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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4) 아름답고 겸손한 신념의 삶
가톨릭 신앙 교육과 문화는 왜 윤리적 인간 잘 길러내지 못할까
나이듦과 어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시청했다. 내친김에 그에 관한 책 「줬으면 그만이지」도 사서 읽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많은 사람에게 꽤 깊은 반향과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과 신문 칼럼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철학과 신념을 지키면서, 조용하고 겸손하며 올곧은 모습으로, 전 재산을 ‘대가 없는 나눔’과 ‘간섭 없는 지원’에 사용할 수 있었는지.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고 읽은 후, 경이감과 경외감이 교차했다. ‘일상의 성인’, ‘옆집의 성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성숙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다. 어른이 부재하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어른이 부재할까. 노년의 시간까지 자기 삶을 견결하게 지탱하는 일이 불가능한 세상이어서일까. 돈과 힘과 지위를 향한 경쟁과 인정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고, 물질과 감각의 쾌락과 향유를 향한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며 쉬이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일까. 물질적 향유의 욕심과 인정 욕망은 늙어가도 식지 않는다. 생의 굴곡진 여정에서 변절과 타락과 퇴행의 모습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견한다.
오늘의 세상은 어른을 만들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어른이 되기 어려운 사회 현실 속에서 오히려 더 무결점의 인간, 완벽한 성인(聖人)을 요구하고 있다. 무결점의 인간은 없다. 완벽한 성인도 없다. 삶의 큰 흐름과 방향을, 흔들리는 여정 속에서도, 애써 노력하며 견지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졸 학력의 한약사,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았던 사람, 이름과 지위를 탐하지 않았던 사람, 마지막까지 다 나누고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사람. 그의 약력과 삶의 궤적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이름과 지위를 쫓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인정투쟁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든지 명예를 얻고 지위를 가지게 되면, 놀랍도록 무서운 정보의 세상에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모함과 왜곡의 칼날 앞에 마주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건강하고 올곧은 신념을 간직하고 그 신념을 한결같이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평생 한약방의 일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교육, 언론, 문화와 예술, 시민운동, 평등과 여성 인권의 문제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그의 어떤 신념에서 기인되었을까.
사건과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신념을 갖게 할 수 있다. 사람은 교육과 문화를 통해 어떤 생각과 신념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어떤 특정한 사건과 경험이,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신념을 발생하게 하고 그 신념을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 될 수 있을까. 숱한 사건을 겪고 다양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화려한 교육 이력과 좋은 문화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사건과 경험, 교육과 문화라는 외부적 요소들은 사람의 신념과 태도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신념과 품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반응하고 응대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체현하는 여정에서 더 많이 형성될 것이다. “인생은 역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결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바꾸며 살 수 있다”(「줬으면 그만이지」)고 그는 고백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공적 배움의 기간은 짧았지만, 생의 여정 속에서 늘 주체적으로 배우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자세와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을 그에 관한 책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천적 신념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공부와 성찰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일까.
선순환
악이 전파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선도 전파되고 순환된다. 좋은 사람 곁에는 언제나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있다. 김장하 선생 주변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하고 인상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김장하 선생의 초등학교 동창 최관경 교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헌법재판관 문형배 판사, 선생을 세상에 알린 지역 언론인 김주완 기자. 그들의 삶 역시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김장하 선생을 닮아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들 역시 교육자, 법조인, 언론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선생들이었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김현지 PD와 김주완 기자가 전해 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는 다양한 공감과 반응을 불러냈다. 어떤 이는 선생의 삶 안에서 “인의에 충실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유교적 수신 윤리와 싸가지”에 대한 자기반성의 감응을 적었다.(문학평론가 김명인의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는 선생의 삶과 태도를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영민, 중앙일보 칼럼) 또 어떤 이는 선생의 이야기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사회에 대한 믿음,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 어떤 간계도 평범한 사람들을 영영 속일 수 없다는 믿음”을 읽어낸다.(위근우, 경향신문 칼럼)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수용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선생의 이야기가 자기반성과 성찰의 힘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고, 삶의 평범한 진실을 발견하는 교훈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 선택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선한 이야기가 선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할 뿐이다.
