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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63)
[대와선전(大渦旋戰)]
새로 태동한 광풍성은 연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소속 무인들은 자신들이 기거할 건물을 세우고, 주변을 단장하느라 하루가 부족했고, 수뇌부는 조직을 정비하느라 밤을 새웠다.
그들 중 가장 바쁜 사람은 당연 주하연과 설련이었다.
광풍성 조직을 비롯한 모든 명령이 그녀들의 입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전파되었다.
한 달여 기간에 걸쳐 모든 공사가 끝나자, 각 건물 전면에 커다란 방이 나붙었다.
성주 묵안혈마 백산.
군사 봉선군주 주하연.
혈뇌각(血雷閣) 각주 혈묘인 철웅.
광견각(狂犬閣) 각주 독마 전영.
광살각(狂殺閣) 각주 구천마검 석두.
광마각(狂魔閣) 각주 혈각철마 일휘.
광혈각(狂血閣) 각주 천마 장대근
무욕각(無慾閣) 각주 벽력황 사진악.
불도각(佛道閣) 각주 광마도 소살우.
천하각(天下閣) 각주 파면신개 악만금.
새로 태동한 광풍성의 조직도였다.
이른 새벽.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시각, 각 건물을 서둘러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이거 어색하구먼!”
광혈각 건물을 나선 섯다는 차려입은 새 옷이 어색한 듯, 연신 양팔을 빙빙 돌렸다.
“살수야!”
“부르셨습니까, 형님!”
섯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나타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언제나 섯다의 눈치를 살피던 광치와 허공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몽이었다.
“음! 좋아, 회의 장소가 어디라고 했지?”
“대연무장 한가운데라고 했습니다, 형님!”
“광치 말이 맞습니다요, 형님!”
두 사람은 직각으로 허리를 꺾으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연무장? 이것들 정신병자 아냐. 이 추운 겨울에 대연무장은 또 뭐야?”
섯다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공을 사용할 때야 이까짓 추위는 별것 아니다. 하지만 광풍성에 들어온 첫날 실패를 맛본 다음부터는 전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추워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곤 했던 것이다.
‘누가 누구더러 정신병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자기들보다 더 정신병자가 어디 있다고.’
섯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광치는 내심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미친 사람의 표상이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기 무섭게 동천루 망루에 올라 소림사에서 가져온 불상을 향해 삼천 배를 올린다. 혼자만 올리면 그나마 나을 터인데 그가 삼천 배를 시작하면 어디선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소살우, 모사, 일휘가 합류한다.
삼천 배를 마친 다음 네 사람은 구보로 대연무장 다섯 바퀴를 돈다. 건강을 위해 본인들이 한다는데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유몽과 함께 새벽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을 따라 삼천 배를 올리고, 그들을 따라 대연무장을 돌았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연무장은 쳐다보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 곳이었다.
“따뜻한 방으로 옮기자고 할까요?”
내심이야 정신병자라고 욕을 하든 말든, 미소를 한껏 머금은 얼굴과 공손한 어조로 말을 해야 했다.
“아니다, 미친것들이 그곳에서 하자고 하는데 해야지. 넌 먼저 가서 의자 네 개는 치우도록 해라.”
“의자는 왜?”
광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섯다를 쳐다보며 물었다.
광풍성이 완성된 이래 처음 갖는 회의고, 성주인 백산을 비롯하여 각 각(閣)의 수뇌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다. 그들과 같이 어울려야 할 자리에 의자를 치우라니. 그것도 딱 네 개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맨발! 언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냐?”
몸을 세운 섯다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퍼억!
섯다가 인상을 찌푸리자마자 광치의 뒤통수에서 거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당장 가서 치우겠습니다.”
광치의 뒤통수를 갈겨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유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둘은 하나로 묶여, 섯다의 짜증을 해소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물건이 작동하지 않는 남자의 신경은 여자보다 더 예만하다는 사실을 섯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긴긴밤을 보낸 아침에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따라와, 새캬!”
유몽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맞지 않기 위해서는 두말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한다. 의문은 나중에 그가 행동으로 직접 풀어 줄 것이다. 두 사람은 대연무장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들이 대연무장에 마련된 의자 중 네 개를 치우자마자 수하를 동반한 각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주인 백산은 혈뇌각 각주 철웅과 십팔호위로 이름이 바뀐 광자 일행을 데리고 나왔고, 소살우는 장차 소림의 방장으로 지목된 무계와 무당파 문주인 현진자를, 사진악은 제자들과 함께 자리했다.
