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에서 ‘환대(Hospitality)’는 단순한 예절이나 친절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자 신앙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윤리입니다. 크리스틴 폴(Christine D. Pohl)의 명저 『환대 목회(Making Room)』,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 앙리 나우웬(Henri Nouwen)의 영성 신학, 그리고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사유를 엮어 성경 속 환대의 원어와 깊은 층위를 짚어봅니다.
1. 성경 원어로 보는 환대의 본질
구약: 거류민(게르)을 향한 하나님의 기억
게르(Ger, גֵּר): 나그네, 이방인
구약에서 환대의 대상은 주로 권리가 박탈된 ‘게르’입니다. 레위기 19장 34절은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게르)을 본토인처럼 여기며 그를 너희 자신처럼 사랑하라(아하브)”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의 근거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었음이니라”는 집단적 기억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환대는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근본적 결핍과 해방을 상기하는 ‘정체성적 의무’입니다.
마비르(아브라함의 영접, 창 18장)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서 세 나그네를 맞이할 때 몸을 땅에 굽히고 달려나가는 행위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을 내어주는 고대 근동의 급진적 환대를 상징합니다.
신약: 낯선 자를 향한 사랑
필록세니아(Philoxenia, φιλοξενία)
신약에서 ‘환대’를 뜻하는 대표적인 헬라어로, ‘사랑/우정’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낯선 자’를 뜻하는 크세노스(xenos)의 결합어입니다(롬 12:13, 히 13:2, 벧전 4:9).
오늘날 이방인 혐오를 뜻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의 정확한 정반대 지점에 위치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에서 쓰인 단어가 바로 이 필록세니아입니다. 성경적 환대는 끼리끼리의 친목(Philia)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타자(Xenos)를 나의 영역 안으로 들이는 행위입니다.
프로슬람바노(Proslambano, προσλαμβάνω)
로마서 15장 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프로슬람바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에서 쓰인 동사로, ‘자신의 품이나 영역 안으로 기꺼이 끌어안다’는 뜻을 가집니다.
2. 신학적 층위: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성찬적 교제
하나님의 근원적 환대(Creation and Grace)
미로슬라브 볼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간을 창조하신 행위 자체가 ‘타자를 위한 환대’였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자신을 열어 죄인(원수 된 타자)을 품는 궁극의 포용(Embrace)입니다.
숙주(Host)와 손님(Guest)의 전복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환대의 질서를 뒤흔듭니다. 예수는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Guest)로 오셨지만,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참된 주인(Host)이 되셨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식탁에서 떡을 떼실 때 비로소 드러나셨습니다(눅 24장). 성찬(Eucharist)은 신자가 하나님 식탁의 손님으로 초대받아 환대를 경험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호스트가 되는 성례전적 순환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현존
마태복음 25장 35절(“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에서 예수는 가장 연약한 자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크리스틴 폴은 *『환대 목회』*에서 교회가 주변부의 사람들을 소외시킬 때 스스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3. 인문학적·철학적 통찰: 타자성과 무조건성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무조건적 환대'와 아포리아
데리다는 환대를 뜻하는 hospitality 안에 ‘적대(hostility)’와 ‘주인(host/hospes)’이라는 어원이 공존함을 지적합니다. 주인 행세를 하며 조건을 거는 순간 환대는 통제와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데리다가 말한 계산 없는 순수한 ‘무조건적 환대’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식탁에 부르라는 예수의 가르침(눅 14:12-14)을 통해 이 불가능성을 현실의 윤리로 요청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는 타자의 벌거벗은 얼굴, 상처받기 쉬운 고통의 얼굴이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호소를 던진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의 '고아, 과부, 나그네'는 바로 이 절대 타자의 전형입니다. 이들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Hineni)"라고 응답하는 책임 윤리가 바로 성경적 환대의 본령입니다.
앙리 나우웬(Henri Nouwen)의 '적대감에서 환대로'
나우웬은 영적 여정을 ‘적대감(Hostility)에서 환대(Hospitality)로의 전환’으로 정의했습니다. 환대는 타자를 개종시키거나 내 입맛대로 뜯어고치는 자리가 아니라, 타자가 자기 자신으로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간(free and friendly space)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환대는 여유 있는 자의 너그러운 시혜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노예였던 기억,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기억을 품고, 낯선 자(Xenos)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나의 경계를 깨뜨려 식탁을 나누는 급진적인 제자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실천해야 할 환대의 구체적인 대상이나 현장(예: 난민, 소외 계층, 세대 갈등 등) 중 특별히 더 깊게 조명해보고 싶은 영역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