다하는 것이 구원과 행복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 주님의 종다운 처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최선을 다해 힘껏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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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종인지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집사는 압니다. 주인이 왜 자기를 다른 종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불렀는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주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실하고 슬기롭게 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맡겨진 종들에게도 유익을 주겠지만, 거기에 더해 차츰 주인을 닮아갈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 가장 큰 선물일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 6,17-18)
복음에서 보듯, 집사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의 뜻을 토대로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재물과 육의 질서에 묶여 살아갔고,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사고하고 행동했습니다. 단죄와 심판이 앞섰고 쾌락과 욕정에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드높였지요.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반면 은총 아래 있는 의로움의 종은 다릅니다. 복음 속 주인의 바람처럼 그는 맡겨 주신 다른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일이 바로 주인의 일이기 때문이고, 주인이 그걸 바라시니 순종할 따름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율법과 전통의 그늘 아래서 태어나 숨 쉬고 교육받으며 살아온 구약의 백성 중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말하자면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문자를 넘어서 의미로, 형식을 넘어서 정신으로 모험을 시작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 하셨듯 단죄가 아닌 포용으로, 심판이 아닌 용서로 맡겨진 이들에게 헌신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주인의 자비와 사랑을 따라하다가 닮아가고 닮아가다가 끝내 하나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의로우신 주인 마음에 순종하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주인께서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느닷없이 오시더라도 사랑의 상태에 머물러 사랑을 살고 있다면 그 해후의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런지요! 은총 아래서 의로움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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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
'많이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어제 복음은 '깨어있어라.'는 말씀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12,41)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12,42-43)
오늘 복음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12,39-48)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집사에게, 주님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 주님의 일을 많이 맡은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 대상은 우선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아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신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재물이든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든 주시는 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님이신 주인의 뜻을 잘 알고,
이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종입니다.
주인의 뜻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났는데, 그 결정체가 바로 너와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육화'이고, '예수님의 땀흘림'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묵주기도는 이 신비 전체를 기억하는 기도이고,
이 신비 안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이 신비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뜻을 잘 이행하는
충실한 종, 슬기로운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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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이라는 말 그대로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었습니다(시편 122[121],1 참조).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또한 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는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품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
바로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의로움의 도구”답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행복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전을 향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고
또 성전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성전은 ‘기쁨의 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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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어제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41절) 물었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의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된다면, 그런 종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 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이라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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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8)
모든 소임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소임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나누는 것이 기도이며
우리의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것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것은
생활의 무게인
십자가까지
끌어안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울 수 없고
희생하지 않고서는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받고 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참된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우리 삶에
충실하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시고
맡기신 소중한 관계를
잘 돌보는 충실한
믿음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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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종말과 재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2) 그런데 그날과 시간은 말할 수 없다는 것.
3) 그렇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할 준비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는 날과 시간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 않게 하려면
빛 속에서(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는,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는, “지금 ‘죄와 악’ 속에서
살고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는,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합시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2-48).”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도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슬기로움’(지혜)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쾌락에만 빠져서 사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결국 ‘그날에’ 어떻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세속의 재판처럼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의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날 어떻게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이고 ‘집사’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집사’이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은 ‘불충실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을 얻으려고 지금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44절의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46절의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불충실한 자들’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과 길을
막지 않으셔도 그들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시는 분인데,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말은,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충실한 자들이
아무 준비 없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의 뜻은,
“신앙인이라면 내세와 심판을 의식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라.”입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경고’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호소’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산 사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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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향한 충실성과 사랑의 책임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루카 12,48)
오늘날 사라져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장인(匠人) 정신입니다. 장인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변함없이 헌신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충실히 몰두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한 충실성과 헌신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의주의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빨리 변하는 현상 때문인지 신앙생활마저도 ‘대충주의’에 젖어가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루카 복음사가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12,42-46)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시켜 전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뜻을 잘 알아 합당한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은 일시적으로 흉내만 내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늦어질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않은 때’(12,4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12,46)에 오실 수도 있기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12,42-44)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충실히 돌보는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주님이 늦게 오시는구나 하며 하느님 백성을 잘 돌보지 않는 불충한 지도자는 ‘절단을 내버리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12,46).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를 하지 않거나 주인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몰라서 행하지 못한 평신도들보다 더한 책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12,46-47).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12,48) 하고 말씀하시며 지도자들의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의 영혼을 돌볼 책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이 책무는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책무로서 그 어떤 핑계나 다른 일 때문에 미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시는 주님을 맞을 합당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무가 교회지도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축성과 사제 축성, 수도 축성 등을 통하여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주님께 되돌리며,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봉헌과 하느님의 축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되고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면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항구함과 깨어있음, 충실성, 책임을 지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온갖 현상들에 휘둘리지 말고 변함없이 주님을 의식하고, 깨어 주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항구함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매를 맞을 것입니다.
