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3. 04;30 22도
거대했던 태풍 '카눈'이 지나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잼버리(Jamboree)도 지나갔다.
그리고 시원한 새벽이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열흘 넘게 병치레를 하던 중 입추(立秋), 말복(末伏)이 지났고,
그러고 보니 처서(處暑)도 열흘밖에 남지 않았구나.
입원과 퇴원, 반복되는 통원치료, 무리를 하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스테로이드'라는 약물에 취해 자리에 누워 기운을
못 차린 지 11일째,
시원한 바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앞산에 오른다.
선탈(蟬脫)을 한 매미, 풀숲에서 숨죽였던 귀뚜라미가 일제히
떼창을 하자 오른쪽 귀는 메아리와 공명(共鳴) 현상이 심해
진폭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슬에 젖어드는 바짓가랑이에서 시원한 기운이 올라온다.
간밤에 내린 비를 맞은 바랭이, 애기나리, 서양등골나물의
잎사귀에 매달린 물방울이 영롱하게 빛난다.
최근 돌발성 난청이 시작되었고, 혹시나 하는 우려에 이어폰
없이 폰의 볼륨을 살짝 올리자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 나온다.
[ ♬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
나는 예전 내가 올랐던 성산 일출봉과 지리산 일출봉을 그리워
하고,
북한산 월출봉, 원주 감악산 월출봉을 그리워하는데,
이 곡을 작곡한 장일남 선생은 다른 일출봉과 월출봉을 그리워
했나 보다.
제주도에서 목포로 떠난 남자는 월출봉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는 제주 일출봉에서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애틋한 사랑을 그린 노래를 조용히
들으며 산길을 걷는다.
이어서 그가 작곡한 '비목', 그리고 교향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연속으로 듣는다.
< 박주가리 >
05;18.
5시 18분이 되자 밤새 산길을 지키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그리고 매미와 귀뚜라미도 소리를 죽였다.
잠시 후 거칠었던 나의 숨소리가 진정이 되자,
산길가 개골창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침묵을 지켰던 개구리, 맹꽁이도 일제히 목청을 높인다.
잠깐 침잠(沈潛)에 빠졌던 숲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먹통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내 오른쪽 귀의 청각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걸 느낀다.
06;00
산길을 벗어나 개활지로 나왔다.
하늘엔 먹구름이 요란스럽게 지나간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질 모양이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이 왔을까.
이제부턴 그냥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이 흐르는 걸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걸까.
동편하늘 높이 솟으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적란운(積亂雲) 뒤로
가을은 어디선가 오고 있고, 어쩌면 이미 내 곁에 와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밤공기, 새벽공기가 서늘해지더라도
나는 가을을 기다리련다.
2023. 8. 13.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