다시, 신앙의 신념
김장하 선생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우애’와 ‘세상의 형제애’의 진정한 본보기 같다. 그는 어떻게 형제애와 연대와 돌봄의 윤리를 내면화(신념화)할 수 있었을까. 신앙의 신념은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을 왜 잘 만들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 참여와 신앙적 사건들의 경험이, 우리가 받는 신앙 교육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문화가 왜 선생 같은 사람을 잘 길러내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와 신앙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윤리적 인간의 형성이 아니어서일까. 신앙이 윤리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신앙은 당연히 윤리적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보고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신념과 신앙 교육과 신앙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0) 시간, 시 읽기, 신념
참된 신념, 숱한 고통 견디며 진리와 옳음 따라 살려는 의지
시간 속의 상념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서 구획된다. 세밑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생은 반복의 여정이다. 연도는 달라지고 몸은 늙어가지만, 열두 달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소멸만이 우리를 이 달력의 순환에서 이탈하게 할 것이다. 벽에 새 달력을 건다. 반복과 순환의 삶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리추얼(ritual·의식)이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화두가 자주 출몰한다. 노년의 시간은 어쩌면 늙음과 죽음이라는 두 숙명에 응대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여정이다. 살짝 슬프지만 견디지 못할 일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간과 운명을 살아갈 뿐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덧없다는 애상과 정조가 가끔 찾아온다. 하지만 덧없음에 대한 느낌은 외려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에 대한 염려와 걱정도 없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며 운명주의자인 나는 허무라는 정서에 빠져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청춘도 아니고, 중년도 아니고, 장년도 아닌 노년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맥 빠지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생의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데. 노년의 시간 역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그저 제 생의 시간에 충실할 일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생각할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읽고, 산책하고, 공부하고, 탐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가. 신앙은 또 얼마나 큰 은총인가. 이 막막한 세상에서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고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다시, 시 읽기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은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때때로 시가 나에게 철학이고 신학이다. 시인들이 학자와 사상가보다 더 훌륭한 교사이며 예언자다. 시인들이 툭 건네는 말과 노래가 공감의 위로와 기쁨을 준다.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 장이 넘어가고/ 술 한 잔이 넘어갔다.// 목메지 말 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정현종 ‘벌써 삼월이고’)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과 늙음에 대한 그 어떤 철학적, 신학적 성찰보다 이 시가 더 깊은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겨우 쓸 수 있을 것 같아/ 두 마음은 왜 닮은 것인지// 무너진 꽃자리/ 약이 돋는다// 비로소 연한 것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허은실 ‘회복기 1’) 그저 이 구절들을 마음속으로 읊조리기만 해도 내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 있으면 나와보라고” 소리치면서 “그 시를 읽으면 죽어가던 것들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를 쓰고 싶다”(김상미 ‘시인 앨범 7’)라는 시인의 허장성세가 괜히 정겹고 위안이 된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많은 바람에 내 삶을 하나하나 증발시켜요/ 얼마나 편안하고 경이로운지/ 누워서도 앉아서도 다 들려요/ 깊은 바다에 얽힌 전설들/ … /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바닷가에서 살아요/ 매일매일 즐겁게, 내 피와 뼈들이 심해로 하얗게 가라앉는 걸 바라봐요/ 얼마나 아름답고 가혹한지.”(김상미 ‘또다시 바다, 바닷가에서’) 소멸로 향해가는 삶이라는 망망대해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평안함과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생의 역설과 신비를 시인에게 배운다.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손택수 ‘귀의 가난’) 늙어갈수록 마음을 더 다스리고 영혼을 더 수련해서 조금은 더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찼다.”(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누구나 다 늙고 죽어간다. 그래서 공감하고 나누고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늙음과 소멸의 여정 속에서 온전히 자신만이 견디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 또한 깨닫는다.
신앙의 신념
마음속에 정갈한 신념을 지니고 한 생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신념(이념)은 개별적 인간과 진리의 주체를 연결하는 매개다. 신념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연결된다. 신념은 진리와 옳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신념화는 ‘영혼과 몸 안에 있는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이며, 신념화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임의성과 가변성을 건너갈 수 있다.(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 참조)
신념은 확신이라기보다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다. 참된 신념은 무엇보다 제 생의 운명을 견디게 하고, 숱한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진리와 옮음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동된다. 물론 모든 신념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신념의 이름으로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살거나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를 억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다. 그때 신념은 흉측한 이데올로기가 되며 부정적인 의미의 교조주의자를 낳을 뿐이다.
