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남 도 국
아버지, 南자 仁자 守자, 이름 석 자 부르기조차 부담스럽고 높고 존경스러운 우리 아버지, 1899년 음력 12월 일제 때에 태어나 1974년 8월, 76년을 사시고 운명을 달리하신 우리 아버지, 집에서 부르는 존함 永實, 정식으로 학당이나 학교에서 배운 건 없지만, 어지간한 한글과 계산법을 불편 없이 터득하고 실천하며 살아오시며, 일제의 압제와 8.15 광복, 6.25 동란, 5.16. 군사 혁명 등 나라의 질서가 문란하고 어수선한 세상을 곧고 성실한 자세와 착하고 속일 줄 모르는 근면한 농부로, 배고프고 고달프고 뼈 아픈 시대를 뚝심으로 인내하며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사람은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잘살 수 있다” 는 신념을 손수 실천하며 슬하의 6형제 7남매를 키우고 양육하며 오셨다.
농사 외 다른 살아갈 방법이 없는 강원도 산골의 한 작은 마을에서 도시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북쪽 저 먼 곳에 많은 사람이 사는 서울이, 남쪽에는 부산이 있다는 정도만 들어 알고 살아오셨으며, 정기 노선 버스도 기차도 배도 다니지 않는 벽지 산골에서 오직 땅만 파고 심고 가꾸며 목숨을 유지해 오신 티 없이 순수한 한민족의 정신을 이어받은 어른이시다.
농사일만으로는 자급자족이 부족하여 아버지는 어느 날 미리 정해진 동료들과 함께 동해에서 잡아 말린 건어물을 어시장에서나 어촌에 가 사서 다음 날쯤 보부상 보따리에 짊어지고, 주먹밥을 끼니로 준비한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과 짚신을 신고 높고 험한 태백산과 골짜기의 깊은 물을 이틀이고 사흘이고 걸어서, 산 너머 먼 봉화, 영양 지역의 동네를 찾아가 삼베나 산 약초 등을 물물 교환하고, 갔든 길을 다시 돌아오면, 삼베와 무명은 우리 엄마와 형수들이 길쌈을 해서 가족들의 의복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산 약초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영양식으로나, 동네 무면허 한의사에게 맡겨 보약으로 둔갑하여 기침과 몸보신을 하며 살아오셨다.
우리 아버지를 따라 우리 형님들 네 분은 땔감 나무하러 지게 지고 먼 산에도 오르내렸고 사래 긴 논밭 일구며 힘든 일 마다하지 않고 살아온 땜에 우리 집은 그래도 굶거나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일은 피하며 살아온 것이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또 가솔들의 목에 풀칠이 끊어지지 않도록 소 장사하며 동네와 이웃의 송아지가 있는 집을 찾아가 사서 시골 5일장에 내다 팔아 어떤 때는 짭짤하게 이윤을 남기고 기뻐하시던 일을 기억한다.
한글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으신데, 울진 시골집에서 아침 3시 도보로 30리 길을 걸어 울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완행버스로 대구까지 오고, 동대구역서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서 또 호남행 완행열차를 갈아타고 익산까지, 여기서 또 군산행 열차를 이용하여 군산까지 혼자서 열다섯 시간 넘도록 안전하게 찾아오시는 걸 보면 우리 아버지 아주 지혜로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육체로 하는 일밖에 모르는 우리 아버지, 연세가 70이 되니 노동일은 다리와 허리가 아파 못하시겠다며 봄철이면 막내가 사는 군산에 오셨다. 기침 멈추는 약, 허리 아픈 약 사 달라며 며느리한테 요구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말씀하시든 우리 아버지, 그렇게 즐겨 드나드시든 군산 아들 집을 두 해만 다녀가시고, 연세 70을 훌쩍 넘으니 아들 집도 발걸음을 멈추시고 호흡이 가쁘고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아 못 오신다는 소식만 전해 왔다.
추석을 나흘 앞둔 1974년 음력 8월 11일, 멀리서 사는 아들은 아버지의 운명을 지키지도 못한 채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시고, 미국에 살고 계시던 큰아들이 오는 날까지 기다려 7일 장으로 행상에 실려 운구되어 동네 앞을 떠나시며 한 많은 아버지의 역사적 발자취를 처량한 노래로 남기고 마을 앞 소골 산 정상에 안치된 지 50년이 되었다.
며칠 전, 우리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다. 동해안 수평선 저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곳에서 아버지 얼굴이 또렷한 분이 손을 높이 들고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더 가까이, 100미터, 50미터, 30미터, 10미터쯤 가까이 다가오실 때 나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 소리 지르며 가까이 가 손을 잡았는데, 내 손에는 아버지의 손 대신 이불 모서리가 쥐어져 있었다.
50년이 지난 세월, 외람되나마 단 한해도 난 아버님 묘소를 외면해본 적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살았을 적 섬기지 못한 불효에 용서를 구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시는 동안 나는 우리 아비지 산소에 제초하고 돌보는 일, 사람을 사서라도 책임지고 보살피고 관리해 가고 있다, 아버지의 귀한 교훈 “사람은 정직하고 근면하게 일하며 살아야 잘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내 인생의 귀한 교훈으로 믿고 실천해 온 것을 감사하며, 우리 아버지 오늘도 고통 없고 눈물 없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계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