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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및 관련 단어 소개 22≫ ◆계시◆
◆계시◆
1. 종교학적 의미 : 계시(啓示)란 말마디는 어원적으로 '드러나다', '나타나다', '열어 밝히다'(revela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계시'란 일반적으로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를 나타내다', '자기를 열어 밝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종교에 있어서 그 토대가 되는 것은 '거룩한 것'(聖, Das Heilige)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라는 개념은 흔히 '거룩한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다'(聖顯, Hierophania)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①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神秘, Mysterium)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자기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거룩한 것'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일상 생활에서 접촉하고 있는 사물 또는 사건들은 드러나 있다.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두가 '속(俗)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속된 것'이며, 또한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는 달리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 '거룩한 것'을 결코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 없다.
②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일정한 장소, 일정한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힌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이 때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다만 다른 것 즉 '속된 것'을 매개로 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事物) 즉 나무 · 바위 · 하늘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 사물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오래된 고목나무 앞에서 또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나무 또는 바위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경천사상(敬天思想)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하늘을 매개로 하여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은 또한 때때로 일정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사람들이 흔히 어떤 인간 즉 예언자나 성자(聖者)를 두려워하고 경외(敬畏)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예언자나 성자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얻어 만나기 때문이다.
③ 이와 같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한정시키게 된다. 다른 사물이 아닌 바로 이 '사물'에,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바로 이 '사건'에 제한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다른 나무가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나무만이 '거룩한' 나무로,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사건 만이 '거룩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 사람만이 '거룩한' 인간[聖者]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형태의 종교들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세상에는 다만 하나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게 된다. (鄭達龍)
2. 성서적 의미 : 그리스도교의 계시 개념은 여타 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계시 개념과 일치하고 있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성서 안에서는 계시자인 '거룩한 것'이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성서적 계시는 가장 거룩한 존재자로서의 인격적 신(神)이 자유로이 자기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러나 성서 안에서 '계시'를 표현하는 용어는 단일하고 명확하기보다 다양한데, 이는 성서가 계시에 대한 개념 내지 반성보다는 계시의 사실과 그 사건 자체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성서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느님은 시간의 제약 안에 들어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① 구약성서 : 구약성서는 스스로 추상적 사고단계 내에서 하나의 신을 유출해 내고 있지 않다. 구약성서는 오히려 신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만 비로소 신은 인식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명 4:32 이하).
하느님의 계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삶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생존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이사 64:1 이하), 자신의 권능을(예레 16:21), 자신의 위대한 일을(하바 3:2), 자신의 도우심(시편 98:2)을 계시하시며, 그것들만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알리고 계시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바로 역사 내에서 발생하므로,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이요 수단이 된다. 하느님은 특정 인물들을 통하여(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 자신을 계시하시며, 또한 폭풍이나 구름, 기둥, 불기둥,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형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는 하느님이 이 세계 내에서 매개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형태들로서, 하느님 계시의 역사 관련성을 표현하고 있다(출애 19:16, 14:24, 2사무 5:24, 1열왕 19:12, 시편 8:4, 19:2). 또한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이 계시의 특정장소로 등장하는 것은 계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는 역사 내에서의 하느님 의지의 계시를 현시함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가 된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야훼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이다(예레 31:34, 에제 36:38, 37:28, 이사 43:10).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순수 인간적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바 역사라 칭하여지는 인간적 성취 안에서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내 행위자로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 및 온 세계백성을 위한 약속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미가 4:5, 6:3 이하, 예레 11:5, 신명 4:37, 출애 32:13, 이사 41:8 이하, 창세 9:1).
② 신약성서 : 신약성서는 결정적 계시자로서의 예수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계시관에 입각하여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이 충만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빛이고 진리이며 계시자이다. 그러나 바울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신비의 내용-계시된 자-이 된다. 어쨌든 '계약',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 등의 신·구약의 근본 개념들은 신약성서의 여러 귀절들을 통하여 결국 구약성서의 옛 계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이 구약성서의 하느님 상(像)과 함께 새로운 계약인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3:6) 계시의 충만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가 연결됨을 기술하고 있고(로마 9장 이하), 구약의 구절들을 요한복음(3:9)은 아드님의 증거로서 얘기하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3:15)는 신앙인들을 아브라함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진술들은 모두 예수가 구약성서의 약속이 충만된 하느님의 계시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세사 안에서 모든 약속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은 원하시는 생활하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느님은 약속의 말씀과 약속 충만의 업적 사이에서,즉 과거로부터 현재를 뛰어넘어 개방된 미래에로 뻗쳐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계시는 예수를 뛰어넘지는 않지만,-바로 예수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 존립 가능하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속 작용한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고, 충실한 말씀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역사인 것이다.
3. 교의신학적 의미 :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는 먼저 행위 자체로서의 계시인 능동적 계시(revelatia activa)와 계시된 것을 의미하는 수동적 계시(revelatia passiva), 이중의 측면에서 고찰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자연적 계시는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류에게 열어 보이셨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천명함으로써, 계시의 개념을 순수 지성적으로 추구하려는 경향을 배척하고 있다. 이 초자연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계시헌장 3항),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① 하느님의 창조업적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자연적 계시, revelatio naturalis). 그러나 피조물의 자연적 인식가능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계시(revelatio supernaturalis)는 고유의 의미에서 계시라 불려진다.
② 초자연적 계시는 내용적으로 다시 구분될 수 있다. 죽은 후에 영원히 축복받게 되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열어 보이시므로, 이 축복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계시를 영광의 계시(revelatio gloriae)라 부른다(로마 8:18 이하, 1베드 1:5 참조).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신비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초자연적 실재인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말씀계시) 하느님의 신비를 표현하는 상상이나 개념들은 유비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하느님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1고린 13:12)고 하였다.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말씀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업적계시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자연적 신인식(神認識)은 구세사와의 맥락 안에서 가능하다. 또한 초자연적 계시는 일반 구세사 전반을 의미하는 일반적 초자연적 계시와 특수한 구세사, 즉 신·구약 성서에 담겨진 내용을 의미하는 특별한 공적 직무적 계시로 구분되기도 한다.
③ 전달되는 진리가 신비로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때 초자연적 계시라 부른다. 초자연적 말씀 계시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공적 계시(revelatio publica)라 부르고, 다만 한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계시는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 부른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절정이고 종결임은 신앙의 진리이다. 그리고 공적 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는 것은 적어도 신학적으로 확실하다. “로마 교황과 주교들은 … 새로운 공적 계시를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헌장 25항).
계시의 중계 방법에 따라서, 하느님의 사자(使者)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지는 계시를 직접적 계시(revelatio immediata)라 하고, 하느님의 사자를 통하여 인류에게 중계되는 계시를 간접적 계시(revelatio mediata)라 부른다. 구원의 신비의 초자연적인 공적 계시는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한 간접적 계시인 것이다. (朴順信)
◆구원◆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현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구제 방법들을 아낌없이 남에게 가르쳐 왔다. 그리고 자의로 해탈에 도달하려는 불교마저도 중생을 고해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제도하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도와주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도움을 거절하는 현인들을 볼 때, 공교롭게도 그들은 현세에 대하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태여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세계를 등지고 살아야만 되는가? 또한 고대 그리스 현인들처럼 물질세계에 속하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후세에까지 미루어야 하는가? 이를 잘못 이해하면 구원이란 선각자의 고답적인 지혜와 도피생활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인생을 운명으로 초연히 받아들이며 죽음을 헌거롭게 대면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현세에 머무르는 인간의 실패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은 성서 가르침의 주축이요 교회 가르침의 기초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세를 낙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을, 바로 이 세계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느님의 개입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세상에 개입하시어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일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은 ‘속량’(贖良)이란 개념뿐 아니라 구원이란 단어로도 표현된다.
