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서악’이라고도 불리는 ‘선도산’ 자락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한 김유신장군묘와 김인문, 김양의 묘, 진흥왕릉, 진지왕릉, 성혈, 삼층석탑 등의 많은 문화재가 위치해 있다.
특히나 무열왕릉 뒷산으로 50여개의 고분이 불룩불룩 제 각각 산등성이를 이루고 있어 마을이름조차 ‘쉰등마을’로 불린다.
쉰등을 이루고 있는 고분은 왕들의 무덤으로 하나 둘 이름을 찾고 있다.
그들의 이름이 진실로 맞는지 아닌지 쑥떡공론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왕들의 무덤은 대체로 명산에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누구나 쉽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후세의 안녕을 기원하는 우리나라 민족의 열렬한 바램으로 자리해 어느새 크고 작은 무덤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기 시작해 쉰등은 백등 오백등이 되었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쪽에서 길게 발을 뻗어내려 형산강으로 숨어들어 바다로 흘러간다.
경주 남쪽의 남산에서 건너다보면 선도산은 좌청룡 우백호의 기세로 구불구불 기를 모아 북쪽의 능선과 어깨동무를 하고 경주시가지를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신라 천년이 면면히 이어져 내렸던 역사가 이러한 기운으로 형성되었으리라.
선도산이 시작되는 입구의 무열왕릉과 줄을 지은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대왕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4기의 고분을 지나 쉰등을 이루는 고분숲에서 진흥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 문성왕릉 등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고분을 따라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 진흥왕의 배신과 영토 확장
진흥왕은 신라 24대 왕으로 7세에 왕위에 올라 37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삼맥종 또는 심맥부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 입종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형의 딸인 조카와 결혼했던 것이다.
진흥왕은 7세 어린나이에 왕좌에 앉았지만 화랑도를 창설하고 국토를 확장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또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등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신라 최초의 왕실사찰인 흥륜사를 짓고 최고의 사찰로 알려지고 있는 황룡사를 창건했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을 지어 황룡사라고 했다.
진흥왕은 호방한 성격으로 무인의 기질이 다분했던 것 같다.
그는 재위 9년, 16세 때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 성왕과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가 오랜 전쟁을 하면서 지친 틈을 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다.
진흥왕이 백제 성왕과의 의리를 배신한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의 연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화가 난 백제의 성왕이 신라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백제 성왕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고 신라는 백제군사 3만여명을 몰살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어 영토를 넓혔다.
진흥왕은 고구려 땅까지 영토를 넓히고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돌아보며 순수비를 세웠다.
북한산비와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은 지금까지 생생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진흥왕은 자신이 순시한 지역에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하고 죄인들을 용서해주는 지금의 사면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이어 이사부에게 중앙과 지방의 군사일을 맡기면서 국사를 편찬하게 해 거칠부 등의 학자들이 국사를 기록했다. 또 율령을 반포하고 제도를 정비해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한편 국가기강을 튼튼하게 했다.
진흥왕은 우륵이 계고, 법지, 만덕 세사람에게 음악을 전수하게 하는 등으로 예술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거침없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예술을 보급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으로 37년간의 왕좌에서 대단한 권력을 누렸던 진흥왕의 무덤은 서악 선도산 능선에서 초라하게 쉰등의 하나가 되어 있다.
느 봉분이 그의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형편이다.
이름은 높이 걸렸으나 그 형체는 없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영토를 확장한 훌륭한 신라임금으로 공부되고 있다. 제 성왕과 맺은 형제의 의리를 배신하고 약해진 틈을 타 뒤통수에 칼을 겨눈 이야기는 미화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역사로 남기고 싶은 후손들의 마음일까? 초라한 고분이 역사기행자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 귀신이 되어 사랑찾은 진지왕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큰 아들 동륜이 일찍 죽자 둘째였던 사륜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나랏일을 맡기고 시조신을 모신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많은 죄수를 사면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 크게 이기기도 하고 내리서성을 쌓아올리면서 국방을 튼튼하게 했다.
그러나 진지왕은 여색을 밝히고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신하들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화백회의의 귀족들이 진평왕을 왕위에 앉히려는 정치적인 갈등이 만들어낸 비사라는 추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왕위 찬탈을 두고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혈투를 벌였던 비사들은 가끔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숨겨진 이야기들도 많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하나씩 추측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로 밝혀지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진지왕이 여자를 무척 좋아해 백성들에게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과 복사꽃 여인이라는 도화랑과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진지왕은 도화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도화녀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배웠다.