진정한 신념은 자신에게는 견딤과 의지적 힘으로, 타자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태도로 작용할 것이다. 건강한 신념의 삶은 아마도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김연수 「다시, 2100년의 바르바르에게」) 노력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신념은 다양하다. 실존적 신념, 사회적 신념, 종교적 신념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힘을 가진 것은 종교적 신념일 것이다.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 주인공의 독백처럼, 모든 사회적 이념이 사라져버린 오늘의 세상에서 사람들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은 종교적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적 신념, 신앙적 신념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신념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신앙은 신념으로 표현된다. 신앙의 자리에서 신념이 수행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때때로 율법과 규범으로, 종교적 관습의 준수와 전례적 행위에 참여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된 신념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을 따라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타인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적 신념은 이념과 명제와 규범과 관습으로 우리 안에 자리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성령의 신비로 자리할 것이다. 신앙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4) 오래된 시간, 어머니, 시(詩)
자신을 위로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을 기억합니다
명절, 고향, 시집
시집을 사서 읽는 일은 나에게 일종의 의례(ritual)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시집들을 검색하는 일은 작은 즐거움입니다. 지난 9월 초에 세 시인의 신간 시집을 샀습니다. 문정희 시인의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정화진 시인의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입니다. 문정희 시인과 진은영 시인은 그들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거의 사는 편이었지만, 정화진 시인의 시집은 처음이었습니다. 시인 소개란에 적힌, “1959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라는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추석 명절 부근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향과 동년배의 여성 시인이 어떤 생각과 정서로 살아왔는지 궁금했습니다. 28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내친김에 그의 첫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와 두 번째 시집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를 함께 주문했습니다.추석 명절 동안 내내 혼자 있었습니다. 조용한 연휴 기간에 밀린 숙제들을 하며 틈틈이 시집을 읽었습니다. 정화진의 시집을 읽으며 고향, 어머니, 유년의 기억,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습니다. 1990년에 나온 첫 시집에서 시인은 “그 지난함과 캄캄한 세월의 강을 건너온 연로하신 어머니께 이 작은 시집을 올린다”고 썼습니다. “상주군 외서면 우산리 청산촌 근암댁 안마당에 익모초가 짙푸르다.”(‘나의 방은 익모초 즙이 담긴 사발이다’) 시 안에서 낯설지 않은 지명 하나 만나도 괜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사소한 연결 하나에서도 인연의 고리를 찾는가 봅니다. 시인이 고향을 떠나 자기의 생을 어떻게 견디고 어떤 시간의 무늬를 그리며 살아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물론 시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 전공자가 아닌 저는 시에서 미학적 측면보다는 삶의 물결이 그려내는 흔적에 더 마음이 머뭅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흐르는 세월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고향을 추억할수록 뭔가 더 막막해지는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기억하는 고향과 노년의 나이에 회상하는 고향은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옵니다. 노년에 기억하는 고향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이 아닙니다. 유년 시절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체적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저밋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세월의 폭이 그만큼 길고 멀다는 뜻입니다. 이 시차를 큰 폭으로 경험할 때 가끔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시절의 사진들을 게시하는 페이스북 사이트가 있습니다. 아,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그 시절을 지냈지 하는 사진들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옅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길고 먼 시차의 간격이 이상한 조급함을 낳습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많지 않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징징거리지 말고 의연하게 늙음을 수용해야 한다고 마음으로 늘 다짐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살짝 흐트러지는 자신을 봅니다. 늙어갈수록 더 많은 공부와 성찰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삶
여성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여성들은 세상을 어떻게 읽고 어떤 정서와 반응으로 살아가는지 유심히 살펴봅니다. 정화진 시인에게 강 하구와 바다의 풍경은 생의 흐름을 보여주는 주요한 이미지입니다. “저 강의 하구에 물컹거리는 무덤들의 바다가 있다.”(‘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강물은 첩첩이 결을 이고 하구 쪽으로 몸을 흔들며 나아갔다/ 바다는 한 장의 들판이다.”(‘쑥대머리 아득한 나무 장례식’) “모래톱의 흔적은 기다림이 주르륵 밀린 자리 같다.”(‘강변 그 세 겹의 무늬’) 누구에게나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고단하지만, 자신의 말과 글을 갖지 못한 우리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삶은 잊혀져 갑니다. “가엾은 어머니들의 생애가 밀려가 있는/ 뻑뻑하고 검붉은 육체들이 펄렁대는 강의 하구”(‘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나부끼는 바다’)였지만, “풍경의 외곽으로 여자들의 기구한 생애가 삭제된다/ 거무스름하게 거친 문장 사이 마모되기라도 한 듯”(‘고정된 풍경’)이 말입니다.