외연이 넓은 구원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죄의 용서(루가 9:49-50, 19:9-10), 성세(1베드 3:21), 은총(에페 2:8, 사도 15:11), 부활(에페 2:6), 하느님과의 일치(베드 1:4-5) 등은 실제로 구원의 여러 과정을 말해 줄 뿐이다. 또한 구원이란 말을 대신하여 쓰이는 해방, 화해, 완성은 신인관계와 대인관계의 여러 관점을 표시하며 이들은 구원 개념에 귀착된다. 구원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알아들을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교부시대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이어받고 개발해 온 독특한 표현들, 예컨대 ‘구원계획’, ‘구세사’, ‘구원경륜’, ‘구원의 시기’, ‘구원의 수단’, ‘구원의 표시’ 등을 살펴 보건데, ‘구원’이란 단어는 다소 복잡하고도 함축성 있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1. 인간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 구원이란 우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이 가능하냐는 문제가 처음부터 제기된다. 인간의 자유를 해친다거나 단순히 하느님의 초월성을 보호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은 미흡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개입,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문제마저도 선결문제는 아니다. 성서나 신학은 그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실부터 출발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정체의 일부라도 관상(觀想)하며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철학가들의 신이 못하시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은 해 내신다는 결론부터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개입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느님의 활동 및 하느님의 정체를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하느님다운 하느님, 즉 자기 피조물에 구애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기 신성(神性)에도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인간이 신성과 인간성의 상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현존하시는 하나이신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니만큼, 신성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피조물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신다.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인간으로서도 계신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개입 자체는 창조와는 다르게 인간을 상대방, 즉 인격자로 삼으시어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신 아드님께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본성의 차원에서 벌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틈을 없이 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대내관계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 신인관계의 발판이 된다. 인격의 차원에서 인간을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의 개성을 요구하며 또 확정하신다. 왜냐하면 구별과 일치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신인관계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기는커녕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살고, 몸의 부활로서 전인(全人)으로 완성된다. 하느님은 인간을 인격자로 보심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불가침해성을 보장하신다.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진상을 은폐하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문제시함으로써 죄악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죄악의 성격을 드러내시면서 죄악을 없애 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지시는 것은 죄악이 인간의 구성요소가 아님을 드러내시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단지 인간을 본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 올려 주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소개해 주는 성서가 하느님의 의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로마 8:30).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네 단계로 나누어진 구원과정은 하느님께서 구원될 자들을 예정하신다는 사실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유, 헤아릴 수 없는 자비, 구원의 무료성(無料性)을 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을 예정하셨다 해서 어떤 사람은 이미 배척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의도를 존중하여, 살리시는 하느님께 절대로 의지할 뿐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는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2데살 1:8-9)는 말씀은 서로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구원을 제공하시지 않으신다. 당신과 인간 사이에 중개역할을 맡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듯이(에페 1:4-12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사도 17:31, 1베드 4:5, 히브 6:2). 따라서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 인간이 예수를 위하여 하는 일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우리 세상에는 지옥이 없다. 즉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로부터 결정적으로 떼인 자는 없다(로마 5:8-11).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2고린 5:15)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인간이 구원을 향하게 되었는데, 신앙으로 응답하기만 하면(로마 10:9-10)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에페 2:5, 사도 15:11). 성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무료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문제를 다룰 때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꼭 구별하면서, 인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개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결의 및 심판과 역사 안에 머무르는 인간의 반응을 같은 차원에서 언급할 수는 없다. 즉 구원의 영원성과 시간성, 그리고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이 몫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구원을 세상에 제공된 구원과 심판으로 확정된 영원한 구원으로 나누면서, 이 두 단계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정론이 구세사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결정론으로 변하여 신뢰보다는 공포감을 일으킨다든가, 또는 하느님의 요구를 무시한 채 구원을 현세상에 제한시키는 세속주의가 생긴다든가, 또는 하느님이 보편적 구원의 의도를 가지신다 해서 지옥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미망에 빠져 무책임하게 사는 위험들이 종종 있어 왔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자유를 악용하여 창조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죄 속에 사는 온 인류(로마 3:10-20)가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로마 5:16.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실 심판을 포기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죄를 단죄하시고(로마 8:3) 모든 인간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셨다(로마 5:21). 그분은 우리 죄의 용서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살리는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3:21-24).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1디모 1:9) 구원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로마 10:9)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유죄 판결이 없다(로마 8:1 · 34). 그러나 이 기회를 거부하는 자는 역사를 끝맺는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마르 3:29, 8:43-48). 따라서 지옥에 가는 자는 이중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심판은 창조주를 거부하고 그분께 도전하는 자들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는 구원을 거부하는 자를 단죄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력하고 결백한 자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는 길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 중인 구원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일단 포기하시고 구원의 길을 더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활성화시키셨다. 실제로 죄 때문에 불안 속에 떨며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은 위축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만민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부터 (창세 12:2-3) 결판을 보게 될 종말까지 역사를 안내하심으로써 역사의 양극을 제정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역사 한 가운데에 규범과 기준을 세워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일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용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신다. 사실 성신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구원과 멸망을 가지다 주는 사건들을 가리신다(요한 16:12-13). 즉 사건과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말씀으로 구성된 계시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상황 속에서 구세사를 형성하신다. 하느님의 개입방법(여러 차례의 제약들)과 범위(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를 드러내는 구약시대가 구세주이신(루가 2:11) 하느님의 도래를 준비하였다.
예수(“주님이 살리신다”, 마태 1:21)라고 불러진 하느님의 아들은 환자들을 치유하신 때나(마르 3:4, 5:23 · 28, 6:56, 10:52), 제자들을 구제하실 때나(마태 8:35, 14:30),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앙을 구함으로써 구원의 성격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것(루가 9:56, 19:10), 즉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요한 3:17, 12:47) 오셔서 말씀하신다(요한 5:34). 남을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시지는 못하지만(마르 15:30)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히브 5:7-9). 실제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의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 그래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유태인(사도 13:26)과 외교인(사도 13:47, 28:28)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로마 1:16). 인류 구원에 있어서 당신 몸인 교회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에페 5:23)께서 필요하듯이, 교회도 필수적이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격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계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미 보여 주신 대로 인간을 단체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듯이, 오늘날도 온 인류를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세주(사도 5:31)가 되셨기에, 교회도 모든 이에게 파견된다. ‘일치의 성사’, 곧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을 기념하고 실현하는 제사를 올리고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따라서 모든 믿는 이들은 바울로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뿐 아니라(로마 11:14 · 26) 외교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사도 28:28) 세상 끝까지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외교인들에게 늘 회개의 은총을 베푸시며,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이들이 양심대로(로마 2:14-16) 살기로 이미 ‘실존적 기본 결단’을 내리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선교사인 믿는 이들은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면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단죄하기보다도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 품에 들어오도록 구원의 길을 터 주어야 한다(마태 5:44-45).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남을 구원한다기보다도 구원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응답할 뿐이다. 믿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2디모 3:15) 자기 구원(필립 2:12)과 남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1고린 9:22, 10:33). 오늘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2고린 6:2). 구원의 상속자(히브 1:14)가 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다.(로마 8:24). 그래서 온갖 선행을 하면서(야고 2:14)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신 날”(히브 9:28)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로움을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다(로마 5:9). (文世
◆거룩함◆
[성서학적 고찰] 1. 구약에서 : 우리말‘거룩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카도쉬(qados)이다. 카도쉬의 어근 qds는 본래 ‘분리‘, ‘격리’의 뜻을 지닌다. 같은 셈족어인 베니게어(Phenician)에서도 qds는 ‘거룩함’을 뜻하며 거기서 파생된 mqds는 ‘성소’를 가리킨다. 아시리아어(Assyrian) Kadasu는 ‘정결’을 Kadistu는 이스타르 신에게 성전노예(hierodule)를 가리킨다. 아랍어와 이디오피아에서도 qds는 히브리어와 같은 뜻을 지닌다. 시라아어 qades는 ‘신에게 바쳐진’, ‘인정하게 된’을 뜻한다. 여기서 파생된 아랍어 케다샤(qedasa)는 ‘귀고리’, 혹은 ‘코고리’를 뜻한다. 본래 그러한 ‘고리’는 신성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속성이 부여되거나 관련되어 언급된 대상은 주로 하느님, 시간, 사람, 장소 및 기타 사물들이다.
① 하느님의 거룩함 : 거룩함이란 개념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과의 관련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사람과는 구별되고, 사람과는 격리되어 있는 분, 그러기에 거룩한 분으로 언급되어 있다.
㉮ 현현(theophany)과 관련된 이사야는 우치야 왕이 죽던 해에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야훼의 보좌 주변에서 스랍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친 내용이 바로 야훼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이사 6:3). 여기에 대한 이사야의 응답,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들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에서, 즉 하느님을 뵙는 자는 죽음을 각오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에 대한 예언자의 인식을 본다. 하느님께 대한 묘사로서의 ‘거룩한 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라는 표현과 평행을 이루어 쓰이기도 한다(시편 22:3, 이사 57:15). ‘거룩함’과 ‘두려움’(nora)이 곧 하느님의 이름이다(시편 99:3, 111:9).