임금의 위엄이 있다해도 죽음으로라도 이는 지켜야 한다”고 말하자 진지왕은 “남편이 없다면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물어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해에 진지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죽었다.
2년 뒤에 도화녀의 남편이 죽은 열흘이 지난 밤 진지왕은 살아 있던 모습으로 도화녀를 찾아와 7일동안 그녀와 함께 머물렀다.
임금의 권좌에서 영화를 누리고 쫒겨나는 풍파를 겪었던 진지왕. 죽어서도 사랑을 찾아 나섰다는 진지왕의 고분도 천하를 누볐던 그의 아버지 진흥왕 이름표가 붙은 무덤 옆에 쉰등의 하나로 자리하면서 눈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도깨비 선비 비형랑
귀신이 된 진지왕과의 사랑으로 도화녀가 지독한 산통을 겪으며 낳은 사내아이가 비형랑이다.
진평왕은 비형랑이 매우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궁중에 데려와 키웠다.
비형랑이 총명해 진평왕은 그가 15세에 이르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랑은 밤만 되면 사라졌다가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왕이 신하들에게 그를 추적해 보니 비형랑은 매일 월성을 넘어 귀신들과 놀다가 새벽 절의 종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왕이 사실을 추궁하자 비형랑은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왕이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보라”고 하자 비형랑은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해 하루만에 큰 돌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귀신다리’라는 뜻의 ‘귀교’라고 불렀다.
진평왕이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나랏일을 도와 일할만한 자가 있으면 추천하라고 주문해 비형랑이 ‘길달’이라는 귀신을 추천했다. 길달도 집사의 벼슬을 얻어 충성스럽게 나랏일을 훌륭하게 했다.
신라 1등 관등의 벼슬 이벌찬 ‘임종’이 자식이 없었는데 길달을 자식으로 삼고, 흥륜사 남쪽에 누문을 지으라고 명했다. 길달은 순식간에 누문을 짓고 매일 그 문 위에서 잠을 잤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길달문’으로 불리게 됐다.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그 이후로 귀신들도 비형랑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라는 내용의 가사를 집앞에 써 붙여 귀신을 쫒았다고 전한다.
경주시는 비형랑의 전설을 극화해 명절 전후에 공연을 통해 이를 알리며 관광자원화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서악동 삼층석탑
무열왕릉 뒤편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쉰등을 이루는 고분들이 나타나기 전에 높이 5.1m의 특이한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 마을을 굽어보며 서있다.
서악동 삼층석탑은 보물 제6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널빤지 같은 4개의 돌을 넓게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얇은 층의 돌을 지지석으로 얹어두고 큼지막한 벽돌모양의 다듬어진 돌 8개를 2층으로 쌓아 석탑의 기단으로 했다.
탑의 몸돌을 올리기 전에 특이하게 또 한 장의 판석을 깔아 석탑의 몸돌을 고정시키고 있다.
1층 몸돌을 하나의 돌로 네모나게 깎아 세우고 한 면의 중앙에 감실을 파내어 문을 표시했다.
문의 중심에는 못을 박았던 흔적이 네 개의 구멍으로 남아 있다.
문고리 쇠장식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또 문의 양편에 금강역사 인왕상을 부조로 새겼다.
오른쪽의 금강역사는 무기로 보이는 금강저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비껴들고 중심의 문쪽으로 바라보며 우람한 근육으로 앞을 지키고 서있는 형상이다.
왼쪽의 금강역사는 맨손으로 태권도의 자세를 취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로 중앙의 문 안에 있을 부처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전석탑 계열의 탑으로 분류되고 있다.
탑의 지붕을 이루는 옥개석 전각도 평행으로 직선을 이루고 있어 전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전탑형식을 연구하는 지표로 활용되며 중요한 문화재로 분류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복원 관리되고 있지만 아직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사찰이 있었던지에 대한 연구도 없다.
기록이 없고 끈질긴 연구도 부족해 역사의 연결고리는 흐릿하게 흔적을 감추어가고 있다.(끝)
■ 출처 : http://me2.do/FpUBzi2D
오늘 2월 1일(월) 오전 9시 30분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총 1,777,692명만이 서명에 참여)
1,052,402명만이 온라인 서명에 참여했고,
(어제 동시간 대비 70명만 추가 동참)
725,290 명만이 오프라인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1억인의 목소리를 모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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