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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먹을 것을 앞에 잔뜩 놓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니?”라고 물었더니, 자기는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운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과 엄마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그렇게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는 “어른보다 낫구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일단 눈앞에 먹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아이는 엄마가 “먹으면 안된다”라고 했기 때문에 울면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말씀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안일한 가운데 사치와 향락의 생활을 하면서 환난 당한 자와 약한 자를 생각지 아니하면, 흉한 날 심판의 날이 닥쳐서 기지개 켜고 지절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없어지고 다 사로잡혀 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대해서는 전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 지 우리 신앙과 인생의 교과서로 하나님께서 주신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성령 충만했을 때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했을 때는 현실과 타협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에 대한 관념이 없거나 돈벌이 재주가 없는 것도 죄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죄는 성령충만하지 않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 뜻대로만 살아가는 파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은 닥쳐온 모든 일들을 해결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결국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인생속에서 멸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안정적인 사회를 추구하고 발전한 도시를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추구하며 너무나 현세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경제적 호황, 사회적 번영, 강한 군사력 등 이런 것을 믿고 자신들은 너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점검하며 정말 우리는 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의 신앙을 다시 원위치로 바로 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 첫째는 지도자들의 허황된 자신감이었습니다.
아모스 6장 1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오늘 성경에서 지칭하고 있는 도시 ‘시온’은 남쪽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마리아의 산’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은 모두 그들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오늘 아모스 선지자는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악도 모르고 있고 그 죄로 인해 닥쳐올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든 자신들은 선택된 민족이기에 안정만 있고 번영만 있을 것이라고 자만심에 빠졌고 자기 위로속에 잠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자처하기 때문에 저들은 안전하다고 믿어왔는데 이것은 참 신앙에서 나온 자신감이 아니라 허황된 교만심이며 잘못된 신앙가치관입니다. 이미 나라의 한 쪽에서는 타락과 멸망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토가 조금씩 잠식되어 가고 있는 상태인데도 나라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지도자들의 죄를 살펴보십시오.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4절을 보니 “상아 침상에 누워 기지개 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보니 “어린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니 “비파소리로 노래부르며 자신을 위해 악기를 만들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니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값비싼 기름으로 몸에 바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호화스러운 삶을 살며 향락도 이런 향락이 없을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진귀한 것들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누리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사실 더 큰 문제는 축복을 축복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만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려울 때를 생각하며 대비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야할텐데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잘못이 오늘 본문 아모스 6장 6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일단 6장 6절 전체를 같이 읽겠습니다.
아모스 6장 6절입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일하고’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교만하게 될 때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난과 능욕의 날을 생각하여 조심하고 환난 당한 자와 약한 자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너무나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퇴폐와 낭비하는 삶을 사는 것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삶을 살면서도 어려움의 경험, 역사가 가르쳐준 힘든 고난의 시기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읽은 본문 아모스 6장 6절의 후반부를 보십시오.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현재 그들은 고난과 환란 때는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힘든 때 어려운 때를 걱정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일에 빠져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육신의 향락으로 인해 영적인 삶, 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성경 말씀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는 말씀도 있고 방금 읽은 성경 디모데전서에서는 ‘향락을 좋아하는 것은 이미 죽은 삶’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안일과 세상의 쾌락, 세상에서의 향락을 즐기는 것은 결국 죽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향락과 쾌락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일서에서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만들고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며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정욕에 물든 세상을 벗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책망하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이 세상의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사람은 '내세 천국보다 멸망 받을 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라고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사람은 이 세상 죄악에 빠지기 쉽고 천국보다 세상에 마음을 더 빼앗기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은 삶에 안일하며 온갖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면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적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점검하지 말고 영적인 관점으로 우리를 점검해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돈이 잘 벌리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주변의 삶에 항상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정말 영적인 축복으로 이 일들이 잘 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이런 일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인지 깨달을 때 정말 축복이 진정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와닿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것을 잘 발견하는 영적인 눈을 가지기를 소망하고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도 잘못된 꿈, 허황된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복의 사회를 추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 둘째는 남은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잘못입니다.