㉯ 인간의 결함, 분순 및 죄와는 완전히 격리된, E문서 기자는 인간이 지닌 결함, 불손 및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길 수 없게까지 한다고 말한다(여호 24:19). 즉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하느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양자를 관계 맺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거룩한 분의 임재 앞에는 아무(것)도 거룩하게 되지 아니한 상태로는 나타날 수 없다(1사무 6:20). 거룩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그 분과 관계를 가질 사람이 거룩해지는 길 뿐이다(레위 11:44-45, 19:2, 20:26, 21:8). “나 야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 하느님의 칭호. 주로 이사야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gedos yisrael)’으로 불린다(이사 1:4, 5:19-24, 10:20, 12:6, 17:7, 29:19, 30:11·12·15, 31:1). 제2 이사야에게서도 이런 표현은 계속 나타난다(이사 41:14·16·20, 43:3·14, 30:11, 47:4, 48:7, 54:5, 55:5, 60:9·14). 예레미야(50:29, 51:5)와 시편(71:22, 78:41, 89:19)에서도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달리, ‘야곱의 거룩하신 이(qedos yaaqob)’(이사 29:33), ‘그(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qedoso)’(이사 10:17, 49:7), ‘너희의 거룩한 자(qedosekem)’(이사 43:15) 등으로도 나온다.
② 시간의 거룩함 : ‘거룩함’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카도쉬가 구약 안에서 적용된 최초의 예가 ‘시간의 거룩’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 쉬시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3). 안식의 ‘시간’(안식일)이 복받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조에 관한 기록에는 공간 속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거룩하다’는 특성을 부여한 것으로 언급된 것이 없다. 다만 ‘거룩하다’는 최초의 적용이 ‘시간의 거룩함’, 그 중에서도 노동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의 거룩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간에 대한 성화(聖化)는 느헤미먀에게서도 볼 수 있다(느헤 8:9·10·11). 이사야도 안식일을 ‘야훼의 거룩한 날’(이사 58:13)이라고 한다.
③ 사람의 거룩함 : 시간 다음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은 개인으로서나 단체로서의 사람이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나라, 거룩한 내백성이 되리라”(출애 19:6). 백성 전체가, 한 나라 전체가 거룩하다는 속성을 부여받는다(신명 7:6, 14:2·21, 26:19, 28:9). 이것은 다른 나라, 다른 백성과의 구별이다. 백성 사이에서도 사제들(레위 21:7·8, 민수 16:5·7), 아론(시편 106:16), 레위인들(2역대 35:3), 예언자(2열왕 4:9), 나실인들(민수 6:5·8)이 또 달리 거룩하게 구별된다.
④ 장소와 사물의 거룩함 : 거룩한 장소로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성막과 그 안의 기구들이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민수 7:1) 성막의 신성함은 오경의 여려 곳에 언급되어 있다(출애 29:31, 레위 6:9·19·20, 7:6, 10:13, 16:24). 그밖에 예루살렘(전도 8:10), 사제들의 거실들(에제 42:13), 이스라엘 진(신명 23:15)도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 밖에도 거룩한 물(민수 5:17), 거룩한 천사(시편 89:6·8, 욥기 5:1, 15:15, 즈가 14:5, 다니 8:13) 등에 관한 언급들도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거룩한 시간, 사람, 장소, 사물등은 모두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거룩한 것이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본질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 신약에 와서도 거룩함의 개념, 그것이 갖는 하느님과의 본질적 관계 등에는 변함이 없다. 신약에서 거룩함을 뜻하는 하기오스(hagios)는 그 자체의 그리스어적 의미에서 고찰되기보다는 히브리어 카도쉬의 번역이므로, 신약의 하기오스 이해를 위해서도 구약의 카도쉬 이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① 하느님의 거룩함 : 스랍들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선포한 것을 구약(이사 6:3)에서 볼 수 있듯이 네 생물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날마다 선포하고 있는 것을 신약(계시 4:8)에서도 볼 수 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거룩함과 전능이 결합되어 하느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우리는 예수께서 ‘거룩하신 아버지(pater hagie)(요한 17:11)라는 말로 하느님의 본질적인 성격을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도 그의 첫째 편지에서 레위기 14:44-45, 19:2, 20:7 등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거룩하시어 하느님의 자녀인 신도들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1베드 1:14-15). ‘주의 기도’에서도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받도록(hagiastheto to onomasou)’ 간구한다(마태 6:9; 루가 11:12). 여기서 이름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인격이다(마태 28:19 참조).
②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 : 하기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예는 마태 1:24, 루가 1:35, 4:34, 요한 6:69, 1요한 2:20, 묵시 3:7, 사도 3:14, 4:27·30 등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출생 묘사에서부터 우리는 그의 어머니에게 ‘성령(pneuma harion)’이 오셔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ounamis uphiotou)이 그를 감싸 ‘거룩한 아기(to gennomenon hagion)’ 곧 ‘하느님의 아들(uios theou)을 낳을 것을 예고 하였다(루가 1:3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본질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오심’(katabenai to pneuma to hagion)과 함께 한 번 더 확인된다(루가 3:22). ‘더러운 마귀가 들린 한 사람’(anthropos en pneumati akatharto)이 예수를 알아 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o hagios tou theou)이라고 고백한다(루가 4:34).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귀의 왕국을 파멸시키실 자다. 같은 고백을 이번에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도 들을 수 있다(요한 6:69).
사도행전에서도 예수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종(ho hagios pais)’(사도 3:14; 4:27·30)이라는 표현을 본다. 여기에는 제2 이사야의 ‘야훼의 종’(ebed Yahweh)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당하는 ‘거룩한’ 희생 제물이다(1베드 1:18-19).
③ 성령의 거룩함 : 성령(pneuma hagion) 혹은 영(pneuma)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함 및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뿌리는 구약의 ‘거룩한 영’(ruah haqqodes)(이사 63:10-11, 시편 51:11)이다.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는 루가가 정관사 없이 pneuma hagion(루가 1:15·35·41·67, 2:25, 3:16, 4:1, 11:13) 혹은 정관사와 함께 to pneuma to hagion(루가 2:26, 3:22, 10:21, 12:10·12)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신약에 와서 성령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한 성분을 함께 갖는다.
④ 교회의 거룩함 : 일찍부터 초기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는 ‘거룩한 종’(hagios pais)이 세운 것이다(사도 4:27·30). 그 공동체는 곧 ‘성령의 전’(eplesthesan hapantes touagion pneumatos, 성령으로 가득 찬)이었다(사도 4:31). 그리하여 하느님의 새 백성이 탄생하였다(히브 13:12 이하 참고). 이것이 교회다. 교회의 거룩의 근거는 그리스도 희생이 피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읍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페 5:26-27).
그리고 이 교회에 속한 신도는 ‘거룩한 백성’이다(1고린 1:2). 유대 그리스도 교인들과 이방 그리스도 교인들의 구별도 없어진다. 모든 신도가 다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된다(에페 2:22). 이것은 ‘신도들의 거룩함’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閔泳珍)
[참고문헌] F. Brown, S.R. Driver and C.A. Briggs, in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1972, pp.872~3 / W.F. Arndt and F.W. Gingrich, 'hagios' in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1974, pp.9~10 / G. Kittel, trans. by G.W. Bromiley, 'hagios'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I, Grand Rapis, 1968, pp.88~110 / J. Muilenburg, ‘Holiness’ in The Interpretes’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2, ed. by G.A. Buttrick, New York 1962, pp.88~110.
[교회 · 종교학적 고찰] ‘거룩한 것’(Das Heilige)이란 종교학적으로 볼 때 종교에 있어서 그 토대로 이루고 있다. 종교란 이 ‘거룩한 것’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종교가 된다. ‘거룩한 것’은 ‘속된 것’(Das Profane)에 반대되거나 대립되어 있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영역과는 다른 그리고 이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그 고요한 영역을 갖는다.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거룩한 것’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속된 것’을 통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낸다.
1.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의 영역과 명백히 구별되는 하나의 고유한 영역이다. ‘속된 것’이란 우리 인간이 그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사물, 인간, 사건들이다. 이들은 그 모두가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태고적부터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는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역시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하며, ‘거룩한 것’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종교에 고유한 영역인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닌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그리고 서로 엄격히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영역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그 어떤 것에도, 비록 그것이 ‘참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로 환원되어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종교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어 버릴 수 없는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그 고유의 영억을 갖는다.
