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형석의 100년 산책] 푸틴의 러시아, 시진핑의 중국…그곳에 정신문화가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2.09.30 00:58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젊은 시절 러시아문학에 푹 빠져
공산정권 이후 위대한 전통 소멸
유물사관이 중국·북한 유산 파괴
자유주의의 목표는 인간성 회복
도스토옙스키·차이콥스키·샤갈…
내 중학생활은 톨스토이와 함께 자랐다.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전쟁을 하던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과 평화 문제를 알아보겠다는 철없는 욕심이었던 것 같다. 읽는 동안 그런 내용이 아니고 장편소설이라는 것과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세계적 문호인 것도 알게 되었다.
대작을 읽고 나니까 『안나 카레리나』 도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더 유명하다는 『부활』도 읽었는데 두 장편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학예술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 주었고, 사상과 예술세계의 넓은 무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톨스토이의 종교관 인생론 등도 읽었다.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톨스토이는 내 정신적 스승 같다.
대학에 가서는 도스토옙스키에 심취했다. 그의 영향은 오래 계속되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인용했고 내 글 속에는 톨스토이는 사라지고 도스토옙스키와 독일의 니체, 덴마크의 키르케고르가 등단했을 정도였다. 내가 톨스토이의 사상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학적 철학 문제에 빠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러시아문학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지냈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철학과 사상 분야 책들도 읽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세계 무대를 꾸며 주었고, 샤갈의 그림은 현장작품과 회화도서로 애정을 갖고 감상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일·영국·프랑스보다도 예술성이 있는 작품의 영향과 혜택을 더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내 정신과 사상은 물론 예술적 DNA에 러시아적인 흐름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따져보면 서구적인 것보다는 러시아가 훨씬 동양적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아도 남녀 간의 애정보다 부모·자녀 간의 관계가 더 많이 다뤄졌으며, 개인과 합리주의보다 우리 의식과 정서적인 인간, 사회관계가 풍부하다. 미국문화에 비하면 동양적이면서도 뿌리 깊은 전통에서 성장한 특수성을 갖추고 있다.
북한에서 해방을 맞으면서 소련 군인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소련과 북한 공산정권의 현상을 보면서 내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온 문화적 유산은, 공산주의 정신과 정반대일 뿐 아니라 적대적인 것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광성중학교 17세 정도의 학생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삐라를 뿌렸다고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됐다. 정치범으로 몰아 시베리아로 끌고 가 7년여 동안 굶주림과 학대를 일삼으며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 후에도 10여 년을 죄수 같은 신분으로 고생했다. 동급생 20여 명이 끌려가 대부분이 죽고 그중의 한 학생이 47년 만에 서울로 찾아와 가족들과 상봉한 일이 있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 정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6·25전쟁을 모택동과 합의로 유발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 문제를 떠나 소련의 공산정권이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지금까지 폐허화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때와 같은 정신문화의 전통과 유산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91세로 작고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느냐”는 질문에 마르크스 레닌이 아닌 “러시아문학”이라고 대답했다. 문학은 이념이나 정치의 길이 아니다.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도 그렇다. 한·중수교가 성립되면서 주한대사관에 와 있는 한 외교관을 만났다. 중화인으로 일찍이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내가 그에게 “지금 중국은 유학(儒學)을 중심 삼는 전통정신과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정치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밀려드는 과학성을 갖춘 사회사상이 공존해 있는데 앞으로 어느 편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 외교관은 지체 없이 전통문화라고 했다. 나는 덩샤오핑의 사상을 따르며 지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대답이 옳았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 중국이 과시한 중국문화는 역시 유구한 역사를 계승하는 윤리성에 입각한 문화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2의 마오쩌둥을 자처하는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스탈린과 푸틴의 노선을 연상케 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중국의 생명력이며 아시아에 영향을 남겼던 인간문화는 사라지고, 제2의 소련과 같은 유물사관이 사상문화계를 황폐화할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다.
나도 10여 년 전까지는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유명 대학들 주변 서점에 가도 젊은이들이 읽을 만한 인문학과 사상 관련 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문화를 연구하려면 대만이나 일본으로 가야 할 현실이 되었다.
독재정치·이념의 제물이 된 예술
북한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잘못된 정치이념, 정권욕 때문에 정신과 사상적 자유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국민에 대한 진실과 정직의 가치는 소멸하였다. 당에서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정의이며 절대가치이기 때문에 비판과 반대는 용납되지 않는다. 사상과 인격을 갖춘 지성인은 설 자리가 없으며, 언론의 자유는 처형 대상이 된다. 인문학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정치선전의 수단으로 전락했고, 해방 직후 북조선으로 사회주의를 믿고 월북했던 학자·예술인들은 배제되거나 숙청된 지 오래다. 국민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고 인격은 정권의 제물이 되었다. 러시아·중국·북한의 공산화는 아시아의 자유와 정신문화를 독재정치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무엇이 해결책인가. 인간성의 회복이다. 인격과 삶의 가치를 복구시켜야 한다. 양심의 자유와 인간애의 질서를 정착시켜야 한다. 자유와 정신문화를 말살하는 정치력을 배격하고 인문학과 인간주의를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선결과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