또한 충실함은 주님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도 집중하고 몰입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영혼 구원이야 얼마나한 충실함이 필요하겠습니까. 충실함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깃든 인내야말로 충실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대충주의와 편의주의, 그리고 변덕과 현상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충실한 종으로서 사랑의 책임을 다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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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는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조직이 성공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최고 책임자는 물론이고 구성원 모두가 지녀야할 한 가지 마음가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의식’입니다.
‘주인의식’은 말마디 그대로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회사 일이지만 마치 내 일처럼 온갖 정성을 다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단체의 기물이지만 마치 내 물건처럼 여기며 아끼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입니다.
내가 소속된 조직의 구성원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는 널리 알려진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창 건축 중인 공사장을 지나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3명의 인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당을 받으니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벽돌을 쌓는 중이요.”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때로 주인의식이 지나치게 되면 주인행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인의식과 주인행세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의 유무입니다.
주인의식은 주인으로서의 당당함과 함께 주인으로서의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주인행세에는 당당함과 요구만 있지 겸손이나 배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기롭지 못한 불의한 집사가 지녔던 태도는 100% 주인행세였습니다.
그는 분명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낱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일정 부분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겸손과 배려의 덕이 전혀 없었던 불의한 집사는 갑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쥐꼬리만한 권한, 별것도 아닌 작은 완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우쭐해지면서 주인행세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잠시 맡긴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 인양 흥청망청 썼습니다.
하인과 하녀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주인행세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던지는 경고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46절)
사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질상 그 어떤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 사람의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주고 쓸쓸히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막대한 돈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 돈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 나이를 먹습니다.
80,90, 100... 그때 되면 천만 원짜리 수표를 손에 쥐어줘도 이게 돈인지 종이인지도 구별 못하게 됩니다.
애써 모은 돈들은 모두 자동으로 누군가의 소유로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변치 않는 든든한 주인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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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잘하는 걸 원하실까, 끝까지 하는 걸 원하실까?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종, 특별히 사제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제들이 깨어있는 방식은 이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사제에게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그러니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양식은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성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강론준비나 교리나 성경과 같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질은 떨어지더라도 제때에 말씀을 전하는 게 더 좋을까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질적인 것보다 ‘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질 좋은 강론은 준비하다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때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저절로 질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꾸준히 양식을 내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서 우울감이 오고 그래서 또 우울하게 만들어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영화 ‘비버’(2011)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월터 블랙과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냥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 직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월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망해가고, 가족 관계도 파탄이 납니다. 자살도 실패할 정도입니다.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고 아이디어가 보이기 시작해 회사도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영화에서는 월터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바로 자기 손에 끼어 있던 비버 인형과 대화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며 자신을 비버로 여깁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비버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줍니다.
사람들은 월터와 이야기하지 않고 월터의 비버와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비버처럼 여기는 것은 분명 자기비하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대치보다 못 미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버로 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비버가 하는 모든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결과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비버는 기껏해야 나무때기로 작은 댐을 만들면 그것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비버라고 여기면 자기비하입니다.
결국, 월터는 비버 때문에 자기 팔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는 우리 자신이 정말 비버보다 더 나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러면 그냥 작은 일을 해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겁니다.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이빙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미국이 금메달을 따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합니다.
7주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때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얼마큼 큰 부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3년간의 준비 과정을 수포로 돌릴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존감이 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맨밥을 주시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반찬이 없어 맨밥에 물 말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둥둥 떠 있는 쌀벌레들을 제거하고 맨밥을 먹자니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물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소위 총각김치를 찾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그렇게 주는 것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굶기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양식을 거르지 않고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굶기지 않으신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완벽히 준비된 양식을 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때에 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존심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때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함을 도모하다가 시작도 못 합니다.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건 그렇게 하는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양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실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님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실망스럽고 우울하고 멈추고 싶다면 생각하십시오.
그건 교만함 때문이란 것을. 예수님은 제때에 양식을 주라고 하셨지 그 질적인 면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고 제때에 양식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죽이든 밥이든 깨어있음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걸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는 주님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들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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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 것.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여기서 선함과 악함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함께 하며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이는 선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살지 않는 이는 악합니다.
