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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화려한 휴가, 특별한 고백
세라 추천 0 조회 134 07.08.16 01:08 댓글 19
게시글 본문내용

 

눈을 감았다. 라스트 씬 10분 동안 내내. 귓가를 어지럽게 두드리는 총성, 그리고 비명,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 대한민국 만세, 광주 만세"라는 포효. 감은 눈꺼풀이 떨린다. 그 눈꺼풀 아래 뜨겁게 차오르는 무엇. 그리고 흘러내린다. 떨리는 눈꺼풀을 손으로 누른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미처 손수건을 준비 못한 탓에 나의 얼굴과 손등, 손바닥이 모두 흥건히 적셔진 채 2시간 내내 마를 겨를가 없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보기 전 부터, 보는 내내, 보고 나서,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생각하면 시야부터 흐려지는...지독한 최루성(?)이다.

 

그렇다면,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죄책감이다. 내겐 후체험이었던 '광주'를 오랜 시간 내 삶에서 방기해왔었던 스스로에 대한. 이내 '진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도망쳤던 그 시간들이 덮쳐온 것이다. 그 무게에 눌려...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80년 5월 광주에도 꽃이 피었을까. 우리집엔 두 대의 전화가 있었다. 까만색 군용전화와 일반전화. 당시 나는 열살도 안된 어린애였다. 도르륵 도르륵 손가락을 걸어 다이얼을 돌려야 걸리는 군용전화의 저 편엔 군인이셨던 아빠가 계셨다. '계엄'이 무엇인지 알 지는 못했지만, 뭔 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정황상 느낄 수는 있었다. 군용전화 앞에서 초조하게 앉아있는 엄마의 무릎을 베개삼아 선잠을 청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날 짓누르던 그날의 기억들. " 나라에 큰 일이 났단다...광주에 폭동이...." " 북한의 도발이 있을 수 있어서...아빠가 비상대기하시는거란다." 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하시던 엄마의 말씀. 순간 늘 집을 나가실 때 "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 군인은 그래야 한다고 한다- 아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아빠를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이 나를 가위눌리게 했다. 그것이 80년 5월의 광주와 나와의 첫만남이었다.

 

그 후......난 '광주'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말해주는 사람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스스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 적도 없었다. 그저 내 기억 한 켠에 아련한 '가위눌림'으로 ,그 아련함조차 입에 올려서는 안될' 불온한 무엇'으로 간직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 '광주'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대학에 입학하면서였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이 보여준 '광주'의 사진, 계엄군의 총칼에 갈갈이 찢기고 난자당한 80년 5월의 핏빛 광주가 내 앞에 서있었다. 내겐 너무 벅찼다. 힘겨웠다. 군인이 시민을 학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외면'이었다. '진실'과 마주하는 일은, 지금까지 나를 떠받치고 있던 세계를 부정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소아적인 틀 안에 안주한 삶 이외의 것에 대해 난 배워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진실'은 삶의 기저에 숨쉬고 있었다. 비겁한 도망자의 길을 가는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세번 째로 난 광주를 만난다. 대학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출신의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였다. 일의 파트너로 만났는데, 서울토박이인 나로선 친구의 전라도사투리도 재미있었고 다소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한 나에 비해 화통하고 당당한 친구의 포지셔닝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우린 달랐지만 서로의 다른 점에 매료되어 금방 친해졌다. 술을 무척 잘하고 좋아하는 친구였는데....이 친구와 함께 하면서 일도 제끼고 함께 술마시는 날들이 늘어갔다. 나로선 대학 말년 때 버릇처럼 '핑계'만들어 '술'마시기 병이 다시 도진 셈이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오늘은 우울해서...오늘은 힘들어서...오늘은 월급받아서...우리는 알콜기 머금은 '핑계'를 만들어 함께 했고 끈끈한 의리를 다져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 날, 꼬옥 이 맘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자주 가던 주점에서 친구는 웬일로 폭음을 한다. 그리고 내게 어려운 고백을 한다. 80년 5월에 관련된. 충격적인 가족사였다. 친구의 삼촌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반병신 된 채, 가족들 모두 오랜시간 숨죽여 살아왔다는 그런 사연.....여기서 또 이렇게 '광주'를 만나는구나. 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친구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눈물. 그리고 빗소리에 기대 처음으로 친구 앞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친구도 울고 있었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엔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화려한 휴가>를 통해 네번째로 '광주'를 만났다. 과거 나의 소시민적 비겁함이 오늘 이 스크린 앞에서 고해성사라도 하듯 비틀거린다. 계엄군의 발포가 마치 나를 향한 것인 양 나는 빗발치는 총성과 도륙하는 칼날에 몸을 내맡긴다. 흔들리는 눈꺼풀을 손으로 누른 채 그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흐르도록 놓아둔 채...적지 않은 순간 그렇게 스크린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했고, 특히 마지막 ( 도청 발포 씬) 씬에서는 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영화가 끝났다. 멍청하게 한동안 앉아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눈물로 범벅이었고...턱밑까지 무언가가 가득 차올라 기도를 막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 와중에 정수리 한가운데가 환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언제나..'광주 항쟁' 하면, 신군부의 만행부터 떠올렸던 내게, 광주시민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살인적 독재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당당히 그 앞에 맞섰던 그 '민중'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야만의 총칼에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았던 나의 형제들, 이웃들, 난 그들의 목소리를 비로소 들었던 것이다. 서로 어깨를 걸고 도청 안에서 최후를 기꺼이 맞이하였던 위대한 광주 시민들의 그 정신과 최초로 마주했던 것이다.