2. ‘거룩한 것’이란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에 의하면, ‘두렵고 떨리는 신비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이다. ‘거룩한 것’은 우선 ‘두럽고 떨리는’ 신비이다.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그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고 떨리게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비 앞에서 전적으로 압도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무(憮)처럼 느끼게 된다. 반면에 ‘거룩한 것 ’ 그것은 모두이며 일체의 것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며 그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동시에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신비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을 열광케 하는 그러한 신비이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남김없이 채워지고, 한없이 행복감에 젖어 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 완전히 사로잡혀 거기서 결코 떠날 수 없게 되고 만다.
‘거룩한 것’은 이와 같이, 한편으로 인간이 그 앞에서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신비인 동시에, 다른 한편 인간은 그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결코 그 앞에서 떠날 수 없는 그러한 신비이다.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결국 하나의 ‘신비’(Mysterium)이다.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이라는 장막(帳幕)속에 숨어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스스로 그에게로 접근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3. 그러나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어움의 장막을 헤치고 마치 한가닥의 ‘빛’처럼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다른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줄 뿐이다. ‘거룩한 것’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사물(事物), 인간 그리고 사건을 그 매개체로 삼는다. 그리하여 ‘거룩한 것’은 언제나 ‘속된 것’을 통해서 그리고 ‘속된 것’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힌다[聖顯, Hierophania]. ‘거룩한 것’은 ‘속된 것’을 떠나서 따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속된 것’의 영역에서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바위’, ‘나무’, ‘태양’, ‘하늘’ 등과 같은 사물을 ‘거룩한 것’을 경험하고, 또한 구체적인 위대한 예언자 또는 성자(聖者)를 통해서만이 ‘거룩한 것’과 대면하고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거룩한 것’을 경험하고 체험할 때, 이러한 경험 또는 체험은 하나의 종교를 형성하게 만든다. 그런데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 내지 체험은 다만 하나의 형태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그리고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의 다양한 형태는, 바로 다양한 형태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종교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에는 하나의 유일한 종교만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鄭達龍)
◆신앙◆
신앙이란 믿는 것을 뜻하며 ‘믿는다’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친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하여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고, 교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 교리의 내용이 나에게 자명(自明)하지 않지만 교리를 제시하는 권위자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여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연구의 편의상 우리가 ‘무엇을’, ‘무엇 때문에’ 믿느냐 하는 신앙의 객관적 여건을 살피고 나서, 믿음이란 어떻게 행위하고 처신함을 의미하느냐 하는 신앙의 주관적 요인을 고찰하기로 한다.
1. 신앙의 객관적 여건 : 신학자들은 흔히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어 하느님을(Deum) 믿고[신앙의 직접 대상], 하느님에게(Deo) 믿고[신앙의 근거], 하느님께로(in Deum) 믿는다[신앙의 궁극목적]는 말로써 신앙을 묘사한다.
① 신앙의 대상 : 신앙의 집약적 표현인 사도신경에는 직접 하느님에 관한 조항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에 관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은 하느님과의 관련 하에서만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더욱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의 계시가 있으면 신앙의 내용이 된다. ② 신앙의 목적 :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창조주가 인간에 설정한 목적을 달성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했으므로 하느님에 합일(合一)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며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 자신이므로 하느님이 먼저 거기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이사 64:4, 1고린 2:9 참조). 여기에 계시의 필요성이 있고 이를 신앙으로 받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로마 1:20), 그 범위를 초월하는 진리는 계시에 의존한다(히브 1:1-2).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인 하느님을 차지하고 뵈옵는데 있다면, 신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하는 대상은 신앙 조목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인 생활하시고 위격적(位格的)인 하느님 자신이다. ③ 신앙의 근거 :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요한 6:65 참조).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각 인간의 인격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은총으로 영혼 안에서 잠잠히 속삭이시며 각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 은총에 순응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 내밀어준 어떤 손을 잡고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또한 전 인류의 역사 안에 실현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그분은 인간의 입을 빌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최후 증인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증언을 계속하여 인류사회 안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통하여 전파된 이 증거의 말씀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생활한 말씀이다(요한 12:49-50, 3:11, 8:26 · 28, 1요한 1:1-2 참조).
그리스도와 교회의 증인이 참되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표시는 기적과 기타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표징(表徵)이다. 하느님을 거짓을 증거하시려고 전능을 발휘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요한 10:37-38 참조). 이러한 여러 가지 표시 외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의 존재 자체가 "믿음을 가진 크고도 영구적인 동기요,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깨트릴 수 없는 증거"(제1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객관적 여건이란 은총과 말씀과 표징으로써 인간을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생활하시고 위격체이신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리스도라는 인격(人格)을 통하여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의 객관적 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천주성삼(天主聖三)이시다(요한 3:16 참조). 또 한 인류의 구원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예정되고 실현되었다(에페 1:4-5).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께 믿음으로써 하느님께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감이 곧 하느님께 나아감이다.
2. 신앙의 주관적 요인[인간의 응답]
① 신앙행위의 분석 : 신앙이란 하느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증거 때문에 믿는 덕행(德行)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일반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행위는 자기가 제시된 어떤 사물의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면서도 제시하는 사람의 진실된 성격과 그 사람은 그 일에 관하여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일단 인정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고전적 학자들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활동으로 규정했는데, 이에 준할 때 믿는다는 행위는 지성이 만족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의지로써 결단을 내려 붙들고 있는 인식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명제를 자명하게 증명할 수 있을 때 이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추측(推測)처럼 어떤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항상 그 반대명제가 성립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가지면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고, 반대명제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해 버린 결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성이 만족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왜 의지가 간섭하여 믿게 하는 의지가 문제된다. 본래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요 의지의 추구대상은 선(善)이다. 그러나 지성이 추구하는 그 참됨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면 이것은 동시에 좋은 것이기도 하므로 의지의 대상도 되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느님의 은총의 충동을 받은 의지의 명령에 의하여 지성이 하느님의 진리를 승인 파악함이다. 이 정의를 분석하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행위는 곧 하느님이 계시하신 초자연적 진리가 비록 인간의 미약한 지력으로 다 깨우쳐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최고의 선은 인간의 의지를 잡아끌어 결단을 내리게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최고의 진(眞)이요 최대의 선이므로 지성의 대상인 동시에 의지의 대상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지성과 의지의 동시적 작용이다.
② 신앙행위의 종합 : 지성과 의지의 작용은 독립된 별개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이므로 신앙행위란 구체적인 한 인격체의 행위이다. 한 인격체인 인간이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가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두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전적으로 네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제시된 어느 이론이 그러한 것이라고 인정해 두는 메마른 두뇌만의 활동이 아니라 원초적인 사랑을 겸비한 자기봉헌(自己奉獻)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자기의 인격을 위대한 상대방의 인격에 주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택이야 말로 하나의 탈피 이상의 희생을 요하는 거창한 결단이다. 그것은 한 인격이 지녀온 묵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붕괴를 의미하며 여태껏 영위한 세속생활과의 절연(絶緣)을 강요하고 ‘지금까지의 나’[小我]의 파탄내지 죽음을 결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와 절연과 죽음의 선을 넘지 않고는 절대자이신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 버릴 수 없다.
이처럼 신앙의 선택은 묵은 자아의 파괴에서 비롯하고 새로운 나의 건설에서 귀결되며 이 건설은 나의 중심인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사고와 원의와 행동을 운동하도록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진리와 선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
③ 신앙행위의 특성 : 본래 정신적 실존(實存)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그 실존이 자연적 인격체라일지라도 언제나 그 파악은 불투명한 인식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실존은 그 자체로써 이미 초자연적 존재 곧 신(神)이기 때문에 신앙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장막에 싸인 어두운 인식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1고린 13:12)이라 하고, 토마스는 신앙을 가리켜 "장래에 올 직관의 전주(前奏)"라 한다. 신앙인식의 이 같은 특성은 믿는 이로 하여금 항상 긴장된 기다림 속에 처하게 하므로 신앙은 종말론적 희망이다. 언제나 이 신앙의 구름을 헤치고 하느님의 영광을 얼굴을 맞대고 보려는 갈망으로 차 있는 상태
이다.
