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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들이 제를 올렸던 당인동 부군당
당인동 부군당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당인동 15-3번지에 있는 마을당이다.
100여 ㎡의 국유지에 두 칸으로 된 목조기와집으로, 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면적 14㎡로 된 가로 4m, 세로 5m
규모의 당집이다.
두 짝으로 된 부군당 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당이 들어앉은 자리는 예전에는 165㎡ 정도였으나 현재는 좁아진 상태이다.
당 내부 천장 대들보에 “단기사이팔칠년갑오 구월이십구일미시 상량(檀紀四二八七年甲午 九月二十九日未時 上樑)”
이라고 기록된 상량문을 보아 1954년에 당을 새롭게 손질하면서 현재의 규모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부군당은 원래 현재의 위치보다 높은 산 쪽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군당이 있던 땅이 이참판댁 소유였고, 그곳에 묘를 쓴다고 하여 당을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을 옮기고 나서 그 동네 처녀 총각들이 놀아나고 또한 당인리발전소가 들어서게 되자 195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다.
따라서 당인동부군당은 세 번의 이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982년에는 당 내부 단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그러나 당에 모셔진 신령 그림들은 1912년 무렵에 백년사에서 조성해 온 것으로, 당을 옮길 때 새로 제작한 것이다.
오른쪽 벽면 오른쪽에 좌제장군(左諸將軍), 왼쪽 용궁부인, 사운데 맨 오른쪽부터 삼불제석・산신・부군・부군부인,
왼쪽 벽면 우측에 대장군, 좌측에 우제장군(右諸將軍) 등 총 여덟 분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 신령 그림들은 촛불과 향불에 그슬리어 형체가 변화되자 1970년대 들어서면서 마을 주민들이 그림의
선명도를 높이려고 은빛 색을 덧칠하였다가 손상되어 원래 모습도 잃고 말았다.
과거에는 부군당과 관련된 터주가리(터주신의 형체, 높이 1m정도)가 절두산 근처에 모셔져 있었고, 커다란 느티
나무가 강변도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고 길이 나면서 공사로 인해 나무도 죽고 말았다.
그렇지만 부군당 제의를 지내게 되면 느티나무 시루를 쪄서 당 내부에 바쳐 목신을 위한다.
부군당이 들어서 있는 당인동은 한강 인근이다.
그리고 당인동은 원래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였다.
과거 당인리에는 배 부리는 사람, 뱃일 하는 사람, 창고업 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이 많이 살았다.
특히 배를 부리거나 뱃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기잡이배는 강화 앞바다와 연평 칠산리 근처까지 가서 조기잡이를 하곤 하였다.
이에 따라 이곳 사람들은 물길에 대한 불안과 함께 그에 대한 신앙심이 누구보다도 컸었다.
부군당을 모시게 된 까닭도 그러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뱃일을 하는 마을 주민들이 물에서 변을 당하지 않기를 늘 부군당에서 빌었던 것이다.
또한 마을이 부군님을 모시고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자 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마을에 부군당을 모시고 있는 까닭으로 6․25전쟁터에 나가서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왔다고 믿었다.
서울 당인동 부군당제는 음력 시월 초하룻날에 지낸다. 제의에 드는 비용은 동네 사람들의 추렴으로 마련하였지만
현재는 일절 돈을 걷지 않는다.
관할구청에서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찬조금을 내는 사람이 있어 빠듯한 구 보조금에 보태어 쓴다.
과거에는 제비를 반장들이 걷었으며, 동네에 오래 살아온 50여 명이 5,000원 정도씩 냈었다.
현재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굿을 안 한 지 오래되었지만 과거에는 굿을 하게 되면 무당에게 10만 원을 주는데
무당 세 명과 악사 두 명이 왔었다.
제물은 음력 구월 그믐날부터 준비하게 된다.
팥시루는 열두 시루를 찌며, 흰 종이에 신령의 이름을 써서 시루에 붙인다.
이를테면 부군 시루, 산신 시루 등이다.
삼불제석 몫으로는 백설기를 쪄서 올린다. 인절미는 비교적 크게 썰어 신령님 전에 올린다.
과거에는 제의 하루 전날 밤에 떡을 직접 장만하였지만 근래에는 제의 당일 오전에 떡방앗간에서 주문한다.
당인동 부군당제의에서는 검정 수퇘지를 쓰며, 이를 당주 집에서 잡는다.
굿을 하는 경우 통돼지를 쓰고, 굿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열두 각을 떠서 사용한다.
준비되는 제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팥시루, 인절미, 흰 절편, 송편, 백설기, 찹쌀전병, 돼지고기(돼지머리 포함), 명태, 북어, 시금치, 숙주, 메, 탕, 두부,
꼬치구이, 산자, 약과, 튀각, 부침개, 녹두빈대떡, 사과, 배, 감, 밤, 대추, 곶감, 술 등이다.
과거 이곳 부군당에서는 매년 큰굿을 하였다. 그
러다가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3년마다 굿을 하기도 하고 굿을 못하는 해도 있었다.