 

버거웠던 진실들을 기꺼이 안는 순간이었다. 아프지만 행복했다. 잠시 그런 현실의 역설(逆說)에 취해 있었다. 그렇다. 육체는 전두환이라는 인두껍을 쓴 폭압자의 총칼에 잔인하게 도륙되었지만, 그 정신까지는 결코 짓밟을 수 없었다. 이렇듯 살아남은 자들에게 기꺼이 남겨지고 이어간다. 그렇게 살아서 '죽는' 자가 있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자가 있다. 광주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정신이며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이어가야 할 정신이라고 < 화려한 휴가>는 말한다. 네번째 광주와의 만남은 그래서 내게 특별하다.

 

 

나는 앞으로 두번 더 광주를 만날 생각이다. 다섯번째는 조만간 혼자서 <화려한 휴가>를 다시 보는 것으로 하려 한다. 두번 보는 이유는 이번엔 결코 눈을 감지 않고 똑똑히 다 보기 위해서이고, 혼자 보는 이유는 울 수 있는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다. 도청 발포 당시의 라스트 씬도,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도 모두 담을 것이다. 동공에 얹혀진 먼지를 걷어내고.

 

여섯번째는 올 해 안에 반드시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 광주 5-18 묘역을 가보는 것으로 하려 한다. 그것이 그들의 목숨값으로 지금 내가 따먹고 있는, 민주주의란 과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요, 방관과 비겁의 세월에 대해 속죄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5-18 다음 날 골프치러 가면서 현금 29만원 밖에 없다는 만용으로 여전히 대한민국을 우롱하는 살인마 전두환과, 일해공원에 환호하는 전사모(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게 영화 < 화려한 휴가>를 바친다. 이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응시할 것이다.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에서 우리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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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16 02:52

    첫댓글 두번째 다시 보셔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기는 쉽지 않으실거에요..^^ 그냥 이럴때는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화려한휴가 천만 돌파를 위하여..!!

  • 작성자 07.08.17 03:13

    포사랑님! 천만돌파를 위해서라도 미약한 힘이지만..다시한번 볼 생각입니다.^^ 뭐...다시 봐도 눈이 감길 것은 같습니다만....^^

  • 07.08.17 21:54

    저도 한두번쯤 더 봐야겠습니다. 혹시 극장에서 마주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아.. 대전이 아니시구나..^^

  • 07.08.16 06:24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을텐데.. 밤의 냉정을 틈탄 고백(특별하지만 모든 국민이 함께 겪은)..잘 읽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아침에 뇌리를 스치는 정리안되는 망상들....삼당야합이 봉합해버린 불끄다만 역사청산이 오히려 국민 개개인을 죄의식과 역사적 부채감에 시달리게 하는군요.