확실성은 객관적 자명성(自明性)과 주관의 굳은 집착(執着)을 의미한다. 신앙에서는 그 대상이 인간에게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기까지 굳이 믿는 이유는 그 대상을 자명하게 아시는 분께 대한 굳은 집착 때문이다. 이 집착은 그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신앙의 견고성은 지성의 세계 에 있지 않고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다. 신앙개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굳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은 삶에서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內在的) 제문제에 대한 정면의 대결이요 이 대결을 통하여 해결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까지도 불사하는 결연한 행동이다. 진지한 신앙인은 참된 신앙을 끈기 있는 용기로써 계속한다. 이 같은 겸손과 성실과 관용은 위대한 인간가치이므로 가톨릭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적 존재로서의 모든 적극적인 인간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가치들은 영원한 가치인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긍정되고 질서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의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신앙은 일종의 인식(認識)이기만 공허한 주관적 사색이 아니고, 철석같은 신뢰심이지만 공허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긍정이며, 신앙자가 결단으로써 자기 전인격을 내걸어 쟁취하는 답변(Yes)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점화되고, 하느님의 증언을 동기로 하며, 하느님을 차지하는 시동적(始動的) 행위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지성적 인식과 의지의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가지며, 희망으로 신앙이 지탱되고 사랑으로 생활화 한다. 한마디로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 앞에 인간답게 존재하고 행위하게 하는 실존적 지혜(實存的智慧)이다.
◆강생◆
1. 강생신학의 일반론 : 강생(降生)이란 용어는 무한하신 하느님[神]께서 유한한 인간 세계에 직접 내려오신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는 천주 강생이 바로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믿고 고백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의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비 중에서도 그 핵심을 이룬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관한 교의, 자유로운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본질과 품위에 관한 교의 및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일성(一性)에 관한 교의 등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 안에 기초하고 있으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성 및 자신을 전달하는 사랑으로서의 하느님의 고유본질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②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자기 전달의 종말론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세계 및 하느님께 대한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근본이해는 창조론의 이해를 뛰어넘어서, 절대적이고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자유로운 은총으로 자신을 ‘외부로’, 비신적(非神的)인 것에 전달하기를 원하시는 구원역사적 경험의 맥락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느님 자기 전달의 수신자가 된다. 하느님은 자기 사람의 내적인 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것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구원역사의 종말론적 형상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즉 하느님의 강생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자기 전달의 최고 형태이다. 이것이 바로 강생에서 보여진다. 강생으로 인하여 세계의 역사는 승리의 구원사가 되었다.
③ (유한한 것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가능성이 하나의 신비인 한에 있어서, 이런 하느님 자기 전달의 가능성이 강생 안에서 보여질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강생의 신비는 존립한다. 나자렛 예수 안에서 보여지는 강생의 사실은 이 신비의 구체성을 지시하는 소인(moment)이다.
2. 성서의 강생 교리 : 신약성서의 연구과정에서 대두된 그리스도론은 다양하나, 올바른 개념은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자(메시아)에 관한 구약성서의 모든 진술들은 하느님 자기 계시의 절정이요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확하게 성취도고 있음을 신약성서는 시사하고 있다. 약속 실현으로서의 예수 사건의 근본원인은 하느님에게로 되돌려지므로,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으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느님의 아들이다(2고린 1:20, 루가 1:54 이하, 에페 1:4 이하).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하셨는데(사도 13:23, 13:32 이하, 로마 1:2, 15:8, 2고린 1:20 비교), 이 구원의 비밀(수수께끼)은 하느님의 아들이 인가의 육체(caro peccati)를 취하심으로써 백일하에 뚜렷해졌다(로마 8;3, 마태 1:1-16, 루가 3:23-28, 갈라 4;4 등을 비교). 요한복음 서문(1장)은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임을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말씀(logos)을 세상에 내려보내심에 있어 동정녀 마리아를 도구로 선택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강생의 대업을 성취시키신다(루가 1-2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함께 인류에게는 구원의 문이 열렸다.
3. 강생에 관한 교도직의 가르침 ① 일반적 성격규정 :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도직의 일반적 가르침은 객체적이며 존재적으로 정식화되어 있다.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는 초 세기에 많은 논쟁을 거쳐서,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되었다. 예수의 위격(位格, persona)과 본질(本質, natura)은 구별되며, 그러나 섞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실체적 합일(合一, hypostatische union)을 이룬다.
② 근본 가르침 :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2위격을 지니신 분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영혼과 육신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면서, 인간적 본질과 신전(神的)본질을 동시에 지니시며, 이 두 본질의 실체적 합일(DS. 148, 217)을 이루고 계신 분이시다. 말씀의 하나이고 동일한 위격은 그래서 인간적이고 신적인 두 개의 본질을 지셨는데, 이 두 본질은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실체적으로 합치되어 있다(DS. 143 이하, 14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다. 하나이고 동일한 추체가 두 개의 본질을 지니는 합치(합일)의 실재성은 신앙의 절대적 신비이다(DS. 1462, 1669).
㉮ 예수는 참으로 하느님 아들이시다. 예수는 참 하느님이시고(DS. 54, 86, 148, 224, 290, 994, 2027~2031),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시고(DS. 86, 554), 하느님의 아들이시고(DS. 1597), 창조되지 않고(DS. 13, 39f, 54) 낳음을 받으셨으며(DS. 6, 13, 86),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고(DS. 54, 86, 422) 영원하신 분이시다(DS. 54, 66).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그가 구원의 중재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참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환상의 육체가 아닌(DS. 201, 344, 462, 708), 진짜 인간의 육체를 지니셨으며(DS. 13, 111a, 148, 480, 708), 또한 천상 육체를(DS. 710) 지니셨는데, 이 천상육체는 이미 강생 때부터 지니신 것이다(DS. 205). 또한 그는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영혼을 지녔다(DS. 216, 480). 그래서 그리스도 가현설(Doketismus)이나 극단적인 말씀-육체-그리스도론은 이단으로 간주된다(DS. 65, 85). 예수는 우리와 본질이 같고(DS. 148), 아담의 자손이고, 한 어머니로부터 인간적 방법으로 태어나셨기에 우리의 친척이고 형제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자연적 아들로 아버지께 흠숭지례(欽崇之禮)를 바치셨다(DS. 120, 221, 156).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죄에 물들지 않으심과 성성(聖性)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성과 기적을 행하는 힘(DS. 121, 215, 1790, 2084)과 오류를 범하실 수 없는 지식”을 부여받으셨다.
4. 현대신학적 강생 교리 : ① 그리스도의 강생은 신앙의 신비로서 신앙의 신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모순’(paradox)[S. Kierkegaard]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신비라는 것은 단순한 신화(mythos)나 기적(mirakel)이 아니고 다만 신화적으로 장식되어 나타날 수는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일정한 방법으로 세계의 무대 위에 드러내는 하나의 양식이다.
