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9월 20일(성령강림절 후 17번째 주일)
역대상 11:10~19
물이 피가 되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혹시 여러분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떠오르는 고향의 음식이나 풍경이 있습니까? 저는 어렸을 적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시래기들을 모아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솥에 시래기를 넣고 거기에 된장을 풀어 시래깃국을 끓여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힘들고 외로울 때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래깃국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은 힘들고 외로울 때 어떤 음식이 떠오르십니까?
우리가 함께 읽은 역대상 11장에는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뛰어난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야소브암은 창을 들어 한꺼번에 적군 삼백 명을 죽였습니다(11절). 엘르아살은 보리밭을 약탈하기 위해 달려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습니다(12절).
그러나 무엇보다 다윗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가장 약할 때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다윗의 용사들이었습니다. 본문은 베들레헴의 물을 길어 온 세 용사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이름보다 그들이 보여준 헌신을 기억하게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사들과 전투할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 근처 산성에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원래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처음 몸을 숨겼던 곳입니다(삼상 22:1~2). 또 아둘람 굴은 빚진 자와 원통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 사백 명이 그에게 모여들었던 곳이기도 합니다(삼상 22:1~2). 그러나 지금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수비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베들레헴은 단순한 한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었고,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장소였습니다(삼상 16장).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아둘람 인근 산성에 머물게 된 것은,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광야와 같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이 전투를 이끌어야 할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전장 한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17절).”
그런데 다윗의 용사 세 명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왕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18절). 그들이 어떻게 이런 헌신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습니까? 과연 다윗이 마실 물이 없어서 베들레헴 우물물을 원했던 것일까요?
물은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진을 친 곳에서도 물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갈망했던 것은 단지 육신의 목마름만을 채워주기 위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 받을 수 있는 ‘의미의 물’을 갈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다윗을 위해 세 용사는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다윗 왕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환자를 위해 자기 신장을 떼어 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종종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신장 떼어 주어 다시 살아난 그 환자를 날마다 생각합니다. 그 사람하고 전화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합니다. 왜? 생명을 같이 나누었으니까. 그리고 내 신장을 이식받아 살아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생명 하나 살렸다는 그 기쁨이 내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명을 함께 나눈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아주 깊은 사귐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생각과 생각이 통하고 그 감정이 항상 같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교류가 있습니다.
-출처: 옥한흠, 「하나님 사랑의 승리」(하온,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월호), 179쪽에서 재인용.
다윗과 세 용사 사이에도 이런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세 용사 이야기는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기를 원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시고 있던 다윗 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렇고 그런 수많은 왕 중의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 세 명의 용사들에게 있어서 다윗 왕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에게 속해 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또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장 영예로운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명의 용사들이 왜 다윗을 그토록 존경했는지 아십니까? 아마 그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이루기 위해 세 명의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그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 드렸습니다(18절). 그리고 다윗은 내가 이 사람들이 피를 어찌 마실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19절).
다윗은 물을 “피”라고 불렀습니다(19절). 다윗의 눈에 그 물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용사들의 생명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물이 피가 되는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자신이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전제로 부어 드렸습니다. 숭고한 희생 제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취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리더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세 명의 용사들이 다윗을 위해 물을 구해 왔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제단에 그것을 부음으로 용사들의 헌신을 하나님을 위한 제사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우리 함께 그날의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다윗이 용사들의 목숨을 대가로 떠온 물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본문은 그 순간 다윗의 표정이나 눈물까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이것을 마시리이까’라는 그의 고백 속에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어했을 다윗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어쩌면 그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용사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지지 않았을까요.
그날, 다윗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전쟁의 두려움을 이겨낼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강력한 무기를 얻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과 연대의식으로 새로운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일을 계기로 다윗 왕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요? 물론 본문은 이후 다윗의 심경 변화를 직접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에게 전쟁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현실적으로 그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또 세 용사는 어땠을까요?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고, 부하들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다윗 왕을 더 존경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본문은 그 이후 이 세 용사의 삶을 자세히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헌신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왕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그 왕을 향한 마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힘이며, 사랑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리더의 손끝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리더의 역할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성도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다윗 왕과 세 용사 이야기는 나머지 용사들을 자극하고, 그들을 도전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20절 이하에는 아비새와 브나야와 같은 또 다른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 역시 뛰어난 능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탁월함을 기록하면서도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은 먼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을 바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힌 존 헤론(John W. Heron)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 최초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는 앨런, 언더우드에 이어 1885년 조선에 입국해 곧바로 의료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그는 학교로부터 수련을 마친 후 교수로 남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부흥회에서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미지의 땅으로 가라!”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은 헤론은 조선에서 선교사를 요청한다는 한 잡지의 글을 읽자마자 조선 땅으로 갈 것을 결단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의사였기에 앨런을 도와 서울 제중원에서 사역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시의(侍醫)로 활약했고, 가난한 백성을 돕는 의사로 헌신했습니다. 조선에 온 지 5년째 되던 1890년 여름, 그는 환자를 돌보다가 이질에 걸렸고 3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환자를 돌보면서 무리한 것입니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 땅의 사람들을 섬기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적혀 있습니다. 존 헤론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산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출처: 변대섭,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으로”,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1월호), 292쪽.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세 용사는 왕의 탄식 한마디를 흘려듣지 않았고, 헤론은 무더운 여름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신실함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환자를 위해 자기 신장을 떼어 준 목회자의 고백을 기억하실 겁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내어주셨습니까? 어디 신장 하나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 전체를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껴지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만 그래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더 교제하고 싶고,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오늘 우리의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출처: 옥한흠, 「하나님 사랑의 승리」(하온,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월호), 179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과 세 용사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서로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창한 순교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정직하게 일하고, 지친 이웃의 곁을 지켜주는 일도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손해를 보고 누군가에게 바보스럽다고 비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친다면 이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실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작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용사들의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올려드렸듯이, 우리의 작은 충성과 헌신도 주님 앞에서는 귀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섬김으로 우리 주님이 귀히 여기는 용사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