그리고 파면신개는 바로 밑 원로인 진청일과 팽가 가신들을 데리고 나왔다. 물론 각 각주들의 뒷자리였지만 그들에게도 의자가 배분되었다.
모두들 각자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섯다를 비롯한 네 명이 광치와 유몽이 의자를 치운 그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 것이었다. 앉았다기보다는 그들은 엉덩이를 엉거주춤 내린 채 말을 타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보(馬步)?’
서로를 쳐다보는 광치와 유몽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광치야, 저거 우리들에게도 시킬까?]
전음으로 말하는 유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의자에 앉는 자세로 행하는 마보. 내공을 운용한 상태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자세다.
지금까지 관행으로 보았을 때 결코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언제 회의가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설마 그렇게 하진 않을 겁니다. 저 많은 사라들 앞에서....... 헉!]
전음을 보내던 광치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섯다와 시선이 마주쳤던 탓이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그래도 버틸 때까지는 버텨 보자는 심정으로 광치는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늘 안 무너진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흘린 두 사람은 섯다 뒤로 가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 앉은 모양새로 마보를 취하며.
하지만 정신병자들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고개를 돌려 각주들 뒤에서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움찔 몸을 떨고 있는 그들을 향해 소살우가 낮게 말했다.
“여기서 나보다 나이를 더 처먹은 사람은 거지 노인네와 백산 형님 둘밖에 없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삼강오륜의 오륜에 해당하는 덕목 중에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말문이 막힌 소살우가 설련을 흘끔 쳐다보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요.]
“맞아, 장유유서, 그러니까 나이를 처먹은 놈과 안 처먹은 놈 간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이 말이지.”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는, 그동안 설련에게 배운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듯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찬물도 처먹을 땐 순서가 있다. 이 말을 하고 싶다는 거야. 우리 광풍성이 유지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야.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 선배를 하늘처럼 모시는 그런 질서가 없는 조직은 금방 무너진단 말이다. 내 말은 바로 그거라고. 앉아! 새끼들아!”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소살우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전 내공을 하체에 집중해서,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목까지 파묻지 못한 놈은 내가 파묻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소살우의 고함이 터지자마자 십팔나한을 비롯한 무욕인들은 그 자리에 마보 자세를 취하며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푹! 푹!
여기저기서 그들의 발목이 땅속으로 박혀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해야 하는 거냐?”
소살우의 시선을 받은 석두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건 내게 묻지 말고 형수님께 물으쇼.”
“부인......!”
고개를 돌려 남궁미령을 쳐다보던 석두는 조용히 의자를 치우고 마보 자세를 취했다. 석두마저 의자를 치우자 기이한 침묵이 회의장에 감돌았다. 회의를 주관하는 주하연과 설련마저도 서 있는 형편이고 보니, 준비된 의자에 앉은 사람은 백산과 파면신개, 그리고 남궁미령 세 사람이 다였다.
그렇게 광풍성 최토의 회의는 시작되었다.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귀는 열려 있을 테니까, 회의를 시작하자.”
[끙! 형님 저래도 되는 거요? 저게 성주 자격이 있는 거냔 말이오.]
오만상을 찌푸리며 땅속으로 파고들던 광치는 유몽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백산이었다. 그런데 그마저 아무 말 없이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광치는 거품을 물 수밖에 없었다. 과거처럼 날건달도 아니고, 사천 명의 부하들을 가진 광풍성의 성주다. 적어도 형식은 갖춘 상태에서 회의를 시작할 줄 알았다.
[아직 몰랐냐? 저들은 단체로 노망났단 말이다. 주공도 마찬가지고.]
“할아버지, 차 드실래요?”
백산을 쳐다보며 한참 전음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설련이 찻잔을 내밀었다.
[아이고, 주모. 우리 좀 살려 주십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저는 그렇다 해도 몽 형님은 나이가 육십입니다.]
설련이 다가오자마자 광치는 죽는 소리를 했다.
유일한 희망이 그녀였다. 아니 유일하게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 그녀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설련에게도 그다지 희망적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공이 강해진답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차는.......!”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안타까운 얼굴로 유몽과 광치를 쳐다보며 전음을 보낸 설련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됐-습-니-다!”
광치는 가까스로 입을 뗐다. 아래로 내공을 밀어내는 것도 죽을 맛인데 차까지 마시라니. 그것까지는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맨발아, 건배 시간이다. 그러니까 잔을 받아라!”
“알겠습니다, 형님!”
섯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광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찻잔을 받았다.