② 그리스도의 인간 본질은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한 인간이기에 인간적 의식을 지니고 인격적 주체를 이루면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계시기에 창조된 실재로부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즉 구체적 역사적 예수의 경험은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하느님께서 세계에 가까이 오셨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단순히 미래를 예시하는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의 구원과 결정적인 관계를 지닌 구원자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구세주는 우리가 강생이라 부르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③ 오늘날의 정신 역사적 상황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존재적 그리스도론에서 초월적-존재론적 그리스도론으로 이송된 것 같다[K.Rahner]. 초월성은 인간의 우유적 행위의 시공적 다양성 안에서 실현되며 이 다양성은 인간의 본질인 초월성의 근본행위에 의해 움직여진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행위란 하느님으로부터의 출처와 하느님께로의 지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기전달 하에서 가능하다. 강생의 신비는 기초적으로 세계에 대한 신적 자기 전달(神的自己傳達)의 신비 안에 놓여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강생이 바로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④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현대인은 진화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인은 역사의 물결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본다. 이 관점 하에서 세계는 고정된 크기가 아니고 자연 역사를 지닌 되어가는 세계이다. 자연역사와 세계 역사는 하나를 이루며 상승, 전진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높고, 힘 있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역사이다. 역사의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자체 초월’로 성격 지어질 수 있다. 이 더 높은 것에로의 자체 초월은 역사적 존재사물의 행위라 할지라도 다만 하느님의 절대적 존재 자체의 힘 안에서만 가능하다. 자체 초월의 개념이 신적 운동이고, 신적 운동이 자체 초월을 베풀어 주는 것이라면, 물질적 정신적 세계의 발전은 하나의 역사로 이해된다. 즉, 창조된 존재의 자체 초월이란 하느님 존재 자체의 무한한 신비의 직접성으로 접근해 감이다. 그래서 이 자체 초월은 하느님의 ‘공동작용’이 요청된다. 이 공동작용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자기 전달이다. 창조된 존재의 단계적 자체 초월 안에서 발생하는 세계와 정신의 역사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에 의해 움직여진다. 유한한 것의 최고의 자체 초월과 하느님의 철저한 자기 전달은 역사 안에서 보여지는 양면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과 인가의 자체 초월이 범주적 역사적으로 절대적 절정에 이르는 곳, 즉 하느님이 시 · 공 안에서 현존하고 인간의 자체 초월이 하느님에게로의 완전한 양도에 이르른 곳에서 바로 그리스도교가 강생이라 부르는 것이 주어진다. 세계의 ‘신화’(神化)가 은총과 영광 안에서 절정과 역사적으로 빛나는 승리에 도달했을 때, 말씀이 개체로 꼭 필요하게 주어지는 한에서 강생된 말씀은 세계 ‘신화’의 절정이고 중심이다. 하느님이 자기자신을 세계에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체이다. (朴順信)
◆회개◆
죄스런 생활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일. 하느님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나 인간은 원죄(原罪)와 본죄(本罪)로 인하여 죄인이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고 일생 동안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성서 계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회개의 개념은 죄의 관념이 발전함에 따라 확립되어 왔는데, 구약성서에서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sub)를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하느님께 향하는 행위, 즉 생활방식을 바꾸어 생활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회개를 의미하였다. 후기에 와서 참회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행위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겼는데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 귀의하여 실제 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에피스트레포(epistrepho)와 내적 방향전환을 나타내는 메타노에오(metanoeo)를 나란히 사용한다.
회개에 대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나탄이 다윗왕을 책망하는 훈계 속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기원전 8세기부터 예언자들은 전 국민에게 회개의 권유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권유는 예언자들의 기본사명 중 하나가 되었다(예레 25:3-6). 회개에 대한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갖가지 가르침은 최후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설교 중에 다시 나타난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라”(마태 3:2)고 외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표지로서 물의 세례를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야 하는 것이다(마태 3:8). 예수님은 선교활동의 서두에서 세례자 요한의 호소를 자신의 말씀으로 되풀이 하셨다(마르 1:15, 마태 4:17). 그 호소는 지상사물의 집착에서 비롯하여(마르 10:21-25)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오만(루가 18:9)에 이르기까지 온갖 인간적 자만심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악한 세대를 반대하여 ‘요나의 표지’를 보일 것을 예언하신다(루가 11:29-32).
회개는 자신의 전 생명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근본적 결단이요 엄숙한 선택행위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듯이(루가 15:4-) 항상 섭리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이 응답으로 인간은 죄스런 처지와 협소한 한계를 뛰어넘어 용서를 받고 자유를 누린다. 회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며,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다시 회개하기를 요청했듯이(사도 8:22) 일상생활 가운데 되풀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회개를 덕행(德行)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이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사도 17:30-). 하느님은 “참고 기다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고”(2베드 3:9) 계신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이슬람교◆
서남아시아에서 나온 유일신적 종교 가운데 인류역사의 무대에 가장 뒤늦게 등장한 최후의 세계적 종교이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반도의 홍해안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가르침은 경전인 코란(Quran, 續經) 속에 들어있다. 코란은 교조(敎祖) 무하마드(Muhammad, 570년경~632)가 예언자로 자처한 40세 때부터 사망시까지 수시로 받은 계시를 수록한 책이다. 예언자는 10여년간 그의 고향인 메카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성공은커녕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622년에 메디나로 이주(hijra)하였다. 이 해가 곧 이슬람력(曆)의 시작인 히즈라 원년이다. 이때부터 이슬람은 급성장하여 예언자의 사망시까지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메디나에서 무하마드는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공동체(Ummah)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 공동체는 단순한 믿음의 공동체만이 아니고 스스로의 법제(法制) 성부 및 사회체제를 구비한 공동체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 때문에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국가인 것이다. 그것도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일원적인 것으로 그 추종자(muslim)는 보는 것이다.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정복을 개시하여 교조가 죽은 뒤 백년도 채 못 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중국접경과 인더스강 유역에서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서쪽으로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정복지 가운데 스페인을 제외한 지역은 무슬림 다수지역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 뒤 정복에 의한 포교보다 무역을 통한 포교활동으로 이슬람은 동남아시아 즉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과 검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유럽의 발칸지역과 중국의 신강성 지역에도 진출했으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슬람의 선교사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 세계 총인구의 6분의 1을 무슬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1. 교리(敎理) : 무슬림의 믿음과 사상이 명시되어 있는 쿠란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무하마드에게 아랍어로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본다. 예언자의 사후 새로운 계시가 끊어지고 쿠란만으로는 새로운 사태의 해결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미흡함을 느끼자 무슬림은 이를 보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무하마드는 절대과오를 범하지 않는 완전한 인간으로 전제하고 그의 생애에 착안하여 일여건 아래 그가 취한 행동과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입법(立法)의 자료로 삼으니 곧 하디스(Hadith, 傳承)이다. 따라서 무하마드의 관행(慣行, sunnah)은 독실한 신자들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된다고 보고, 스스로를 관행의 추종자(ahl al-sunnah)라고 부르니 곧 무슬림의 8할 이상을 점유하는 수니(sunni)파이다.
이슬람에서 무하마드의 중요성은 무슬림의 신조 가운데 신조인 신앙의 고백(shahada, 證言)즉 “알라(Allah,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자(使者)다”란 두 구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구절은 심지어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속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이며 쿠란 속에 함께 나란히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한 구절씩 분리되어 자주 나타난다. 이 두 구절을 외우는 것은 곧 스스로 자기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행위이며 또한 하느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구분은 물론 다른 종교의 추종자와 무슬림이 구분되는 것이다. 즉 무하마드 는 단순히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 보낸 마지막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가 받은 계시는 완벽하며 절대 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그는 역사적 인물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하디스를 통하여 무슬림의 마음속에 마치 현실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공정하고 따뜻한 스승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코란은 114장(sura)으로 되어 있으며 제1장을 제외하고는 그 길이가 긴 것부터 짧은 것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슬람의 신조는 6신 5행(六信五行)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섯 가지 믿음(iman)에는 알라, 천사, 예언자, 성서, 최후의 심판 및 천명(天命, gadr)이 있다.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물론 어떠한 동반자도 있을 수 없다. 절대신(絶對神) 알라는 세계 도처의 각 민족에게 필요시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보낸다. 이들 예언자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거쳐 무하마드에서 끝이 난다.
코란 3장 66절에서 아브라함은 유태교인도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순수한 무슬림[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이어서 알라에게 동반자를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은연중에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구약성서와 신약성서)으로 혼탁해진 유일신사상을 이슬람이 쇄신하여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순수한 유일신사상을 다시 희생시켰음을 보이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언자로 보는 점이 특이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천명(天命)의 원리에서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절대영역인 창조에 대한 침범으로 보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헌신적 행동(islam 순종, 또는 ibadat 헌신)에는 신앙의 고백, 예배, 종교세(zakat), 단식, 순례가 있다. 신앙의 고백은 신자가 자기 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것이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의 카바(kaabah) 신전에 있는 검은 돌을 향하여(qiblah)[예배의 방향] 행하며, 금요일 오후 1시경에는 성원(聖院)에서 집단예배를 가진다. 전세계 무슬림이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는 것은 무슬림의 유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식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Ramadhan)의 한 달 동안에 병자, 임신부, 여행자를 제외한 성인남녀 신자 모두가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지 않는 완전한 금욕행위를 말한다. 재력이 허용되는 신자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 세웠다는 메카의 카바신전과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 등의 성지순례를 이슬람력 12월에 해야 한다. 이 순례를 의식에 따라 마친 신자는 하지(hajji)[순례를 행한 이]라는 칭호가 그 이름 앞에 공식적으로 붙게 되며 이것도 무슬림의 세계적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종파 :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합일되어 있기 때문에 종파의 발생도 정치적 투쟁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예언자의 사후 그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그의 동료(sahabah) 가운데 일부는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Ali)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역한 친구이며 연장자인 아부 바르크(Abu Bakr)를 할리파(Khalifah, 후계자)로 추대하였다. 결국 알리는 네 번째 할리파로 선임되었다. 뒤에 그의 추종자들은 정치적 파당에서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켜 그를 완전무결한 인간(imam)으로 승화시키니 곧 시아(shi‘a, 무리)파이다.
