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에세이문예 겨울호
세상을 바꾸고 싶은 당신, 혁명의 관점과 언어로 무장하라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우연하게도 이번 에세이문예 겨울호 권두언 내용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하다가 유튜버를 검색하게 되었는데, 2022 봉하음악회 김제동 토크콘서트 영상을 보게 되었다. 구수한 그의 입담을 누가 따라 잡으랴. 본론에 들어가기 전 그는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혁명을 꿈꿉니다. 혁명, 혁명, 혁명, 제가 생각하는 혁명은 높은 데 있는 것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고 낮다고 여겨진 왔던 사람들의 위치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해놓고 세상을 떠나는 게 내 임무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객체가 되어본 적이 없는 타자들을 객체로, 또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다는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이 떠올랐다. 이 장면을 보고 나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면 객체의 주체화를 시도하는 혁명의 시선과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관점이 곧 우리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망친 상징계에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을 떠올려보면 ‘객체’를 가벼이 볼 수 없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전쟁광들과 이상기후로 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또 그 반대편 도심의 거리에서는 구멍 난 안전망으로 많은 사고들이 발생한다. 이 행위소들은 얼핏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로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인간중심주의가 낳은 벼랑 끝에 다다랐다는 지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일상적이다 못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그리고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없이 일터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짝패처럼 엉겨 있는 현실에서, 과연 탈인간중심주의, 탈이분법의 삶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단절과 소외, 불통과 불공정의 현실에서 손쉽게 풀 수 없는 복잡한 맥락들이 존재하지만,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에 이르러 아직 나아갈 담론의 양상을 뚜렷이 명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비판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숨 쉬고 살고 있는 개인 주체들에 천착하는 인간중심주의 서사, 그리고 문학 속 의인법이라는 수사법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호흡은 생명을 가진 존재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중심주의 생태계 속에서 생명체만 호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생태계적 사고는 생명체를 주체로 놓고 사물을 그 대상으로 생각하는 관점이다. 상관주의는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로 성립된다. 사물을 ‘대상’으로 놓는 상관주의에서 벗어나 그것을 ‘객체’로 명명하는 순간,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생명에게 필수적인 호흡의 행위가 환풍기라는 사물에서도 일어난다. 벽에 전시된 그림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행위소연결망 이론이나 객체지향존재론을 배우고 나면, 그림은 화가뿐만 아니라 시간과 먼지 그리고 빛이라는 객체가 함께 공동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주체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대상을 객체로 인식하는 순간 이내 우리는 생물과 무생물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은 사물 또는 객체(object)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객체 지향 존재론’을 정교하게 구축했다. 객체에 대한 하먼의 정의와 이에 기반한 객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은 객체인데 우리는 객체를 중심으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해 왔다고 주장하는 하먼 철학의 근거가 된다. 즉, 주체-의식 철학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것, 즉 객체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중심주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이 끔찍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지식이 바로 객체 지향 존재론이다. 제이슨 델 간디오 미국 템플대 교수는 “혁명은 가능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하였다. 따라서 관점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적 자기반성을 통해 하먼의 주장에 귀를 기울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