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는 자에게 묻지 않고 약을 지을 수는 없다. 고치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앓는 자 자신이다. 철학도 종교도 앓는 소리다. 앎이 나음이다. 제 병, 저만이 고친다. 학자도 종교가도 정치가도 의사다. 씨알은 앓는 존재다. 알이 들자고 앓는다. 알이 드는 날 앎이 올 것이다."
- 함석헌 명상/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중에서
<쓰리 킹스 Three kings>는 '가면(persona)의 무거움'이 없다. 물론 이 말은 이 영화가 부박하다거나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전쟁'이 지닌 가장 무거운 짐, '애국심과 국가'라는 집단페르소나의 무게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인식하는 대부분의 전쟁은 '무거움의 전쟁'이다. 전쟁이란 경제적 탐욕이나 인종차별,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그 대부분의 원인이지만 표면으로는 항상 그 진실이 페르소나에 가려진다. 전쟁을 옹호하는 자들은 미디어나 지식인(또는 저술) 그리고 편견을 이용해 그들의 숨소리에 국민들의 입김을 밀착시키고 감성적인 선동과 논리로 그 전쟁의 추악함을 '자유의 이름' 아래 거짓화장을 시켜 '정의'라는 가면을 씌운다. 즉 전쟁은 탐욕과 증오, 편견 그리고 추악함이라는 가면을 쓴, '메마른 심장'을 지닌 자들의 '게임'일 뿐이다.
'감정'이 없는 '차가운 전쟁'은 사실이 아니다
<쓰리킹스>는 '우리시대의 전쟁을 톡톡 튀는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조명한 영화'라는 평답게 전쟁이라는 딱딱하고 무거운 소재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독특한 연출력과 감각적이면서도 직관력 넘치는 솜씨로, 91년 걸프전을 입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솔직하게 보여준 영화이다. 91년 걸프전이 휴전협정을 맺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네 명의 군인들이 사담 후세인의 <금괴>를 훔치러 나서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을 줄거리로 삼아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물질적 탐욕심을 전쟁에 참여한 그들의 주된 인식으로 삼은 것이 매우 독특한 발상이며 다른 전쟁영화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인식이다. 또한 전쟁이 지닌 적군과 아군이라는 '무책임한 구도'를 버리고 이라크인을 이해하는 시각에 담긴 미국인들의 인종차별과 감정이입이 없는 서로의 관계를 다시금 사람 대 사람으로 복원시키는 작업이 신선하게 다가서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이라크인과 흑인병사가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한 공감', '백인미군'과 '중동 이라크군'이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장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인간애의 시선 그리고 석유라는 경제적 이해에 말려든 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는 대화는 이 감독이 감각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를 읽는 눈도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전쟁은 우리가 지금 콘크리트 건물과 국기 그리고 후세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전쟁을 보여주는 미디어와 언론 그리고 적이라는 통로 때문에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즉 미디어가 보여주는 차가운 전쟁은 거짓인 것이다.
'애국'보다 '금괴'가 더 중요하다?
<쓰리 킹스>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솔직한 '폭로'이다. 흔히 많은 영화들이 그동안 보여 준 전쟁영화 속의 인물들은 비록 그 이데올로기나 입장은 달리 하지만 '애국'과 '충성심' 그리고 '군대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가진 캐릭터로 자주 묘사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무게'에 짓눌려 차마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고 다만 아무런 책임과 법적 대상이 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공허한 개념에 대해서만 분노를 나타내는 엉뚱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전쟁은 국가나 민족, 집단, 종교가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 마음을 담보 삼아 저지르는 '살상행위'이다. 즉 구체적인 현실에서 국가나 집단들이 벌이는 가장 추악한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목적은 그러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결코 그러한 이해관계를 벗어난 관념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91년 걸프전의 목적을 <금괴>라는 상징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91년도 걸프전은 '정의의 수호'가 아니라 <금괴>와 같은 '경제적 탐욕'으로 일어난 '도둑질'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감독은 '애국심'과 '충성심'이라는 허황된 '무게'를 덧씌우지 않았다. 오히려 무겁지 않고 발랄하며 정확하다보니 사실성이 도드라져 보이고 이러한 접근은 적어도 전쟁이라는 잔인한 공간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길러준다. 결국 전쟁의 페르소나는 '정의나 자유'를 표방하지만 그 실체는 <금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금괴는 경제적 탐욕이 낳은 전쟁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디어'는 '심장과 영혼'이 없는 거짓말쟁이
또한 이 영화는 미디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심장 없는 거짓말'과 '메마른 영혼'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미디어는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이 있는 지역을 찾아 생생한 사실보도를 전달하고 보여주는 이미지로 자신들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과연 그 이미지는 정확한가 또한 미디어가 사실보도라는 자신들의 그러한 역할에 충실한가에 대한 질문이 이 영화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되면서 보여지는 미디어는 그 물음에 분명한 답을 피하고 있지만 결국 이미 말을 다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미디어가 보여주는 전쟁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창백한 도화지에 그려진 캐리커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전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미디어라는 도구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에 온전한 감정을 담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은 '폭격 당한 건물'과 '주가로 나타나는 경제수치' 그리고 '최첨단 무기의 놀라운 살상능력'과 '전투현황'일 뿐이다. 이들의 눈에 비춰지는 '차가운 전쟁'은 그 이면에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군과 아군이 싸우며 폭격기과 탱크, 총이 싸우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가운 전쟁' 어느 곳에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보이지 않고 부서진 콘크리트 건물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정직한가. 그들은 전쟁을 제대로 보도하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미디어가 얼마나 무능하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보도한다는 미디어가 얼마나 어리석고 그 사고와 인식의 깊이가 얕은 지도 여실히 나타난다. 상대방을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집단이나 사람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가.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또한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무지한가. 하지만 이러한 물음을 우리는 2003년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CNN과 우리의 방송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 자문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미디어는 과연 정직한가. 우리의 미디어는 이 전쟁에 제대로 공감하며 감정을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는가. 우리의 미디어는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에 깔려 죽은 아이의 부모와 형제들의 아픔을 담아내고 있는가. 우리의 미디어는 과연 생각이 깊은가. 우리의 미디어 또한 '차가운 전쟁'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 미디어에 영혼과 심장이 담겨있는가. 우리의 미디어는 과연 정직하게 전쟁을 보도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 문명은 전쟁을 기반으로 서 있다는 각성이 필요해
<쓰리 킹스>는 '허황된 페르소나'와 '미디어의 거짓말'에 통쾌한 폭로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닌 헛바람 든 엄숙주의와 사람들의 삶을 배제한 거짓 전쟁의 실체를 다시금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91년 걸프전이라는 것과 그 대상이 사담 후세인이라는 사실이 왜 우리가 다시금 이 영화를 되돌아봐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10년이 넘은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지만 과연 미국이 표방하는 '엄숙주의'와 '미디어의 정직성'은 회복되었는가.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전쟁의 명분은 '테러리즘'을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를 세우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목소리와 눈으로 '착용'한 CNN은 과연 '영혼과 심장'이 스민 감정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지만 이러한 물음에 '예'라고 답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명분과 미디어의 눈을 믿지 않고 '심장과 영혼'이 스민 함성과 정직한 목소리 그리고 국제적인 반전분위기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로 전달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위에서 함석헌 선생이 말한 것처럼 '제 병은 제 자신만이 고친다'는 사실이다. 결국 전쟁은 '우리'가 고쳐야 할 탐욕의 고질병이자 앓음이다. 또한 우리 문명이 이 앓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뼈저린 각성이 이제는 받아들여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