이에 반하여 알리를 포함하여 그의 세 선임자 모두를 받아들여 즉 이루어진 관행을 그대로 인정하는 파가 정통파인 수니파이다. 시아파는 카리스마적인 개인인 이맘(imam)[앞에 서는 이, 즉 지도자, 또는 집단예배 인도자]을 공동체의 핵으로 보는 대신에 수니파는 카리스마적인 움마를 내세웠다. 전자는 무하마드의 완전무결성(‘ismah)이 알리를 통하여 그 자손인 이맘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나 후자는 움마가 이어받았다고 믿었다. 양파의 이슬람 교리논쟁을 통하여 이슬람신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수니파는 집권세력으로 그리스철학의 논리를 받아들여 그 신학을 체계화시켰고 시아파는 이슬람 등장 이전에 서남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신앙과 접목(接木)되어 비교적(秘敎的)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전체 무슬림의 2할도 못되는 시아파의 집권 수니세력에 저항하는 재야세력으로 상당한 기간 존속했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맘이 알리의 자손 가운데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여러 분파가 나왔으나 재야세력으로서의 공통점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즉 비밀결사성, 시아적인 신분을 위험시에 감출 수 있는 가장성, 완전무결한 이맘의 비교적 지식 소유 및 언젠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세주사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시아파는 알리로부터 시작되는 이맘서열에서 제5대 이맘이 누구인가 하는 분규가 발생하여 다섯 이맘파인 자이드(Zaid)파가 분기해 나갔다. 이 파의 추종자는 현재 예멘에 다수가 잔존해 있다. 또다시 제7대 이맘의 적격자 문제로 일곱 이맘파가 분리해 나가니 곧 이스마일(Ism‘ail)파이다. 이 파는 극단적으로 흘러 혁명적 행동주의를 낳았다. 이 파에서 다시 11세기 전후에 활동한 암살단파[hashshashin, 일종의 대마초, 즉 저명인을 암살하기 전에 대마초를 복용했다함. 여기서 십자군을 통해 영어의 assassin이 유래]를 비롯하여, 레바논의 드루즈(Druzes, 일명 Hakimis)파, 시리아의 알라위(Alawis, 일명 Nusairis)파가 파생하였다. 순수한 이스마일파의 추종자는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산재해 있다.
한편 시아파의 대종을 이루는 열두 이맘파는 열두 번째 이맘인 무하마드 알-문타지르(Muhammad al-Muntazir, ?~878)는 죽지 않고 숨어 있으며 언젠가는 구세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 파는 16세부터 이란의 국교로 인정되어 현재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의 각 지역에 살고 있다. 이 파는 이마미(imami)파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흔히 시아파라고 부를 때는 보통 이 파를 지칭한다.
3. 명칭의 유래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하느님께 절대 순종한다는 동명사(動名詞, masdar)이며 그 능동분사가 곧 무슬림(muslim, 절대 순종하는 이)이다. 영어에서 무하마드를 지칭하는 Mohammed에서 Mohammedanism이 파생하여 모하메드교라고도 부르나 이 명칭은 무슬림이 매우 싫어한다. 즉 그들은 알라를 믿는 것이지 무하마드를 믿지 않는다는 논리에 그 이유를 두고 있다. 이슬람교의 우리 고유 명칭은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이다.
이 명칭은 중국 신강성의 회흘(回紇) 사람들이 믿는 종교란 뜻으로 명청(明淸)대의 중국인들이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당송(唐宋)대의 사료에는 대식인(大食人) 또는 대식국인(大食國人)이란 용어가 회회를 대신하였다. 대식(大食)은 그 어원을 따지면 종교를 가리킨다기보다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들을 타지(Tazi)라 부른데서 당어(唐語)로 음역(音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동의 이슬람교도를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흔히 지칭한 것 같다.
당송대의 중국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을 청진교(淸津敎)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청진교도, 그들의 성원을 청진사(淸津寺)라 불렀다. 회흘지역이 이슬람화되자 명청대의 중국인들은 이 지역을 회강성(回疆省)이라고 부르고, 그 주민들은 회민(回民) 내지 회회인(回回人)이라 부른데서 회교 또는 회회교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이다. ≪고려사≫ 전반부에는 대식이란 명칭이 나타나 고려 후기에 생성된 고려가요에는 ‘회회아비’란 표현이 있다. 고려가 원(元) 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사실상 그 속국이 되자 신강성 지역의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원의 관리로 또는 고려왕비가 된 원의 공주수행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데서 이 표현이 나온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된 삼가(三哥)라는 인물은 ≪고려사≫에 회회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9세기경에 출간된 아랍문헌에는 우리나라가 Sila 또는 Shila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신라(新羅)의 음역임이 분명하다. 즉 신라는 공기와 물이 맑은 나라로서 병자가 들어가면 병이 저절로 치유되며 금이 많은 나라여서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술되어 있다(한국사연구, 1977년 4월 제16호 拙稿, <이슬람文獻에 비친 한국像> 참조). 13세기의 일한조(Ilkhan, 1256~1353)의 재상인 라시드 알-딘(Rashid al-Din, ?~1318)은 그의 저서 속에 Kaoli(高麗의 中國語音譯)를 원의 부마국으로 소개하였다. 조선조의 세종 때에 이슬람력(回回曆)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뒤 유럽국가가 강성해지고 무슬림국가는 상대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이들의 한반도 출입도 끊어졌다. 이와 함께 일부 정착한 대식인이나 회회인의 후손도 동화되어 사라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이슬람교가 다시 들어온 것은 6.25동란 때 터키군을 수행한 이맘[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격]이 한국인과 접촉한데서 기원한다. 현재 서울의 이태원에 본부가 있는 한국 이슬람교중앙연합회는 그 산하에 3개의 이슬람성원을 각각 서울, 부산, 경기도 광주에 두고 있다. 신자수는 수천명으로 추산된다. (金定慰)
◆계약◆
계약은 맹세에 의해 구속력을 갖게 되는 엄숙한 약속으로 언어의 형식을 취하거나 상징적 행위로 나타나며 이러한 형식이나 행위는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행위자(actor) 가 그의 약속을 실행하도록 구속하는 ‘형식적인 행위'(formal act) 로 인정된다. 계약이 서로 다른 사회, 정치적 집단 사이에서 맺어질 경우 계약 당사자들 간에는, 계약 문헌에 의해 제약을 받는 계약이 생겨나게 되며 계약이 법적 공동체(legal community) 내에서 성립될 경우에는 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의무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계약은 이 새 의무들도 구속하게 된다.
1. 고대의 계약 ① 개념 : 고대의 계약은 그 형태와 발생한 상황이 매우 다양하다. 고대 계약의 역사에는 아직도 밝혀져야할 많은 부분들이 남아 있으나 당시 계약이 고대인들의 행위를 제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어에 의한, 또는 상징적인 맹세는 구속력을 갖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고대에 행해진 모든 맹세가 미래의 행위에 관한 약속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이 모두 계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대의 계약에 관한 가장 유용하고 광범위한 자료는 청동기 시대 말기 히타이트 제국의 문헌들인데 이 문헌들에는 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관계 및 북부 시리아의 도시국가들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의 종주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② 구조 : 고대 계약의 형식은 현재까지 면밀히 분석되어 왔는데 그 특징적인 요쇼들이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 전문 : 조약 전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이는 …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뒤이어 조약을 맺는 군주의 신분, 칭호, 이름, 계보 등이 나온다. ㉯ 서문 : 서문에서는 조약 체결자들간의 이전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군주가 속국 또는 봉건제후의 이익을 위해 행한 자비로운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 조항 : 이 부분에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속국 또는 봉건제후가 지켜나가야 할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군사적인 외부조항들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 보관 및 회중낭독 : 계약 조문은 성소에 보관되었으며, 1년중 정해진 날짜에 몇 차례씩 회중 앞에서 낭독되었다. ㉲ 증인들의 명단이 실려있는데 증인으로는 양국의 신(神)의 이름과 자연계의 사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신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계약을 위반할 경우 위반자를 신이 응징해 줄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이 미래의 계약내용 준수를 위한 바탕이 되고있다. ㉳ 축복과 저주 : 이 부분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계약의 증인들이 속국 또는 봉건제후의 복종과 불복종에 대해 각각 내릴 축복과 저주들을 열거하고 있다.