그를 비롯한 오십여 명의 무인들 전부가 차를 받는 시간도 상당히 소요되었다. 어느 결에 마보를 취하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땅을 파고들던 이들의 다리가 무릎까지 들어갔을 때 주하연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선은 여러분이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북황련과 남천벌이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푹! 푹! 푹!
“끙!”
땅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신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주하연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한 곳씩만 존재해도 광풍성과 비슷한 전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로 합치다니. 먹구름이드리운 듯했다.
하지만 주하연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수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작은 형수, 제대로 설명을 해 주십시오. 이것들은 전부 머리가 녹슬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마보를 취하고 앉아있던 소살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한 문파로 합쳐져 덩치는 더욱 커졌지만 조직력에는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 말입니다. 그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근거지는 어딥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석두는 벌써 얼굴이 벌게진 채다. 버거운 듯 엉덩이를 슬쩍 치켜 올리며 물었다.
“섬서성입니다. 본래 그들이 있던 산서성과 사천성은 지부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두 단체를 합쳐 통천연맹(通天聯盟)이라 부르기로 했답니다.”
“쿡!”
석두를 비롯한 일행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천자와 맹자 들어가는 단체 이름이 제일 싫어. 천무맹, 천마맹, 제천맹 그 개 잡것들이 전부 천(天)자와 맹(盟)자를 썼잖아.”
소살우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천붕회에 이어 바로 없애버리고 싶었던 자들이다. 광풍성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혼자라도 찾아갔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보 자세가 힘들었던 탓일까. 조금씩 위로 올라오는 엉덩이를 다시 아래로 내리누르며 소살우는 물었다.
“우린...... 광풍이 되어야 합니다.”
“형수!”
찌푸린 얼굴로 소살우가 재차 소리쳤다.
“그런데 도련님 할아버지는 힘들지 않으세요?”
안타까운 얼굴로 주하연은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힘들-기-는-요. 오히려 기분이 상쾌합니다.”
주하연을 향해 어색하게 웃던 소살우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녀 뒤편에 있는 광자 일행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땅속으로 가장 적게 들어간 놈 다섯 명을 뽑겠다. 그 다섯 명은 다음 회의 때 바위에 무덤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할 거다.”
소살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자 일행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는구나. 형수님 계속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는 이번 작전을 대와선전(大渦旋戰)이라 명명했습니다. 즉 중원 전채를 회오리바람 속으로 끌어들여 분쇄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 시작은 산서성과 사천성에 있는 두 세력의 지부들입니다.”
전면 탁자를 향해 주하연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을 좇던 일행은 일순 소스라쳤다. 탁자 위에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원 전역을 나타내는 지도였다.
“살우 도련님과 일휘 도련님은 이곳을 박살내 주십시오. 진악 시숙과 섯다 도련님은 감숙성과 호님지부를 박살내 주시고요. 절반 정도만 없애 주시면 됩니다.”
주하연은 지도의 두 곳에 십자를 새겼다. 두 세력의 지부가 있는 산서성과 사천성이었다.
“그런 다음 병력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도십시오. 대와선전의 시작은 그때부터입니다.”
주하연은 다시 탁자 위에 둥글게 선을 그었다.
“형수의 작전대로라면 병력을 전부 투입해야 합니다.”
그녀의 의중을 읽어 낸 석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살우와 일휘가 공략해야 할 산서와 사천은 사천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북쪽과 남쪽이다. 그들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병력이 재 투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그녀의 말은 건물인 광풍성을 비우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석두 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이번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전 병력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마보를 취하던 석두 일행을 비롯하여 땅속으로 파고들던 일행들까지 놀란 눈으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주하연은 흔연스레 말을 이었다.
“천붕십일천마 여섯 명이 이곳에 있지만 적에 비해 우리 광풍성은 약잡니다. 그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동력과 삭근제초(削根除草)입니다.”
“밟은 곳을 계속 밟자는 말입니까?”
석두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광풍성 무인들이 통천연맹 지부들을 휩쓸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시 병력을 파견해 올 것이다. 통천연맹 입장에서 보면 동서남북 네 곳에 설치한 지부는 결코 잃어선 안 되는 거점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곳을 다시 다른 각을 투입해 초토화시킨다는 것이 대와선전의 주요 작전이었다.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광풍성 여덟 개의 각은 통천연맹이 있는 섬서성을 둥글게 포위합니다. 그럼 회전하면서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 한꺼번에 그들을 박살낼 겁니다. 그리고 광풍성의 병력은 점점 많아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선은 이 정도로 할 겁니다. 대와선전이 계속 이어질지는 그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습니다.”