지금은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룻날 치성의례만 간단하게 올린다.
제를 지내기 3~4일 전에 당으로 가는 길목에 금줄을 친다.
과거에는 제의를 지내기 위해 화주를 선정하였고, 제의 날이 결정되면 동네에 금줄을 쳐서 부정한 자의 접근을
막았다.
집에 초상난 사람은 동네에 들어올 수 없었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또 산달이 다 된 여자가 있으면 다른 동네로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특히 제주는 부정한 일을 하면 안 되었다.
당인동 부군당제 제주는 이곳에 4대째 살고 있는 김윤식이 맡고 있다.
김 씨는 제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하고 제주를 맡는다. 제관은 당일 제의 참여자들 가운데 집안에 부정을 탈
만한 일이 없는 사람 4~5명이 맡는다.
제의에 참여하는 동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하게 한다.
당제를 무녀가 주관하는 굿으로 거행하던 과거에는 제의를 오전에 시작하여 오후까지 하였지만, 마을 주민들이
간단한 유교식 제의로 행하는 현재에는 오전 10시쯤부터 시작하여 11시쯤에 마친다.
요즈음 들어서는 사람들이 잘 모이지도 않아 오후 느지막하게 시작하여 간단하게 지내고 끝낸다.
한편 제의를 행할 때 여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피부정(월경)을 보지 않을 나이가 된 60대 이상의 할머니는 당 출입을 할 수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제의에 1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먼 곳으로 이사 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의 때는 참여하는 사람이 꽤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참석자가 점점 줄어서 30여 명 정도가 모인다.
마포구청장, 지역구 국회의원, 구의원, 서울화력발전소장 등도 동참한다.
과거 무녀가 주관할 때에는 당주로 활약하던 정복만 무녀가 주축이 되어 당인동 부군당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유교식 제의를 행하는 현재는 당인동정화관리위원회와 당인동선후회(先後會) 소속의 남자 회원들이 주관
하여 지낸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성주모시기 : 당제에서 각별하게 준비하는 것이 성줏대이다.
성줏대는 이른 아침 인근 와우산에 올라가 길이 1m가량의 참나무를 꺾어와 사용하였다.
성주쌀을 담아둔 성주받이에 성줏대를 꽂아서 제물상 앞에 세워 두었다.
성주쌀은 애초부터 몫을 정해 한 말로 준비하였다.
대잡이가 오른손으로 성줏대를 잡으면 주위 사람들이 옆에 서서 손을 비비며 성주신 내리기를 축원하였다.
한참 후 성주신이 내리면 대잡이 손이 떨렸다.
대잡이는 성주신이 하자는 대로 행동을 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다녔다.
대잡이가 성줏대를 흔들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곳에 당도하여 성주신이 좌정할 곳이 정해지면 그곳에
성줏대를 붙였다.
그리고 이곳에 떡과 술이 차려진 성줏상을 놓고 제를 지냈다.
이렇게 성주신을 모신 뒤 다시 당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근래에는 성주모시기를 하지 않는다.
2. 당제 : 당 내부 신령님 전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주, 제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축문낭독은 없다.
3. 소지올리기 : 굿을 하게 되면 당주무녀가 소지를 올린다. 그러나 굿을 하지 않는 때에는 마을 주민들이 각자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서 축원하는 내용은 “김 씨 가중에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지내고 태평성대하고 만수무강하게 해
주십시오.”이다.
4. 반기돌리기 : 의례가 끝나면 간단한 떡과 과일을 집집에 돌린다. 이를 ‘반기돌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추렴에 참여한 집에만 반기를 돌렸다.
그러나 지금은 추렴을 하지 않아도 마을 토박이일 경우 반기를 돌리는데 그 대상은 60여 집 정도가 된다.
국가적 제례를 지냈던 서울 국사당(國師堂)
‘목멱산대천제(木覓山大天祭)’는 조선 건국 이념을 담아 계승된 산천 신앙의 한 축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종묘와 사직에 제를 지내면서 목멱산에도 대천제를 올렸다.
범민족적 산악숭배 사상을 표방하고 천지를 감동케 하여 나라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시화연풍(時和年豊, 시절이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목멱산대천제는 나라 안녕과 백성 통합을 위한 국중행사와 다를 바 없이 겨레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문화의
뿌리를 되살리고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범국민적 축제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해발 270m 높이의 ‘목멱산(木覓山)’을 ‘남산(南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조선에서 정궁으로 삼았던 경복궁(景福宮)
맞은편인 남쪽에 있으면서 조선시대 한양의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한성부를 지켜주는
수호산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그리하여 남산(南山)은 북악산(北岳山), 낙산(駱山), 인왕산(仁王山)과 함께 서울 분지(盆地)를 둘러싼 자연 방벽으로
역할 하게 된 것이다.
한양 성벽(城壁)도 이와 같은 사산(四山)의 능선에 따라 쌓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또한 그러한 균형
위에서 정해진 것이다.
