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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주제 : 하느님의 뜻을 생각함
오늘은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요즘에는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세상의 일을 설명하는 데에서도 듣습니다만, 본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속성’을 사람이 알아듣기 위해서 신학에서 사용하던 어려운 표현입니다. 심오한 것이므로, 친절한 신학적인 설명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인데, 세상에서도 이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로 생각해도 될까요?
삼위일체라는 ‘하나가 셋이라거나, 셋이 하나이기도 하고,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대상이 힘이나 능력이나 영광 등 그 어떤 것에도 차이가 없다’는 이론을 전제로 할 때에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신앙에서 사용하던 이 표현을 세상에서 사용하는 것이 내심 걱정된다는 얘기는, 세상일에는 신앙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성을 지닌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신앙의 용어인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을 옛날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요즘의 사람들이, 옛날에 살던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에 더 큰 존경심을 갖고 지혜와 지식이 많아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뜨끔해집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시라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달라질 것일까요? 또한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의 삶에는 어떤 것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질문한 이 두 가지는 사실 인간이 가진 오만한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의 뜻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께서 세 가지 위격인 다른 모양과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사실은 한 실체’라는 표현인데, 세상에서는 세상에 대한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 하느님에 관한 것을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표현들은 알아듣기가 더 어려워진 세상이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라고 알아듣는 제3위 위격입니다. 우리가 제1위격인 성부, 제2위격인 성자라는 표현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서 구별하고 사용하는 표현입니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제1,2,3위격이라는 표현은 힘이나 능력의 차이가 아니고, 하느님의 힘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드러난 순서에 따라 붙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시라고 말하고, 성자는 성부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사람으로 나시어 목숨을 내어놓고 죽으신 하느님이었으니, 성부보다는 등급이 떨어지는 하느님이라고 말하던 과거의 이론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령이신 하느님은 성자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낸 역할을 마치고 하늘로 오르신 다음에 예수님보다 늦게 등장하신 분이라서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돼있다거나, 세상에서는 죽음의 길을 간 성자보다는 힘이나 능력에서 더 나은 분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주장에 따라 ‘아리우스 이단(異端)’이 나왔고, 1054년에 ‘동방정교회’와 같은 교회의 분열이 생겼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이렇게 나누고 구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효과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신학적인 내용을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해결된 문제이기에 제가 짧게 설명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의 생각을 담아서 사람들이 이렇게 구별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똑같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서도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으로 구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잘못된 자세가 생겼다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일이 더 계속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지난 5월12일에 ‘대통령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난자(0)/체세포(X)> 배아복제연구를 다시 허용하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먼저 태어난 인간들에게 생긴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생각과 미래먹거리를 다른 나라보다 먼저 차지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는 일일 텐데, 일이 이렇게 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도움이 될 결과를 찾는다는 목적으로, 미래에 인간이 될 수 있는 귀중한 존재를 내가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니, 지금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태도는 과학의 오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도전하면, 당장은 인간의 가치가 높아지고 권리가 많아지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중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할 대상을 함부로 대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편리에 따라 이리저리 내 맘대로 대해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오늘 기억하는 삼위일체대축일, 하느님께서 세상에 하신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세상이 하느님을 올바로 공경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마르코 10,17-27
주제 : 사람이 세상에 사는 목적(!)
삶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누구나 바랄 일입니다. 좋은 일이라면 없어도 생기게 해야 하고, 내게 찾아오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데리고 오거나 끌고 와야 마음에 든다고 할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내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내게 미소를 지을지 그것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내게 나쁜 일은 내가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갈 것도 아닐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일은 그저 오라고 손짓한다고 해서 내 삶을 향해서 달려올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나쁜 것이라면 나에게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좋은 것이라면 내게 잘 올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야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아주 손쉬운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고 싶습니다. 손쉬운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고. 여러분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말을 해주겠습니까? 사람은 질문을 한 다음에, 손쉬운 방법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테니, 크게 잘못된 일도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질문에 우리가 하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4계명부터 8계명까지를 말씀하십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하여, 7계명은 아니지만, 그 7계명을 확장시켜, 내가 가진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가능한 소리이겠습니까? 묘하게도 예수님께서 자신감으로 똘똘뭉친 자세로 다가와서 놀라운 가르침을 물었던 그 사람은 재산을 나누는 일에 부딪히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떠납니다.
사람이 재산이나 돈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어려운 일이고, 많은 사람이 그에 걸려서 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목적을 짧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하느님의 뜻을 충분하게 익히고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손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삶의 목적을 영혼의 구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한다면, 베드로사도가 알려주는 방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마르코 10,28-31
주제 : 사람이 드러내는 자신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두고 삽니다. 많은 경우 그러할 테니,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다른 소리를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외눈이들이 사는 나라에 살게 된 쌍눈이’의 신세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세상에서 사는 자세에 대한 판단과 올바른 행동이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행동이나 의도는 의미가 없는 소리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갖거나 가져야 삶의 원칙을 신앙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하는 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강요할 명분도 없습니다. 오늘 읽은 독서에서 베드로사도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영혼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사도의 이 말씀도 두 가지 입장에 처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중요한 요소가 있는 말씀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사람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 저렇게 자신감을 듬뿍 담아서 말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라고 말하며 다른 판단을 하고 다른 생각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의 뜻은 ‘내 맘대로 해도 좋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는 일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남길 수 있는 자신감은 언제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사도가 보인 자신감은 오늘 복음말씀이 전합니다. 전해오는 내용에 따르면, 베드로사도는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가 어땠는지에 대한 것은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결혼을 했고 갈릴리호수에서 하던 어부생활을 내려놓고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나섭니다. 그 일을 표현하기를 베드로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겠지요?
