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의 중심 인물은 메시야의 뿌리요,
그 메시야의 예표인 다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행적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 그 통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왕의 통치로 계시한 다윗의 삶은
구약의 성서지대, 그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였고
종말론적인 다윗의 통치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야 묵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었던 다윗 곁에 모사 아히도벨이 있었으니
아히도벨의 모사는 사무엘서의 저자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고 할 정도로 탁월하였습니다.
☞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삼하16:23)
물론 다윗 곁에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비롯하여 나단과 갓 선지자가 있었지만
아히도벨의 모사는 다윗에게 가장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란과 아히도벨의 배반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맨발로 도망하는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 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15:30)
다윗의 감람 산 길은
가장 가까운 아들과 신하의 배반으로 말마암았습니다.
탐욕적 권력 찬탈은
일찌기 성서지대에서 다윗을 통하여 아들과 신하와 그 백성의 배반을 기록하였습니다.
압살롬의 모사가 된 아히도벨의 모략으로 거사는 성공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는 압살롬의 새 하늘이 되었습니다.
모사꾼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분노를 자극시켜 백성의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예루살렘 궁에 남은 다윗의 후궁 열명을 겁탈하는 계략을 펼쳤습니다.
아비의 여자를 범한 파렴치한 죄악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빌하를 범하였고 이로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복을 상실하였습니다.
아비의 후궁을 범하는 천인공로할 악행을 저지르고
도망간 다윗을 추살하기 위한 아비도벨의 모사는 가히 위협적인 추격대의 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치고 다윗의 친구 후새의 계략을 받아들였고
아비도벨은 낙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추살할 수 있는 확실한 자신의 계략이 받아들여 지지 않은 것은
곧 압살롬의 죽음을 예견하였고 다윗에게 피살당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한 때는 다윗의 모사로 그 이름을 떨쳤고 또 압살롬의 반정까지 성공하였으나
아히도벨의 최후는 스스로 묵매어 죽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종말론적인 다윗 왕인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된 가룟 유다는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사탄의 미혹을 받았고
예수님을 죽일려는 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 그 기도의 장소에서 팔아 넘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배반으로 붙잡혀 채찍에 맞고 십자가 형틀에 처형될 것을 보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묵매어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마27:1-8)
다윗의 하나님 나라를 배반한 아히도벨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배반한 가룟 유다는 죄를 짓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그 죽음이 자신의 죄를 씻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지만
그 목숨의 값은 일생동안 지은 자신의 죄를 씻지 못하고 심판의 죽음에 이릅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5-27)
오늘은 죽음의 건너편에서 죽음의 자리에 놓인
쇠고기 국밥과 잔치 국수가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며 잔치 국수 먹는 사람들은
원수에 대한 성서지대의 잠언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잠17:5)
☞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7-20)
☞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
☞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