탁자 위 섬서성을 기준으로 점점 작아지는 원을 그리며 주하연은 말했다. 비록 광풍성에 모인 이들은 사천 명에 불과했지만 개방과 녹림수로채 무인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들 또한 광풍성에 합류하게 될 터이고, 광풍성 병력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된다.
그들의 합류는 광풍성을 지금보다 더 강하게 만들 것이고, 대와선전은 태풍이 되어 강호 전역을 강타하게 될 것이다.
“사령계와 변황의 무극계도 이 와선풍(渦旋風) 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으음!”
급기야 누구랄 것도 없이 신음을 뱉어냈다.
운남에 있는 사령계와 변황의 무극계까지 전쟁에 끌어들이겠다는 주하연의 배짱이 놀라울 뿐이었다.
“무슨 수로 그들을?”
“백랑이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하여 적을 유인할 겁니다.”
석두의 물음에 주하연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실상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적을 어떻게 유인해 내느냐, 이번 대와선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자신들이 미끼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문제 아닙니까. 광풍성이 비었다는 걸 적이 알아차리면......”
“아닙니다, 도련님. 광풍성은 비지 않습니다. 우리가 떠난 광풍성을 죽음으로 지켜 줄 곳이 있습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주하연은 석두 곁에 앉아 있는 남궁미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헉!”
석두와 남궁미령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가만히 두라고 하였던 소살우마저도 기절할 듯한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당했던 곳 중의 한 곳이 남궁세가고, 버리기로 했던 곳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광풍성을 맡기다니.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그래도.....”
소살우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공격을 당했던 당사자가 그들을 용서하겠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주하연을 향해 남궁미령은 고개를 숙였다. 가문을 버리고 남편을 따랐다고 하지만 언제나 가슴 한편을 누르는 돌덩이가 되어 버린 곳이 남궁세가다. 그런데 주하연의 입으로 친정을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광풍성 일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말이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됐습니다, 이미 지난 일인걸요. 그리고 보급과 병력 운송은 진악 시숙님이 책임지고 해 주셔야 합니다.”
주하연은 이내 고개를 돌려 사진악을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제수씨! 걱정 마십시오. 전국에 걸쳐 있는 산채와 수채에 연락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그런데 군량은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합니까?”
시숙이란 말에 입이 쩍 벌어진 사진악은 환한 얼굴로 물었다.
“팔 개월 치 분량입니다.”
“컥!”
일행의 입에서 두 번째 신음이 흘러나왔다. 팔 개월 동안 중원을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말인 탓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주하연은 확고하게 말했다.
“중원 천지에 광풍성만 남게 되면, 그때...... 우린 귀환합니다.”
일순 대연무장에 정적이 흘렀다.
이곳에 있는 오십여 명의 무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소녀. 아이를 가졌다지만 이제 열여덟 살이라 하였다. 중원을 정복하지 못하면 광풍성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가, 가장 어른이었다.
“하지만 광풍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 아닙니까.”
“그건 석두 도련님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수뇌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석두의 물음에 주하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형수! 옛날에 잘나갔던 형님이 아닙니다. 제 몸 하나도 주체 못하는 늙은이란 말입니다. 우리랑 같이 마보 자세를 취하는 것 못 봤습니까. 그게 다 맛이 갔다는 말입니다. 형님, 귀는 잘 들리쇼?”
다음 이야기를 석두에게 일임하사 섯다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섯다야!”
“말하쇼!”
“사내가 아닌 녀석은 함부로 나서는 게 아니다. 그냥 찌그러져 있어라!”
석두는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섯다를 보며 말했다.
“쿡!”
“킥!”
순간 주변에 무인들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석두의 말로 인하여 한껏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간단히 말하지.”
일행의 얼굴이 풀리는 듯하자 석두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우선은 이곳 대연무장에서 연무를 시작한다. 각 각(閣)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거야. 십 일 정도 그렇게 한 다음 광풍군림대진을 발동시킬 것이다. 진을 발동시키면, 운무가 발생해 광풍성을 감싸게 된다. 그 운무는 우리가 귀환할 때까지는 걷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자금산과 막부산을 수색하여 적의 첩자를 색출한다. 그 일은 산적, 네가 맡아서 해라!”
하며 석두는 사진악을 쳐다보았다.
“말 좀 곱게 하면 어디 덧나나? 수색이고 나발이고 그냥 불을 질러 버리면 어떨까?”
“그것도 좋겠지만 우리가 빠져나갈 때 문제가 생기니까 안 돼.”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 이동은 육로로 할 건가?”