선함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라면
그는 성실과 인내와 겸손으로서
언제나 주님이 오실 날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한 번의 요행이나 반성이 아니라
삶의 변화이며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내적 회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들어왔고 믿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며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 환난과 고난에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나 하나만을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많이 주신 사람
곧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더 많은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고 준비하고 있기에
그는 도둑이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며
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을 전하라는 뜻이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을 깨닫고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을 살면서도 영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내가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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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0.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6,12-18)
"형제 여러분,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12)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13)
로마서 6장의 전반부인 1-11절은 사도 바오로가 성화(聖化)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죄에 대한 죽음을 주제로 논증했다.
즉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에 대해 죽은 자는 다시는 죄에 머무를 수 없으며, 마땅히 의로움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 이어지는 후반부인 로마서 6장 12-2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얻어 입은 성도로서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인 거룩한 삶에 이르는 성화(聖化)를 다시 촉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앞의 6장 1-11절과 내용상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앞은 이론적 성격이 강하고, 뒤는 실천적 권고의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중에서 로마서 6장 12-14절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새 생명안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바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죄에 대해 죽고,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못하는 새로운 신분이 된 성도에게 옛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권고는, 새 생명을 얻은 자유인으로서의 특권과 권리를 향유하라는 아주 적절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지배하여'로 번역된 '바실류에토'(basilleueto; reign)는 원형 '바실류오'(basilleuo)의 현재 명령형이며, 기본적 의미는 '다스리다', '지배하다', '왕노릇하다', '왕이 되다'등이다.
강한 금지 명령어 '메'(me; not)과 더불어 쓰였는데, 이것은 죄가 성도들에 대해 그 지배력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다시 다스리려고 계속 유혹할 때 새 생명으로 사는 자유인의 특권을 이용해서 그 지배(다스림)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 성도들은 죄의 요구를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죄에게 일체의 기회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게 하거나 통제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은총을 헛되이 받은 것이다.
죄는 이미 상실한 자신의 통치 영역을 회복하고자 안간 힘을 쓸 것이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를 '헤 하마르티아'(he hamartia; sin)로 표현하면서 하나의 위격을 가진 실체처럼 나타낸다.
개는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주워서 먹고, 돼지는 그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어도 다시 더러운 진창에 뒹군다(2베드2,21).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비단 개나 돼지만의 문제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도 그렇게 개나 돼지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여전히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의 지체를 마음대로 지배하게 한다면, 이것은 자유인이 다시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의 죽을 몸을'
이것은 단순히 장차 소멸하여 없어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육신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장악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본문에 '몸'으로 번역된 '소마티'(somati)의 원형 '소마'(soma; body)가 전인(全人)을 나타내는 데도 쓰이며, 특히 죄와 죽음에 종속된 사람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로마6,6; 8,13; 콜로2,11).
본절에서도 죄가 지배하는 인간의 상태가 바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죽음'이란 표현과 더불어, 죄와 죽음에 종속된 인간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몸' 즉 '소마'(soma)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이것은 우리 성도중에 누구든지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통제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욕망에 순종(복종)하게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욕망'과 '순종'을 나타내는 두 단어를 좀 보자. 먼저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티미아이스'(epithymiais)는 '사욕'(邪慾), '동경'등을 의미하는 '에피티미아'(epithymia)의 여격복수이다.
초기 그리스도 문학에서는 '에피티미아'라는 단어는 중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가 후에 윤리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것이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망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아와'(awa)와 '하마드'(hamad)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① 도덕적으로 평범한 욕망(신명12,20), ② 칭찬할 만한 욕망(창세31,30; 이사52,8), ③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민수11,4) 등을 나타낸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쓰인 적이 있으나,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피티미아'를 인간을 지배하는 죄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느님을 떠나서 죄의 지배 아래 처한 인간의 육체 속에 휘몰아치는 힘이다. 이 '에피티미아'는 모든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성적 욕망, 물질적 향유, 타인의 재물을 탐내는 것 등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육체의 욕망은 언제든지 성령의 욕망과 대립되기 때문에, 죄가 자신의 몸을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이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순종'으로 번역된 '휘파쿠에인'(hypakuein; you should obey)는 휘파쿠오'(hypakuo)의 현재 부정사이며, 기본적으로 '말을 듣다', '복종하다', '따르다' 등을 의미한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려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정욕, 혹은 악한 정욕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
죄의 노예였던 이전에는 맞설 힘이 없었지만,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죄와 관계가 끊어진 이제는 충분히 맞설 수 있고, 또 물리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간디, 슈바이쳐 등, 그들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착각하게 한다. 그 착각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구원을 주지 못했기에~그리스도교의 해악(害惡)이 된다는 것이다. 간디, 슈바이쳐 처럼 훌륭하게 착하게 살자~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善, 義,그 구원의 의로움을 찾고, 깨닫고 얻어서 하자는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루카12,39-48)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나의 주인을 성령으로 준비하고, 삼고 의탁하는 사람은~ 그 성령께서 자기의 집인 나를 도둑이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 보호자 성령께서 신랑,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 도둑으로부터 지켜주신 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둑은 누구를 가르키는 것인가~
(요한10,1.8)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하늘의 문이신 예수님, 그분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겠다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보다 먼저인 것이 도둑이며 강도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늘의 의로움이신 예수님이 아닌 그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율법, 곧 제사와 윤리의 행위로 들어가려는 것이 도둑이며 강도인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 정해진 양식, 충실하고 슬기로운 사람만이 아는 양식이다.