아모스 6장 9절입니다.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나라에 환란이 찾아오고 계속되는 이방나라의 침입속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더욱이 전쟁에서 승리라도 하면 걱정을 덜 하게 될텐데 예전에는 강력했던 왕국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계속 패배를 하니 염려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결국은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악한 전염병은 계속 일어나고 온갖 재앙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도 어떻게든 재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사람들마저도 이제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이 찾아오고 재앙의 상황이 생길 때 이스라엘이 회개해야 하지만 오히려 아직 우리에게는 남은 사람이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모든 전선을 이끌고 나갔다가 전선 모두 잃고 12척만 남기고 원균마저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명받고 명량해전을 준비하던 이순신은 이 참담한 현상에 좌절과 낙담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면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다며 임금인 선조에게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며 결사항전 수군으로 전투할 것이라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런 자존심이라면 나라를 구할 자존심이 될 것입니다. 이런 객기라면 정말 하늘도 감동할 자존심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인해 죽을 상황인데 회개함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다 죽고 이제 곧 또 죽을 사람들만 남았음에도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돌아올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제 남은 열 사람도 다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상황에 왜 놓이게 되었을까요?
바로 앞 구절 아모스 6장 8절을 보십시오.
아모스 6장 8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징계를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는 징계라며 이스라엘을 향한 징계의 엄중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고 계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킴으로써 부흥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없이, 십자가 없이, 죄에 대한 애통함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했다면 그것은 야곱의 헛된 영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흥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은 빌딩을 짓고 행복하게 살아도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뭔가 복받은 듯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면 이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부실공사로 지은 건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해 보여도 실상은 언제 큰 화를 당할지 모를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17시 52분경,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되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며 1,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서울 강남 서초구에 초호화 명품전문 백화점이라고 이름하며 외형이나 내부 판매품이나 초일류라고 자부하던 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해도 내부적으로 부실한 공사를 하고 관리가 부실했으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예견된 인재라고 수사당국은 발표했습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결국 처참한 결과, 큰 화가 있을 결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단지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단지 부흥하는 것에 결과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적 성공, 교회적 부흥이 목표라고 할 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인간적인 노력을 할까요? 어떻게든 인간적인 노력을 동원해서 내 힘으로 성공하고 내 힘으로 부흥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성공, 그런 부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방금 읽은 본문에서 “야곱의 영광”은 하나님 축복의 결과인데 이 결과를 가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오히려 미워하고 싫어하는 ‘야곱의 영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영광”이 있었으면 이스라엘이 더 큰 은혜를 체험해야 할 텐데 오히려 “야곱의 영광”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이뤄낸 듯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신들의 권력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이니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자존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살고 하나님앞에 우리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데.. 내가 어떻게 이런 결과를 이뤄냈는데라고 말함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없이 내 힘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높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 마지막 셋째는 결국 침략받고 멸망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6장 14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방금 읽은 아모스 6장 14절에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라며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택하여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이스라엘을 노략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방나라를 통하여서도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아모스 6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공의를 지키지 않고 불법과 편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이 옳다고 핑계대는 것은 모순된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12절에 보시면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 6장 12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말을 타고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바위는 절벽입니다. 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또 소로 아무리 바위를 갈아본들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헛된 짓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이스라엘이 이제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고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고 쓴 맛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꾼다는 말씀은 이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여기 ‘쓴 쑥’이라는 표현을 쓴 곳에 예전 한글성경에서는 ‘인진’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이전 말씀 시간에 들었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열매가 쓴 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악한 삶을 살았으며 공의의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을 쓴 세상, 악한 세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바로 이런 헛된 짓들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행복해지는 것은 말을 타고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처럼 위험한 짓이며, 또 소를 몰고 바위 위에 쟁기질하는 것처럼 헛된 짓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물같이 하수같이 흐르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아무리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한다 해도 막힘없이 선포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를 쓸개로, 공의를 독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자기 욕심대로 살 수 없으니, 말씀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가니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처럼 인간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가니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방종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을 타고 절벽을 달리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신앙생활은 바위에 쟁기질을 하는 헛된 짓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거부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막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에 대한 집중적 관심,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한 생활에 우리의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침략이나 멸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복된 말씀속에서 우리를 재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으로 현실적으로 그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마지막 14절에서 군사적으로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한 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자만심, 자존심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역사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내 맘대로 살아가며 나의 만족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능력이나 나라 민족의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때 축복을 축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면하고 무시하면 축복이 찾아와도 그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온갖 감사의 제목, 축복의 일들,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좋은 일들이 찾아올 때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려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겸손하게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을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보게 되어 축복의 번영을 멸망의 저주로 만들어버린 이스라엘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가정과 우리 나라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