사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둥산을 만들어 버리면 적들뿐 아니라 광풍성에서 빠져나가야 할 아군까지 문제가 생긴다. 결ㅋ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병행해야지. 일부는 육로로 가고 일부는 배를 타고 움직일 거야. 한 번 이동할 때 인원수는 열 명 내외로 할 거고.”
“그럼 작은 배가 필요하겠군.”
“그렇지, 큰 배는 눈에 쉽게 띄니까. 산적, 네가 해 줄 일은 거기까지다.”
“거기까지라니, 그거면 우리가 다하는 거잖아. 식량 장만도 해주지, 이동시켜 주지, 게다가 싸우지. 저 대단한 문파들은 뭐할 건데?”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천붕회 소속 수뇌들을 가리키며 사진악은 말했다.
“소령이 유모 자리 싫어?”
“저 뱁새 눈 자식이 자꾸 넘보잖아! 벌써 삼강오륜도 알고.”
“그럼 다른 아이들도 전부 네가 유모하면 되잖아.”
“거기 너도 포함되는 거냐?”
“무슨 말이냐?”
“제수씨도 자식 낳을 거냐고 묻는 거다. 요즘 보니까 깨가 쏟아지는 것 같더만.”
“우리?”
손끝으로 제 얼굴을 가리킨 석두는 황당한 얼굴로 남궁미령을 쳐다보았다.
“반노환동까지 했는데 자식 낳지 말라는 법 있냐? 노력하면 되겠지 뭐.”
“예끼, 나쁜 녀석아. 아들이 욕해, 임마.”
그래도 싫진 않은 듯 석두는 환한 미소를 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식을 하나 더 낳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럼 큰 틀은 대충 짜진 건가?”
“그렇지, 이제는 주변 정리와 출동만 남았지 뭐.”
두 사람의 말에 일행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정리. 요컨대 마음의 준비를 말하는 것이다. 동료들의 죽음을, 형제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전쟁이 아닌가.
굳은 얼굴로서 있는 일행의 귓전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지금껏 주하연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산이었다.
“한 번만 물어봐라. 광풍성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고. 말일, 거절하면 전부, 죽여라.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알았냐?”
“존명!”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 준비가 되었을 테니까, 들어가서 밥 먹자.”
자리에서 일어난 백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붕십일천마 여섯 명, 무림사황으로 불렸던 두 사람. 그리고 많은 고수들. 겉보기에는 화려한 진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전쟁을 치를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광풍성이 가장 불리한 입장이다.
앞으로 팔 개월 뒤 몇 명이 살아남아 광풍성으로 귀환할 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그때까지 광풍성이 남아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장을 볼 것이다. 전 무림을 도륙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어디 가냐?”
주춤거리며 대열을 이탈하는 섯다와 모사를 발겨한 백산이 물었다.
“어딜 가긴...... 밥은 마누라랑 같이 먹으려고 그러지.”
“그러니까 노망들었다고 욕하는 거야, 임마. 지랄하지 말고 혈뇌각으로 가자. 제수씨들 그곳에 와 있다.”
“엥? 그러니까 형님의 말인즉, 화정이 혈뇌각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단 말이오?”
우뚝 걸음을 멈춘 섯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맞아, 지금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을 거다.”
“어쭈! 그러니까 동생 무인들을 식모로 부려먹는단 말인데. 형님, 그럴 수가 있는 거요?”
비단 백산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잔뜩 불만 어린 시선으로 주하연과 설련을 번갈아보면서.
“우린 죄 없어. 본인들이 와서 음식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것뿐이야.”
“그게 더욱 나쁘다는 거요. 형수님이 음식을 하겠다고 했더라면 허락 안 했을 것 아뇨. 출신이 천하다고 무시하는 거요, 지금!”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탓일까. 이제는 어느 누구 가리지 않고 삿대질을 하며 바락바락 고함을 내질렀다.
“저 새끼 미친 거 맞지?”
멍한 얼굴로 섯다를 쳐다보던 백산은 소살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자 알았소? 삼천 배를 시작할 때부터 반쯤 미쳤었는데 이젠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오.”
소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죠. 미친개는.......”
“이런 씨팔, 날 옛날의 섯다로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지금은 말이야 반노환동을 했고, 독성지체를 이뤘....... 크아악!”
양손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하던 섯다는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뒤편에 서 있던 일휘의 철각이 그의 등판으로 작렬해 들었던 것이다.
“미친 새끼는 몽둥이가 약이야!”
