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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결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전쟁 막판 해방후에 형성된 38선을 목표로 수렴된 결과이다. 그러면서 마치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38선과 비슷한 영토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38선시절에도 경기만은 남한의 것이었던 것처럼 황해도 이남의 영해는 남한이 확보하였다.
그런데 원래는 이것이 39선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한다. 누가봐도 합리적으로 39선이 맞는 것이고 이왕 분단으로 형성될 거 39선이어야 한다.
그 증거로 역사적으로 한반도 남북국시대인 신라-발해의 국경선은 39선이었다.
38선과 달리 횡축이 가장 짧아진다. 강과 산악지형도 많아서 방어에 용이하다.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와 영토분할을 협상할때 대동강으로 추정되는 패수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원산으로 형성되었다.
1270년 대몽항쟁후 몽골에 영토일부를 할양할때도 황해도 황주에 위치한 자비령에서 철령 이남지역을 경계로 분할했다. 이 곳을 동녕부라 하는데 21년뒤인 1291년에 반환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39선이 언급되었는데 1903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있던 러시아는 39선을 두고 한반도 분할논의를 하기도 했다.
39선이 되면 경기북부가 소외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기만 일대가 안정적으로 확보된다. 영토가 3만2천km2가 늘어나게 된다. 대신 북한영토는 그 만큼이 줄어들 것이다. 39선은 평양의 턱밑에서 부터 강원도 통천까지 연결되는 선이다.
39선 보다는 못하지만 1951년 7월 휴전회담 개회 직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에 관한 논의 당시 유엔군 측에서 제안한 선은 해주-장전을 잇는 선이다. 지금의 휴전선과 비교해도 훨씬 안정적이다.
왜 38선으로 분할되었을까?
일반적으로 1945년 8월 10일 소련이 빠르게 남하하자 미국은 대통령 직속 최고안보기구인 3부 조정위원회를 열고 한반도 분할을 지시하였는데 실무자들이 30분만38선으로 제안했다는 것이다.
황당한 결정에 대한 의문은 2014년 에드워드 로우니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 '운명의 1도'라는 책에서 남북분단선 확정회의에 대한 당시의 목격담을 밝혔다.
책의 제목도 운명의 1도인 것처럼 의미심장하다.
당시 한반도 군사분계선과 관련된 전력회의중 딘 러스크 대령등 참모진들은 방어가 용이하고 횡축이 짧은 39선을 분계선으로 주장했으나 상관인 에이브 링컨(Abe Lincoln)이 굳이 38선을 우겨서 결정했다고 한다.
에이브 링컨은 당시 예일대 지리학교수인 니콜라스 스파이크만의 저서 <The Geography of the Peace>를 들먹이며 38선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세계의 문학과 발명품의 90%는 38선을 경계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이 문구를 보니 한 때 필독서로 학생들에게 많이 팔렸던 역사책 '총균쇠'가 떠오른다. 총균쇠는 유라시아가 아프리카보다 문명이 먼저 발전했던 이유를 지리적인 예를 들어 비슷하게 설명한다.
링컨장군의 주장이 얼마나 개입되어 38선에 결정적 위력을 발휘했는지는 의문이다.
또 하나의 설은 소련은 39선이북 (지금의 북한땅)을 중립지역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했다가 1945년 이후 훨씬 더 남쪽으로 내려와 초과달성 하면서 이왕이면 더 많이 확보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