  • 작성자 07.08.17 03:14

    역사적 부채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점점 적어져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제가 '특별한'이라는 표현을 한 것도, 앞으로는 '특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입니다. 님 말씀처럼 역사 청산....이어가야지요...^^

  • 07.08.16 15:56

    흔들리지 말아야지! 현실이 비록 강팍할지라도 더 냉정하게 지켜볼까요~~~

  • 작성자 07.08.17 03:15

    냉정하게 직시하되, 진행형의 광주정신을 이어가야겠습니다.^^

  • 07.08.16 17:42

    세라님! 글 잘읽었습니다. 우리집의 세자매. 언니는 고등학생, 난 중학생, 막내는 초등학생....함께 광주의 아픔을 겪었답니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입니다. 세자매가 다 강샘을...언니가 처음 가입 ...두째 세째가 가끔씩 글을 남기네요. 언니는 코치만...막내도 가끔씩...강샘의 사랑도 영원하지만 광주의 아픔도 영원한 세자매랍니다.

  • 작성자 07.08.17 03:16

    파이팅님, 그렇군요.....세자매가 다 광주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가고 계시는군요. 이런 님들의 소소한 개인사를 들으며 큰 희망과 위안을 가져봅니다.이런 분들이 계셔서..대한민국은 아직 희망 만땅이라고....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07.08.17 03:17

    대한민국님! 님 같은 애국자가 꼭 보셔야 합니다. 감상후기..기다리겠습니다.

  • 07.08.16 21:45

    그 때 10살도 안되었던 세라님의 '화려한 휴가'가 가슴을 치네요. 개봉하자 마자 딸과 함께 본 화려한 휴가에서 이제 열여섯인 딸은 막 통곡을 했지만 그 시대를 지나왔던 사람(비록 언저리에 있었지만)에게는 너무 잔잔한 영화였지요. 역사적 논리나 군부의 정치적 시나오를 제껴두고 어눌하기 까지 한 일상의 평화가 소시민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으며 그들이 어떻게 변해가는 가에 초점을 맞춘...요즘같은 세대에 이제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광주를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이해하는데 역할을 했다는 것에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작성자 07.08.17 03:21

    개봉하자마자 따님과 함께 보셨다니, 정말 훌륭한 어머니이시네요.^^ 저는 어머니와 역사의식이 달라서...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참으로 슬프거든요. 따님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운영님 말씀처럼, 군부의 정치적 시나리오..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두환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것 같은 느낌에 약간 화가 나려고 했지만...오히려 그런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광주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될 수 있는 것 같다고 위안한답니다. 님의 말씀에 동감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기성세대들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 07.08.17 06:32

    우리 시대 진보진영이나 민주개혁세력중에는 성분론에 취해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출신성분을 따지면서 사람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는 순수혈통주의를 자신도 모르게 퍼트리는 사람들인데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운동의 성취를 암암리에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어렵지만 사람도 세상도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춘시절 고문당하고 상처입은 자존심에 동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권력으로부터 차별당했던 경험이 그러한 경직된 사고를 불러 온 것이므로 당사자만 탓할수도 없지만...참 견디기 힘든 우리네 민주마을의 부끄러운 속살이지요. 영원히 혼자만의 순수한 왕으로 남고싶은....

  • 작성자 07.08.19 15:34

    적극 동감합니다. 범여권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이명박은 커녕 박근혜 지지율의 반토막도 안나오면서, 아직도 "내가 정통성입네"하며 순수혈통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보면 정권을 잃어도 싸다는 생각까지 극단적으로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장관/총리 등을 역임했으면 이제 이들도 기득권입니다. 과거 기득권에 대한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정권재창출은 어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범여권의 지금 행태가 참으로 가소롭고 가당찮게 느껴집니다.

  • 07.08.17 09:08

    마지막 씬의 주인공의 살신성인(?)은 군부독재의 멸망과 민주대한의 출현을 알리는 가슴시린 아픔이었습니다. 후기 정말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다시 보신 후기도 꼭 올려주세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 올 것 같네요.

  • 작성자 07.08.19 15:36

    동추선생님, 감사합니다. 함께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님들이 계셨기에 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한번 관람할 생각인데, 두번째 느낌은 어떨지....저 역시 궁금해지네요.^^

  • 07.08.20 19:44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후기글.... 할 말 엄뜸. 난..

  • 작성자 07.08.22 0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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