앞으로 털썩 무너지는 섯다의 얼굴로 석두의 오른발이 재차 날았다.
“이런 잡것들이.”
질겁한 섯다는 내공을 끌어올려 전신에 골고루 분포시키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까앙!
날카로운 소리가 대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고, 죽겠네. 좋아, 지금부터 형님이고 뭐고 없어. 한번 붙어 보자고. 덤벼, 잡것들아!”
오장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 섯다는 그 자리에 멈춰 서며 고함을 질렀다. 일순 그의 몸에 검게 변했다. 앙천마마묵독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는 의미였다.
“그따위 앙천마마묵독공은 애들한테나 써먹는 거야, 자식아!”
낮게 고함을 지른 소살우가 지면을 슬쩍 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휘와 석두도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섯다를 향해 다가갔다.
“나도 알아, 인간들아. 하지만 앙천마마묵독공에 심검의 기운이 들어가면 어쩔 건데. 바로 이거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섯다는 양손과 발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피하세요!”
가공할 기운이 몰아치자 주하연은 대연무장 가장자리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사부!”
뒤쪽으로 몸을 날리던 거령이 사진악을 불렀다.
“왜?”
“저 양반들, 지금 제정신입니까?”
공간을 찢어발기는 가공할 무공보다, 서로를 향해 전 내공을 쏟아내는 그들의 정신 상태가 더 의아했다. 광치나 유몽의 말처럼 정말 정신병자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비단 거령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풍신웅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의문스런 얼굴로 사진악을 쳐다보았다.
“쯧쯧! 너희들은 성격만 저들을 닮았다. 머리는 한참 부족하단 말이다.”
한심스런 눈으로 제자들을 쳐다보며 사진악은 혀를 찼다.
“사부!”
“멍청한 녀석들. 저들만 쳐다보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고 말을 해라,:
“주변? 세상에.”
의아한 얼굴로 광풍성 수뇌들을 쳐다보던 거령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던 저들의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천붕십일천마의 비무를 지쳐보는 그들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바로 저것이었다.
사기. 지금 대연무장을 쳐다보고 있는 이는 비단 저들뿐만이 아니라 각 건물에서도 모든 부하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에게 천붕십일천마의 진솔한 실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강호 무림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 광풍성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느닷없는 비무는 그런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영물들이 맞기는 하네요.”
강기와 심검의 기운이 난무하는 허공을 쳐다보며 거령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들 주변 십여 장이 붉고 검은 강기로 가득했다.
누가 누굴 공격하는 건지, 서로를 향해 공격하면서도 저들은 밀려오는 강기와 심검의 기운을 막아내고 있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그들이 허공에 머문 지 벌써 이 각 이상이 지났다는 사실이다.
이 각, 한 끼 밥을 먹는 시간의 단위인 한 식경과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저들은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아니 쌈질을 하고 있다.
영물, 또는 괴물.
천붕십일천마는 그렇게 불러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사부도 한 방 날리시지 그래요? 아침 운동 겸해서.”
“그럴까?”
싱긋 미소를 지은 사진악은 허리춤에서 화황척을 꺼내들었다.
“오랜만이네.”
슬쩍 내공을 주입하자 뜨거운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과거 귀마겁 때 사용한 이후 단 한 번도 뽑아 보지 않았던 화황척이다. 은거를 택해 산으로 숨었을 뿐더러 화황척을 뽑을 정도로 강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화악!
화황척에서 가공할 열기가 솟구쳐 나와 그의 전신으로 번져 가는 순간, 사진악의 신형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백색 투명한 기운에서 흘러나온 열기는 대연무장 가운데 있는 백산 일행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삼 장 아래 바닥이 푸석하니 타올랐다.
번쩍 손을 들어 올린 사진악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벽력혼원황(霹靂混元荒)!”
사진악의 손을 떠난 화황척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불새였다. 화황척이 지나가는 아래쪽 대지가 하얗게 타올랐다.
“뭐야 이거! 사진악, 이 개자식!”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섯다는 양팔을 활짝 벌려 가운데로 사정없이 합쳤다. 가공할 열기를 동반한 화황척은 그라고 해서 쉽게 잡아 낼 무기가 아니었다.
“타핫!”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대연무장을 강타했다. 순간 그 광경을 쳐다보던 일행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박수를 치듯 가운데로 모아지던 섯다의 양손은 무엇에 막힌 듯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물러나고 있었다. 천붕십일천마, 천하제일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가 밀리고 있는 것이다.