(창세1,29)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 씨, 사람이 먹어야 할 정해진 양식이다. 짐승에게는 풀을 양식으로 주셨다. 씨(제라)는 후손을 뜻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한다.(마르1,14)
그 후손,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요한1,14 갈라3,16) 씨가 땅을 위해 떨어져 죽어 맺는 열매(양식), 곧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하나 되시고자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하느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정해진 양식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짐승들의 먹이통(구유)으로 오신 것이다.
(루가2,11-12)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인간들은 풀을 먹는 짐승이었다는 것이다.(이사40,6-8참조) 그러니 그 예수님의 길(씨)이 아닌 인간의 뜻, 그 길(풀)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그 하느님의 뜻, 말씀을 훔치는, 헛되게 하는 강도요 도둑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다 인간의 생각, 뜻을 보태고, 뺀 그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낸 양식이라면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한 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요한 묵시록에~
(묵시록22,18-19) 18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 그러니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30,8). 기도하며 그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양식만을 준비하여 이웃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사람은,~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우리 육의 죽음으로 먼저 온다.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시간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 하늘의 진리를 청하여 받고, 찾아 얻고 하여~ 그 받고, 얻는 진리를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착한일이다.
간디도 슈바이쳐도 하지못한 착한(善)일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아멘.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2,39-48)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39~40)
루카 복음 12장 39절과 40절은 도둑이 올 때를 대비하는 집 주인의 비유이다.
여기서 '도둑'을 가리키는 '클렙테스'(kleptes; thief)는 폭력을 동반하여 공개적으로 물건을 약탈하는 '레스테스'(lestes)와는 달리 '몰래 물건을 훔치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도둑'은 아무도 그 시기를 모른 채 비밀리에 오시는 재림하시는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기서 '몇 시에'에 해당하는 '포이아 호라'(poia hora; what hour) 역시 40절의 '생각하지 않은 때에'와 대비하여 사람의 아들(人子)의 오심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때에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알면'에 해당하는 '에데이'(edei; had known)는 '오이다'(oida)의 과거 완료형으로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본문은 가정법 조건을 나타내는 '에이'(ei; if)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주인이 그 시기를 미리 알아 도둑을 막는 일은 단순히 가정적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이 구절은 40절에서 제시되는 대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는 역설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자기 집을 뚫고 들어 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에서 쓰인 동사 '디오뤽테나이'(diorychthenai; to be broken through)의 기본형 '디오륏소'(diorysso)는 '~을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dia)와 '파다'는 뜻의 동사 '오륏소'(orysso)가 합성된 것으로 '~을 통하여 뚫고 들어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당시의 집들은 흙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도둑이주인 몰래 담을 뚫고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새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은 불변사 '안'(an)은 본문 앞에서 사용된 가정법의 구절과 연관하여 그 결과로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원문은 불변사 '안'(an)을 사용해서 잡주인이 도둑이 언제 올지를 안다면, '항상 그리고 당연히' 그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 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지킬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욱 깨어서 준비해야 할 것임을 교훈한다.
이제 40절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를 살펴보면, 여기에 쓰인 동사 '기네스테'(gynesthe; be)는 '기노마이'(gynomai)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어떤 상태에 계속적으로 있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토이모이'(hetoimoi; ready)는 '준비된'이라는 뜻의 형용사 '헤토이모스'(hetoimos)의 복수형으로서 '기네스테 헤토이모이'(gynesthe hetoimoi)는 '계속적으로 준비하고 있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계속적인 준비'에 그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39절의 도둑이 침입할 시기를 알고 있는 집주인과 대조하여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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