2. 구약시대의 계약 ① 개념 : 구약성서에서 '계약'이라는 의미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이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속박'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biritu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맹세'라는 뜻의 히브리어 ---도 '계약'의 동의어로 종종 나타나는데 이는 맹세가 계약을 정식으로 구속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② 의미 : 구약시대의 계약은 친족관계 이외의 모든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기초였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와 종교에 있어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 세속적 계약 : 세속적 계약이란 계약 당사자로 야훼가 참여하지 않은 계약을 말한다. △ 종주권 계약(suzerainty) : 종주권에 관한 계약에서 상급자는 하급자를 그가 제안한 의무들로 구속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사무엘 상 11장 1절로, 야베스길르앗 사람들은 그들을 포위한 나하스에게 그를 섬기겠다고 하며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한다. 에제키엘 17장 13절에는 바빌론과 제데키아 사이의 종주권 계약 체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용어는 다르게 쓰이고 있으나 호세아 12장 1, 2절의 '아시리아와의 흥정'도 일종의 종주권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 평등계약(parity) : 평등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이 맹세에 의해 서로를 구속하는 계약이다. 평등계약은 다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즉, 특별한 의무들이 주어지는 평등계약이 있고, 아무 의무도 부과되지 않고 다만 평화를 유지할 목적으로 맺어지는 평등계약이 있다. 이사악과 아비멜렉 사이의 우호조약은 후자의 경우이다.(창세 26:27-31). △ 보호계약(patron) : 보호계약은 상급자가 하급자의 이익을 위하여 스스로를 구속하는 계약이다. 구약 시대에는 야훼를 구속하는 계약의 전승들 외에 이런 종류의 계약이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보증계약(promissory) : 보증계약은 계약 당사자들간에 새로운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계약이 아니라 단순히 계약에 명시된 의무들을 미래에 이행할 것을 보증하기 위한 계약이다. 요시아 왕은 야훼의 전에서 찾아낸 언약법전에 기록되어있는 야훼의 계명과 훈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언약을 이루기로 야훼 앞에서 백성들고 함께 서약하였으며(2열왕 23:3), 바빌론 유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모세에게서 물려받은 법에 따라 주 야훼의 계명과 법령과 규례대로 살기로 서약하고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하였다(느헤 10:28-29). 이 계약들은 사실상 모두 일방적인 계약들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아무런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 하느님이 구속받는 계약 : 하느님이 구속받는 계약들 중 가장 오래된 계약은 J전승(창세 15)과 P전승(창세 17:1-14)으로부터 보존되어 온 야훼와 아브라함의 계약이며 그 이후의 계약들 중 다윗 왕조가 영원히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하느님과 다윗과의 계약은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닌다(2사무 3:9, 23:5, 시편 89:3·28-29, 110:4).
㉰ 이스라엘이 구속받는 계약 : 아브라함 - 다윗 - 피네하스(Phinehas) - 노아에 이르는 계약적 전승들 외에 이와 대조적인 복잡한(계약) 설화들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형태는 모세로부터 나온 것이며, 십계명이 축소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시대의 계약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일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경외감과 감사(gratitude)를 당시 집단 내의 평화를 유지해 주던 종교적 의무들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초기 이스라엘은 십계명의 계약을 기초로하는 신앙 공동체였으며, 이 계약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청동기 시대 말기 제국의 군주와 봉건제후들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훼는 한국가의 왕이라기 보다 왕중왕(king of kings)으로 여겨졌으며, 그는 수많은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으나 오직 이스라엘 하고만 계약을 맺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 시나이 계약의 의미와 한계 : 시나이 계약은 구원계획의 본질적인 면모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법의 지배를 받는 공동체를 만드심으로써 그들고 가까워지기를 원하셨으며 계약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내려 주신 무상을 선물, 은총이었다. 그러나 시나이계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고 있음은 성서의 그밖의 부분들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보편성(universality)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한 지상 위에서의 하느님의 왕국건설과 같은 신적 언약의 세속적인 면 또한 계약의 그리스도교적 궁극목표를 위태롭게하는 것이다.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나이 계약은 이스라엘밖의 많은 민족들의 생활에 침투해 들어가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계시는 계속 발전되었다.
㉲ 새계약을 향하여 △ 구계약의 와해 : 이스라엘이 야훼께 불충실했기 때문에(예레 22:9) 구계약(ancient pact)이 깨지게 되는데(예레 31:32) 성서에서는 이를 아내의 부정으로 결혼이 실패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에제 16:15-43). 이스라엘은 불충실했던 댓가를 역사를 통해 치러야 했는데 즉, 일련의 국가적인 시련들, 예루살렘의 멸망, 유배, 이산(dispersion) 등을 겪게 된다. △ 새 계약에 대한 언약 : 이 모든 이스라엘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약속하셨던 계약의 계획은 변함없이 남아있었다(예레 31:35 이하, 33:20 이하). 호세아는 이를 신부에게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 진실을 예물로 가져오는 약혼자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약혼관계로 비유하였다(호세 2:20-24).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법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새겨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생활태도가 변화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예레 31:33 이하, 32:37-40), 에제키엘은 시나이와 다윗의 계약을 경신하고, 마음의 변화와 하느님의 영의 은총을 가져올 영원한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대해 예언하기도 하였다(에제 36:26). 새 계약을 만드는 이는 야훼가 '인류의 계약'으로 세우셨으며 '만국의 빛'이 되신 '신비한 종'(mysterious servant)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계약에서 불확실하게 암시되었던 새로운 계약에 대한 계획은 '야훼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3. 새 계약 ① 개념 : 신약성서에서 계약의 개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단어는 70인역에 매우 자주 나오는 용어인 'diaeeke'이다. '증언하다'라는 뜻의 'marturein'은 계약 형식에서 유래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증언'은 당시 계약의 가장 중요한 절차였으며 계약이 구속력을 갖게해 주는 요소로써 맹세보다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② 의미 : ㉮ 예수에 의한 새 계약의 성립 △ 계약을 뜻하는 diatheke는 4복음서의 최후의 만찬을 기술한 대목에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고 모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에 마태오는 “죄를 용서해주기 위하여”(마태 26:28)라는 말을 덧붙인다. 루가와 바울로는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루가 22:20, 1고린 11:25)라고 하였으며, 루가만이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가 자신을 고통받는 종(이사 53:11 이하)으로 생각했으며 그의 죽음을 속죄제물로 이해했음이 명백해진다. 빠스카의 어린 양이며 계약의 희생제물인 동시에 속죄제물이기도 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예수의 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이 변화될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새 계약'의 약속이 실현된 것이다.
㉯ 새 계약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 △ 바울로의 사상 :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된 계약의 주제는 신약의 배경이 되고 있다. 시나이 계약에 명시된 법의 준수를 강요하는 유대주의자(Judaizer)들을 비난하면서 바울로는 율법 이전에 또다른 하느님의 섭리가 존재해 왔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으로, 하느님께서 이미 맺어주신 계약이 후에 율법이 생겼다고 해서 소멸되거나 그 약속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고 가르쳤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계약의 완성이며(갈라 3:15-18) 따라서 구원은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구약이 무상의 경륜(gratuitous economy), 즉 하느님이 스스로 설정하신 언약의 경륜에 포함되는 것이며, 신약은 경륜의 절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지만 계약에 대한 동일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 의해 사제인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sanctuary of heaven)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그는 영원히 하느님과 우리와의 친교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 이를 통해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 계약이 성취되는 것이며(히브 8:8-12, 예레 31:31-34) 이는 더좋은 계약의 중재자 즉, 그리스도에 의해 맺어진 보다 나은 계약으로(히브 8:6, 12:24) 처음의 계약과 마찬가지로 피에 의해 맺어진 계약이나(히브 19:20, 출애 24:8) 이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 자신의 피인 것이다(히브 9:11 이하). 유언자가 죽는 순간부터 유언장에 효력이 발생하듯이 예수가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약속된 유산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히브 9:15 이하). 구약은 상징과 암시에 의한 불완전한 계약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최고사제이신 예수가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히브 10:1-22) 완전한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죄악의 씻김과 인간과 하느님의 결합은 모두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그는 “영원한 계약의 피를 흘려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것이다(히브 1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