벽력황 사진악, 그 또한 천붕십일천마 못지않은 강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거령을 비롯한 무욕인 후손들의 어깨가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사진악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별로 당황하지 않고 화황척을 받아내는 섯다 때문이었다. 물러서고는 있지만 전력을 다한 화황척이 그에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벽이었다.
‘하기야, 반노환동을 겪은 녀석들인데.’
애써 자위해 보지만, 그런다고 씁쓸함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두고 연마했던 무공이 아닌가.
그때 사진악의 귓전으로 나직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헛생각하지 마, 임마. 저들은 승천무극대혼진에서 살아 나온 놈들이야.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것뿐이라고.]
백산이었다.
[나도 인간이야, 임마.]
[우린 괴물이잖아, 자식아.]
[그래, 잘났다, 아주 잘났어.]
결국 웃고 말았다. 스스로의 강함을 두려워하는 녀석들. 강하다고 뻐기지도 않고, 자신들이 잘나서 강해진 것이라 여기지도 않는 사람들. 그저 운이 좋아서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저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질투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부러운지도 모른다.
[그놈의 연극은 언제까지 할 거냐?]
되돌아오는 화황척을 받아들며 사진악은 물었다.
[그만 끝내야지.]
전음과 함께 백산의 몸에서 열두 자루의 광혈지옥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광혈지옥비는 사방에 그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광풍성 무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영물들이 아침 운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감시란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더구나 따뜻한 계절도 아니고 찬바람이 씽씽 불어 닥치는 겨울, 그것도 산중에 은신해 있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제길, 추워죽겠네.”
뿌연 운무에 휩싸인 광풍성을 쳐다보던 대길산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가 있는 곳은 자금산 꼭대기 자그마한 토굴 안이었다.
두꺼운 옷을 껴입고, 귀마개까지 했지만 한밤의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산등성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통천연맹의 소속으로 바뀌면서 대산길이 받은 첫 임무는 광풍성 감시였고,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오십여 명의 통천연맹 무인들이 자금산에 들어와 있다.
천붕십일천마, 그들은 강호 질서의 파괴자들이었다. 그들 이래 강호 제일로 추앙 받던 사황십정칠사는 이류로 전락했고, 십룡이나 하는 신진들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패왕이라 불린 팽월이 천붕십일천마 앞에서 팔을 자르고 목숨을 구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부분 강호 무인들의 촉각이 광풍성으로 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감시할 게 있어야 감시를 할 것 아닌가.”
대길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름 전만 해도 한 낮이면 광풍성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대연무장에 나와 무공을 연마하는 모습을 확인했고, 맹에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는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뿌연 운무가 솟구치기 시작하더니 광풍성 전체를 감싸 버린 것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보이는 희미한 그림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조장님!”
“움직이지 말라니까 왜 왔나?”
아래로부터 다가오는 부하를 향해 대길산은 낮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시계가 나오지 않습니다.”
부하는 엉거주춤 선 채 말했다.
“기다려라! 맹에서 소식이 오면 그때 결정하도록 한다.”
대길산은 낮게 말했다.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인 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철수 명령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자리를 이탈할 수도 없다.
“알겠습니다, 조장님! 억!”
“무슨 일이냐?”
나직한 비명 소리와 함께 부하의 몸이 풀썩 쓰러지자 대길산은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설마?”
“맞다, 놈! 네놈을 끝으로 자금산에 들어와 있던 통천연맹과 사령계 첩자들은 전부 뒈졌다.”
대길산 등 뒤로 나타난 자는 유몽이었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몽은 철류를 가볍게 그었다.
툭!
토굴 밖으로 내밀고 있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대길산은 손수 팠던 토굴의 영원한 주인이 되고 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아래쪽에서 거령이 올라오며 유몽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공훈을 세운 이들이 있다면 단연 유몽을 비롯한 잠영오살이었다. 숨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 유몽에게 알리면 그들은 월영은둔술로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수색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적의 은신처를 확보한 다음 추살이 이루어졌다. 방금 죽어 간 놈들까지 합치면 거의 백여 명에 달한 간세를 지난 이틀간 없앤 것이다.
“수고는 무슨, 자네들이 날 도와줬지.”
철류에 흐르는 피를 털어 내며 유봉은 웃으며 말했다.
하루빨리 강호를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섯다와 같이 더 생활하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요즘도 심하게 맞습니까?”
거령은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오십년 전 귀마겁을 일으켰던 무인들 중 그나마 정신 상태가 제일 나은 사람이 사부였다. 영물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같이 생활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유몽이나 광치는 아니었다. 언제나 퉁퉁 부은 얼굴로 다녀, 지금 얼굴이 진짜인가 싶을 정도였다.