이처럼 남산은 옛 한양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주요 산으로 역할 하면서 옛 도성 구역을 표시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 일본 제국주의가 남산 기슭에 127,900여 평의 조선신궁(朝鮮
神宮)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이때, 남산 꼭대기에 있던 목멱신사(木覓神祠) 국사당(國師堂)을 못마땅히 여겨 강압적으로 인왕산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때부터 국사당의 수모는 본격화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시대 말엽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국사당의 국가적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궁궐 별궁(別宮)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거나,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들러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명성황후 또한 나인들을 시켜 치성을 드리곤 하였으므로 국사당 존재 가치는 나름대로 살아 있었다.
과거 국사당과 남산의 관계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면, 태조 5년 12월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태종 4년 9월에는 목멱대왕을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국사당에서는 개인적 사적 제사들은 모두 금하고 국가적 행사만을 치르게 하였다.
태종 8년 5월과 태종 9년 7월에는 국사당에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이러한 국가적 제례는 고려 시대에도 지냈던 것인데, 이를테면, 하지(夏至)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비 오기를 비는 기우제와 입추(立秋)가 지나도록 장마가 계속될 때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이다.
이와 같은 제례를 위해 태종 12년 2월에는 국가에서 신주(神主)를 정하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3권에 보면, 국사당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도 지냈다.
초제의 주요 대상은 오성(五星) 또는 혹성(惑星)이다.
땅에 오행이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도 동쪽의 목성(木星, 세성-歲星), 서쪽의 금성(金星, 태백성-太白星),
남쪽의 화성(火星, 형혹성-熒惑星), 북쪽의 수성(水星, 진성-辰星), 중앙의 토성(土星, 진성-鎭星) 등 태양계에서 지구에
가까운 목성, 금성, 화성, 수성, 토성으로 된 다섯 개의 오위(五緯)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를 대상으로 수재나 가뭄 등 재난이 있을 때 ‘소재기양(消災祈禳)’, 곧 재앙은 물러가고 복이 오기를 빌거나, 성변(星變), 곧 별의 위치나 빛에 생긴 이상에 따른 진병(鎭兵) 곧 난리를 진압하는 군사적 행동 그리고 임금,
왕비 등의 역질(疫疾)에 따른 치유기도(治癒祈禱) 등을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같은 해 곧바로 조선신궁은 사라졌다.
신궁 터에는 남산식물원과 백범공원이 들어섰고 신사참배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93년이 지난 오늘, 국사당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서 있다.
1925년 인왕산으로 옮겨진 국사당은 이때부터 사적 재산으로 실추되었고, 오늘날에는 상업적 굿당으로 전락하여
과거의 위엄이나 위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남산 제모습찾기운동이 시작되면서 1970년대부터 관 차원의 남산성곽보존정비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는 남산복원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부분적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국사당을 비롯한 목멱산대천제 등 유무형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정책적 대안은 보이질 않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사당 원위치 복원 운동은 민간 차원에서 전개되어 온 까닭으로 미흡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중 2017년 말, 필자를 비롯한 남산도깨비문화원 김재연 원장 및 뜻있는 관련자들이 모여 <목멱산대천제
보존회(木覓山大天祭保存會, The Mongmyeok Mountain Ritual Preservation Society)>을 결성하여 서울특별시로
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인 국사당원위치복원 운동을 비롯한 국중행사로써의 목멱산대천제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인왕산에 있는 현재의 국사당은 기와로 된 건축물 1동이다.
평면으로 된 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주간(柱間)으로 되어 있다.
기둥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절의 법당이나 큰방의 한복판) 약 2.6m, 협간(夾間, 어간의 좌우 양쪽에 있는 방)과
측간(側間)은 각각 2.4m로 되어 있다.
내부 넓이는 모두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는 뒤에 덧붙인 온돌방이 있다.
국사당이 원래 자리에서 떠나와 있긴 하지만 유산의 가치에 대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1970년 국사당 내부에
있는 무신도 21점을 비롯한 명두(明圖, 무속인이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고 위하는 거울) 7점 등 모두 28점이 서울
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 국사당 건축물이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백과사전 형식으로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 보면,
국사당 이름과 신도(神圖)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현재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국사당 신도들은 신당 정면 및 좌우 벽면에 걸려 있다.
그것들은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한 아태조비 강씨부인(康氏婦人), 호구(戶口, 홍역을 관장하는 신)아씨, 용왕대신(龍王
大臣), 산신(山神)님, 창부씨(倡夫氏, 이름 높은 광대가 죽어서 된 신), 별상님(나라와 집안의 태평과 복을 도와주는 신), 무학대사(無學大師), 곽곽선생(중국 동진-東晉의 학자 곽박-郭璞을 잘못 전해진 말) 《산해경(山海經)》, 《수경(水經)》
등의 저자이며 경학(經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과 역수(易數, 음양으로써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내는 술법) 등에
능하였으므로 점술가들 사이에서 신격화됨),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懶翁)님(고려 공민왕의 왕사),
칠성(七星, 북두칠성)님, 군웅대신(軍雄大臣, 무관 출신 임금), 명성황후, 최영 장군 등이다.
(양종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