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에스라 제3강
선지자들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말씀 / 에스라 5,6장
요절 / 에스라 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지난 주일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적으로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적들의 방해로 시작하자마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무려 16년 동안이나 공사는 진전이 없이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성전 재건은 오래된 추억 속의 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어느 날, 성전공사가 재개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4년 만에 성전 건축 역사를 마치게 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5장 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성전 건축을 위해 먼저 선지자를 감동시키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예언하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도 의미하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에 대해 손을 놓고 있을 때 두 선지자가 일어났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학개 1장 4,9b절은 말씀합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기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개는 그들 속에 감추어진 죄를 드러냅니다. ‘판벽한 집’은 ‘판자를 댄 집’ 또는 ‘지붕이 덮인 집’을 의미합니다. ‘나무판자를 벽에 대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화려하게 꾸민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집안 내부를 최고급 원목가구나 최상의 대리석 제품으로 꾸몄다는 의미입니다. 또 ‘지붕이 덮였다’는 것은 ‘가건물이 아닌 완성된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은 이렇게 초라한 상태로 방치하면서 너희들의 집은 최고로 꾸미고 편하게 살고 완성된 집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집은 미완성의 상태로 두는 것이 옳으냐고 꾸짖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점점 현실과 타협해 갔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들 집부터 지읍시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닌가 봅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점점 자기 집 짓는데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2층으로 멋지게 집을 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숲속에 전원주택을 짓고 낭만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누가 더 멋진 집을 짓나”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집을 지어갔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할 때 누려보지 못한 풍요로운 삶을 마음껏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풍요롭고 행복했습니까? 학개 1장 6절에 보면, 그들이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구멍 뚫린 전대처럼 돈이 빠져나갔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불어버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니 일이 잘될 리가 없었습니다. 이때 학개 선지자가 일어나 외칩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1:8)
스가랴 선지자도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리지 아니하였느니라.”(슥1:3,4) 학개 선지자는 이제 일어나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악한 행위를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라고 촉구했습니다.
두 선지자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곧바로 일어납니다. 그들은 두 선지자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결단하고 실행합니다. 황폐한 성전 터에 다시 활기가 돕니다. 적막한 그 땅에 사람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스가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스가랴서 4장 6절의 그 유명한 말씀이 이때 나왔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성전 건축을 능히 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깁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페르시아 관리들이 찾아와 누구 명령으로 성전을 건축하는지, 공사 책임자는 누구인지 조사합니다. 막 재개된 성전공사가 또다시 멈춰 설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페르시아 관리들은 다시 시작된 성전공사를 막지 못합니다. 다만 성전공사가 재개된 사실을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왜 성전공사를 막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여기 ‘돌보셨다’는 것은 영어로 ‘watch over’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눈이 그들 위에 있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걸으려고 노력하는 봄별이를 뭇별.조안 목자님은 돌보며 봄별이 주변에 위험한 물건은 없는지, 봄별이가 혹시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을지 주의 깊게 관찰하며 아이를 보살핍니다. 좀 더 커서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갈 때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이처럼 돌보십니다. 시편 121편 4-8절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사는 우리를 어느 누가 해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는 가장 평온하고 안전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페르시아 관리들이 다리오 왕에게 ‘예루살렘 성전공사 진상보고서’를 올립니다. 6-17절까지입니다. 이 보고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사실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합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유다 사람들의 주장과 의견이 충실히 반영됩니다. 성전 건축과 관련된 모든 논란을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레스 왕의 조서에 대해 언급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이제 모든 것은 다리오 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피말리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이 과연 허락할까? 아니면 거절할까? 여기에만 매몰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입을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시므로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공사를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페르시아 총독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다리오 왕에게 호의적인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재건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시작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에스라서 1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스1:1,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4만여 명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인데 사람이 감히 이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어려움과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탄의 방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밀어주시면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미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그 선한 일을 성취하실 것을 믿습니다.
6장 1,2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페르시아 관리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다리오 왕의 마음과 생각도 주장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그리스까지 세력을 뻗은 엄청난 대제국입니다. 이 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다리오 왕에게 얼마나 많은 보고서가 올라왔을까요? 그 보고서 중 상당수는 왕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왕에게 전달되었다 해도 왕이 그 보고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지,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질지, 그 후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이 모든 것이 미지수입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 관련 보고서를 받고는 고레스 선대 왕의 조서를 찾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결과 메대도의 악메다 궁에서 성전 건축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고레스 왕의 조서가 발견됩니다. 악메다 궁은 해발 1,800m로 서늘하여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조서에는 성전 건축에 관한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크기는 물론, 그 경비를 왕실이 다 낼 것이며 느부갓네살왕이 바벨론으로 가져간 성전의 금그릇, 은그릇도 본래 자리로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조서의 발견으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고레스 왕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합법적인 것임이 밝혀집니다. “희미한 기록이 명확한 기억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또렷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흐려집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떨어집니다.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조서는 성전을 다시 짓게 하는 공증서와도 같습니다. 이 조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전 공사는 재개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다리오 왕은 하루아침에 성전 건축의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그는 고레스 왕의 조서를 기초로 새로운 조서를 내립니다. 다리오 왕은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을 아주 존경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고레스 왕의 조서 앞에서는 벌벌 떠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데 드는 경비는 왕의 재산과 세금 중에서 끊임없이 지급하여 공사가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그것이 수송아지이든, 숫양이든, 어린 양이든, 밀과 소금, 포도주, 기름까지도 제사장들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제공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그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페르시아 제국의 왕과 왕자들의 생명이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께 꽉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지원을 신속히 행할 것이고, 11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 그 집의 들보를 빼내고 그 위에 매달게 하고 그의 집은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는 무시무시한 포고문까지 덧붙입니다. 이에 관리들이 신속히 준행함으로 마침내 성전 건축하는데 있어 모든 방해 요소가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4,15절을 읽겠습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다리오 왕 제육 년 아달 월 삼 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리오 왕이 표면적으로 모든 요건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권면을 따랐으므로’는 영어성경에는 “under the preaching”으로 나와 있습니다. 즉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씀 아래서’ 건축을 계속했기에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들어가면서 건축을 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씀 아래 거하면서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형통의 비결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배가 뒷바람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듯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페르시아 관리들이 호의적인 상소문을 올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레스 왕의 조서 사본이 발견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리오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파격적인 지원을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29:7-9)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 앞에 심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2,3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순종하여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유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영접하고, 선지자들의 권면,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잠언 16:9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이시니라.” 우리도 나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당장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실상은 축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마침내 성전이 완공되고, 유다 사람들은 성전 봉헌식을 드립니다. 성전 봉헌에 드려진 제물은 수소가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 양 400마리, 그리고 숫염소 12마리입니다.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 드려진 예물의 숫자가 소 22,000마리, 양 120,000마리였던 것에 비해 200분의 1 규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봉헌식의 규모나 제물의 숫자가 아닙니다. 여러 고난의 과정을 겪은 후 드린 예물이라 그들의 기쁨과 감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격려해줍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9).
그들은 이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섬긴 그들의 손을 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서 8:10b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시편 92:4절도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니 하나님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내 인생을 best way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기쁨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기쁨, 나의 힘이 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성전 재건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성전 건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이방 왕들의 마음도 주관하시고 모든 과정 과정 속에서 순적하게 이루어지도록 간섭해 주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16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이 4년 만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삶의 형통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복을 인생 속에서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형통의 복들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