세상의 삶과 역사는 “늙은 여인들이 삭제된 풍경”(‘습지의 머위처럼’)처럼 보이지만, 생의 구석진 자리에서 제 생을 끌고 온 어머니(여성)들에 의해 세상은 유지되고 흘러갑니다. “비녀를 지른 듯한 여자들이/ 한 무리 부엌 아궁이 곁에서/ 우두커니 낱말이나 문장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불기도 구원도 없는 부엌을 지키고 있다// 수세미로 문지른 듯 줄무늬 투성이인 늙은 문장이 어눌하게 꿈틀대며 그 부엌문을 나온다.”(‘불완전한 문장’) 사실, 저의 신앙과 사제적 삶에도 어머니의 헌신과 기도가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머니가 지금의 제 나이 때에 무슨 생각과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갔을까 궁금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듣고 보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평범한 생의 사람이라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침묵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읽고 쓰는 삶
시인은 읽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정화진 시인 역시 읽고 공부하면서 그 긴 공백의 시간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시인은 섬세하고 정밀하게(‘정밀의 책’ 참조) 자기 삶을 읽고 공부합니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도처에, 그가 읽은 책과 글의 편린들이 가득합니다. 읽기는 공감과 변주를 통해 새로운 삶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그의 문장과 호흡이 내가 늘 사용하던 문장 위에 겹쳐”(‘무릎 위의 고양이’)지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라는 신형철의 문장은 “사랑은 발명되지 않았고/ 길게 연장되었지”(‘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어’)라는 표현으로 변주됩니다. 시인은 읽는 삶을 통해 “시간의 해일”과 생의 가벼움을 견뎌온 것 같습니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기록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정화진 시인은 “할머니, 저는 늘 잘 보이지 않는/ 저를 기록합니다”(‘불에 탄 어금니’)라고 고백합니다. 진은영 시인은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그러니까 시는’)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로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하늘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와 욕망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자신의 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신학도 세상과 삶을 정확하게 읽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합니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5) 연대, 시(詩), 성체성사
세상 슬픔과 아픔 공감하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 될 수 없다
혐오와 연대의 풍경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하고 악해질 수 있을까? ‘가로세로연구소’가 어느 전직 장관의 딸이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가 영상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의 고통과 힘듦마저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혐오 감정을 배설하는 통로로 삼고 있다. 추악한 일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 사회는 소수의 희생을 담보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편안함과 공리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궁지로 모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소수의 약자들에게 점점 더 무심하고 잔인해져 가는 오늘의 사회가 무섭고 슬프다.
양궁 국가 대표 선수 안산이 전장연에 후원금을 기부했다. ‘국가대표선수’라는 사회적 상징이 지닌 책임의 무게를 질 줄 알았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갖는 아름다움을 체득한 모습이었다.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 “저는 광주여대 초등특수교육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또 얼마나 분명하고 통쾌했는지. 늙은 내가 젊은 청춘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참다운 선생은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한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는 한 사회학자의 글을 읽었다. 사회 현상들을 섬세하게 통찰하면서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을 쓰는 학자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주일 커피 한 잔 값 3000원, 한 달 1만2000원으로 미얀마를 돕는 미얀마연대파주시민모임이 꼭 1년이 되었습니다. …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다른 곳을 돕더라도 고마운 일입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분들은 미얀마 호핀고아원을 계속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 세상은 일상의 사소한 자리에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연대하는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맙고 미안했다. 기억과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제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기억과 기록의 연대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픔과 상처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철규의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높이」를 읽었다. 첫 시집인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신철규 시인은 세월호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검은 방’)
그 슬픔의 깊이를 두 번째 시집에서 다시 저릿하게 기록한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 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심장보다 높이’)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은 여전히 세상의 상처를 기록하고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유적을 보면서 그는 또 이렇게 기록한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세화’)
그의 시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의 기록이다. 시인은 기억과 기록을 통해 슬픔의 사람들과 연대한다. 기억과 기록은 살아있는 시인을 죽은 희생자들과 연대하게 한다. 이처럼 기억과 기록은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기억과 기념의 연대
어느 주간지에서 한 인류학 연구자가 냉동인간에 관해 성찰하는 글을 읽었다. 그는 의례(ritual)의 매개적 의미와 가톨릭 성체성사의 제의적 의미에 대해 서늘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산 자는 자신의 몸 안에 죽은 자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들이 매우 중시하는 성체성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받아 모심으로써 내 영혼이 곧 나으리라는, 그 믿음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원동력이 된다.”(송병기)
교회와 신앙인은 성체성사를 살아간다. 성체성사는 그저 거행하는 종교적 예식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전례 성사이며 동시에 삶의 성사다. 성체성사는 최후의 만찬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구체적 물질성의 연대이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성사적 연대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
성체성사는 진정한 연대의 정치학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인종과 민족과 성별과 빈부와 문화의 차별 없이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이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당연히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연대한다.