삶에는 투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내가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사도가 보였던 열성을 우리가 간직할 수 있다면, 그래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흉내가 아니겠지요? 하느님께 정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연중 제8주간 수요일
■ 마르코 10,32-45
주제 : 신앙인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삶
사람의 삶에는 힘든 일도 쉬운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가오는 일들을 대하는 것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삶에서 힘든 일만 겪는 사람도 없고, 쉬운 일만 즐기면서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마다 삶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쉽다거나 어렵다는 평가를 다르게 합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이 힘든 일을 만나기를 좋아할 것이고 힘든 일과 부딪혀서 자신은 늘 이길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이왕이면 쉽고 편한 길을 찾고, 이왕이면 힘들지 않은 일들과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이론은 이러해도 이 이론대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어디에 원인이 있겠습니까? 원인을 알아야 과정을 수정하고, 결과를 좋게 할 것인데,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켜서 간사하다고 말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평가라고 하겠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한 제베대오의 아들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데, 하늘나라에서 실현될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문제를 질문합니다. 이 형제들에게 욕심이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꾸짖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대신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대신 질문해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사실상 특별한 자세로 자기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꾸중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의 골자는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소리를 듣고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 소리는 우리의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의도를 담아서 전달하는 소리라고는 해도, 세상의 그 모든 소리를 우리가 다 들을 수 없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삶의 길을 따라야 할까요? 이런 질문에는 정답을 앞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말씀과 뜻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세상의 삶에 힘든 것과 쉬운 것이 있고, 찬성과 반대가 있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따르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걱정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 말씀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마르코 10,46-52
주제 : 내가 원하는 것(!)
사람은 삶에서 원하는 것이 많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바람이 있기에 세상이 좀 더 낫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해낸 좋은 결실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남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바란다고 하는 것은 개인만 갖고 만족해 할 물질의 분야를 초월했을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 한다고 말하는 기도도 청원을 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흔히 4가지를 말하고, 그중에 청원은 가장 낮은 단계로 말합니다만, 사람이라면 청원을 가장 크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바르티매오도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알렸기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고, 바람을 직접 말씀드릴 수 있었고, 예수님의 선언이 자기에게 실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한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신앙을 가진 개인으로서 얼마만한 정성으로 그 일을 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일어난 일을 전하는 내용을 복음으로 들으면서, 우리가 가질 자세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이겠는지, 세상에 실현될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내 삶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려면, 내가 하느님의 앞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필요합니다. 내가 축복을 얻을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은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일일 실제로 자신의 삶에 가능하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가 삶의 기준을 두어야 할 ‘살아있는 돌’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초석(礎石)/머릿돌’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삶의 기준은 중요합니다. 축복을 얻기 위한 자세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조건이 그것입니다. 더불어 이웃을 돕는 자세를 실천했던 필립보네리 성인도 함께 기억할 날입니다. 그분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셨고, 종교분열의 시기에 성지를 찾는 가난한 순례자들을 돕는 형제회를 조직했고 훗날 사제로 활동한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마르코 11,11-25
주제 : 교회에서 종말을 얘기하는 이유(!)
세상에 태어난 누구에게나 끝은 서글픈 일입니다. 모든 끝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치루거나 한 달을 다 보내고 급료를 받을 때의 끝은 의미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끝은 서글픈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것에도 삶의 원칙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내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큼은 반드시 실현돼야 하는 삶의 원칙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세상의 다양한 일들을 대하면서 잘 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한다면 충분히 좋은 자세일까요?
오늘 독서말씀에서, 베드로사도는 종말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종말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명사(代名詞)가 종말일 것입니다. 낱말풀이에 나오는 종말(終末)의 뜻은 ‘계속된 일이나 현상의 끝’이라고 설명하기에 그다지 심각한 느낌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을 말이 종말이라는 표현입니다.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세는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종말을 말하는데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이론과 실제가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이 내게 닥치기 전에, 내가 벌어놓은 것을 모두 다 써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 세상에서, 베드로사도는 세상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말하는 이 사랑의 실천은 내가 삶에서 만든 삶의 결과인 죄를 없애거나 그것이 내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는 결과를 얻을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성격이 급한 분으로 소개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화풀이하시다니....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자유이기는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삶에서 어떤 다짐을 하고 삶에서 그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해도, 그것은 내 판단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처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해서 다른 행동을 했는데, 그 결과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에게 항의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고 무화과나무는 아니기에, 당장 말라죽을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가 내 삶을 판단할 때에 내가 올바른 결실은 만들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준비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