“맞는 것도 맞는 거지만 도무지 사람 취급을 안 해 줘. 기껏해야 스무 살 차이 아니냐고.”
“맞습니다, 형님. 강호 생활에서 스무 살 차이면 분명히 대우를 해 줘야지요. 열 살 차이면 거의 친구 아닙니까?”
“.......거령, 너 몇 살이라고 했지?”
거령을 빤히 쳐다보던 유몽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쉭!
“혀, 형님 이게 무슨 짓이오?”
갑자기 목 앞에 새파란 광채를 드러내는 철류를 거령은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깍듯이 모셔, 맞먹으려 들면 동생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릴 테니까.”
“알았으니까 이 칼 좀 치우십시오.”
서슬 퍼런 유몽의 말에 거령은 말을 더듬었다. 장난말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를 두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몽의 표정은 정말 검을 밀어 넣을 듯 섬뜩했다.
“어? 미안하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유몽은 철류를 거둬들였다.
“그런데 형님 검이 본래 그랬습니까?”
제 목을 슬슬 쓰다듬으며 거령은 물었다. 산 속에 틀어박혀 무공만 연마했던 탓에 강호 무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유몽의 철류는 막아 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철류의 움직임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철류를 그저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게 없구먼. 아니 그 인간 밑에 있으면서 실력이 더 줄었단 말이야.”
“그게 아닙니다, 형님. 방금 형님의 철류에는 살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줄 뻔히 알면서도 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니까요?”
“그럼 철류가 살기를 뿌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살기가 뭡니까, 그냥 대기처럼 다가왔다니까요.”
거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철류가 더 이상 살기를 뿌리지 않는다는 건, 살수인 내가 활검을 얻었다는 의미니까.”
제 자신도 놀란 듯 유몽은 어깨를 으쓱했다.
살검(殺劒)으로 살황의 칭호를 얻은 자신이 활검(活劒)을 얻었다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의미이리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심검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젠장, 얻어맞다가 심검을 얻은 놈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다.”
광풍성을 내려다보며, 유몽은 감격스런 얼굴로 말했다. 살검을 휘두른 자는 절대 심검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심검의 초입에 다다른 것이다. 그들 때문이다.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얻어들은 지식들이 철류에서 살기를 거둬 간 것이리라.
“앞으로 더 잘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려.”
“내가 모셔야 할 게 있기나 하냐. 모실 기회조차 안 주고 부려먹는 사람인데. 그만 내려가자.”
활짝 가슴을 편 우몽은 아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방금 그 기분을 떠올려 완전한 심검을 얻고 싶다는 조바심에 유몽은 걸음을 서둘렀다.
유몽이 감격한 표정을 짓는 그 시간, 그가 쳐다보았던 광풍성에서도 감격에 겨워 울먹이는 남자가 있었다.
“안 죽는다! 안 죽어! 계속 살아 있다고!”
“장랑, 소리 좀 죽여요!”
질겁한 화정은 재빨리 섯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건 이 각 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섯다의 온몸을 주물러 준 다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잔 걸까. 문득 이상한 느낌에 깨어난 화정은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고 있던 자리옷은 흐트러진 채였고, 그 안으로 투박한 손이 파고들어 온몸을 휘젓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섯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자는 척하며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교태 어린 비음과 함께 자연스레 옷이 벗겨 내리도록 몸을 틀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화정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는 그것은 분명 그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커다란 외침 소리를 들었다.
“봐라! 일남아, 보란 말이다. 나도, 이 섯다도 이제 정상적인 사내가 되었다. 자, 보란 말이야.”
고함을 지르며 섯다는 이불을 사정없이 걷어냈다.
마음 같아선 밖으로 뛰쳐나가 외치고 싶었다. 지난 오십 년간 죽었던 그놈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알몸이 무슨 상관이랴. 다시 사내가 되었는데 창피함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장랑, 어서!”
눈물을 흘리던 화정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가 온몸을 주무른 통에 이미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아니 자신의 준비보다는 그가 더 중요했다. 완전히 살아났음을 확인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흥분한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남자가 되었다는 섯다와, 이제는 완전히 그의 정실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뒤엉킨 뜨거운 눈빛. 잠시 서로의 몸을 탐하던 두 사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성마른 신음이 실내를 타고 울렸다.
“허어억!”
“하악!
섯다의 오십 년 세월과, 화정의 십 년 세월이 동시에 사라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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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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