애도와 연대
기억과 기록을 통한 연대가 문학의 일이라면, 기억과 기념의 연대는 종교의 일이다. 문학이 기억과 기록의 방식으로 슬픔을 애도한다면, 종교는 기억과 기념의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한다. 때때로 그 애도와 위로는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슬픔이다. “그 슬픔은 타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슬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슬픔이다.”(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
세상의 슬픔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타인의 상처에 무심한 사람은 (탁월한 시인은 될 수도 있지만) 참된 시인이 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기록의 연대와 제의의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2) 공부, 성찰, 일상의 수행
변화와 쇄신 위한 노력들이 세상과 교회를 바꾼다
개인의 변화와 성숙
늙어가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삶의 연륜이 깊어간다고 자동으로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다고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잘 늙는 일이 힘든 만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이나 신앙의 영역이나 일종의 지불비용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사제로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다. 거의 매일 미사를 한다. 성체성사의 은총을 매일 충만히 받는다. 하지만 내 신앙과 인격이 성품성사를 받고 초보 신부로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지고 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빛나던 그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신앙이 이젠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 보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은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구원은 은총과 신앙 안에서 선물로서 주어진다. 구원과 은총이라는 차원에서 성사의 사효성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와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정성과 마음의 집중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성사 거행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다.
지난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던 감상이 있다. 국가의 수준과 품격은 시민의 수준과 품격과 같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민의 모습과 수준이 국가의 모습이며 수준이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어떤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국가의 모습과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시민의 전체적 역량이 강화되지 않는 한, 국가의 진정한 변화와 품격의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인들 스스로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누군가가 선도적으로 변화와 쇄신을 주도해주기를 갈망한다. 물론 때때로 전위적 선구자들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모습과 수준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은 금방 동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세상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은 그 구성원들의 변화와 쇄신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변화와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흐르는 세월은 그저 타성과 관성만을 낳는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변화를 위해 개별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공부와 사람의 성숙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만이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된다. 물론 지적 권력을 쌓아 인정 욕망을 채우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공부도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늘 열린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만이 그래도 조금 변화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을 대상에 투사만 할 뿐이다. 대상과 관점의 상호작용에 따른 역동성을 놓친다. 언제나 같은 입장과 견해만 반복할 뿐이다.
공부란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좋은 공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것이 공부다. 세상의 삶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것이 참 공부다. 좋은 공부는 새로운 상상을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기존의 방식에 대해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공부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만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성숙해질 수 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자기성찰과 쇄신
공부와 성찰은 경계가 애매하다.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공부와 성찰은 닮아있다. 성찰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는 데 그 방점이 있다. 성찰은 곧 자기성찰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찰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 성찰, 즉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타자의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사회의 구조적 악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성찰이라는 말보다는 비판의식과 비판적 사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성찰은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성찰만이 변화와 쇄신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일상의 수행
일상 삶의 모든 자리가 수행의 장소다. 수행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수련과 수행의 장소다. 우선, 일상의 수행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드러난다.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응대하는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 수행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시선과 자세로 응대하는 일이 수련이며 수행이다. 둘째, 일상의 수행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싣고 지향을 두는 일이다.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목적을 상기하고 기억하면서, 그 일에 건강한 신앙적 지향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그 일을 수행한다면 그것이 곧 수련이다. 셋째, 일상의 수행은 연극적 수행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연극적 수행이란 하느님이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삶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온 힘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연극적 수행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 방식, 하는 일들에 대한 목적과 지향과 정성을 싣는 일, 연극적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되고 쇄신될 것이다. 공부와 성찰과 일상적 수행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공부와 성찰과 일상의 수행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축소 환원일까. 변화와 쇄신을 위한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해야 교회와 세상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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