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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퇴계의 ‘위기지학(爲己之學)’ - 선비, 왕도를 말하다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65 14.12.20 09: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선비, 왕도를 말하다 -

퇴계의 ‘위기지학(爲己之學)’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관직에 140여 차례 임명되고 79번 사직서를 쓴 별혐(別嫌)의 화신…조광조의 급진성을 경계하고 현실에 기반한 보수적 개혁을 추구

 

 

눈 덮인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퇴계 이황이 창건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모체로 그의 제자와 유림들이 세웠다.

 

 

몸을 벼슬에서 물리니 어리석은 분수대로 평안하나(身退安愚分)/

배움은 퇴보해 지는 해에 이른 나이 되어 근심만 가득하네.(學退憂暮境)/

이제야 비로소 계곡 위에 살 곳을 정했으니(溪上始定居)/

흘러가는 물과 마주하며 날마다 성찰할 수 있으리.(臨流日有省)

 

 

퇴계 이황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게 군자라고 했다.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쓴 시다. 49세 때 풍기군수로 재직하다가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해임을 요청한 뒤 군수직을 버린 뒤 썼던 글이다.

 

세 번이나 이사하며 평생 소원이던 독서와 학문, 교육자로서의 후반전 삶을 시작할 곳을 찾다가 시냇물이 흐르는 계상(溪上)에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관료 이황’이 아닌 ‘학생 퇴계·’ ‘학자 퇴계’라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황은 풍기군수였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인생 2막이 될 학문의 길, 교육자의 삶이란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듯하다. 그 결과 국가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민간 교육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나라가 정해준 서원 이름과 국고 지원은 그 시작이었다. 사학의 재발견과 육성이라는 그의 비전은 훗날 60세에 완성된 도산서원에서 꽃을 피웠다.

 

그와 같은 인생 후반전을 위한 ‘선택’의 상징, ‘결단’의 의지는 그가 스스로 지은 호인 ‘퇴계(退溪)’에서 만날 수 있다.

 

42세부터 은퇴를 고심하다가 46세에 낙향해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거처를 정하면서, ‘토계(兎溪)’라는 냇가 이름을 ‘퇴계(退溪)’로 바꾸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관료 이황’의 삶을 끝내겠다는 자기 선언으로, ‘물러날 퇴(退)를 쓴 것이었다.

 

그의 사직서 중의 하나인 무오년(1558년) 사직소(辭職疏)에는 “일의 마땅함(宜當)을 이르는 ‘의(義)’라는 한 글자를 성취”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은데 어리석지 않은 체하며 벼슬을 도둑질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병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벼슬에 앉아 녹만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옳지 않은지 알면서 덮어놓고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직무를 다하지도 못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46세 퇴계의 ‘퇴(退) 선언’과 58세 퇴계의 ‘의(義) 선언’은 오늘날의 일부 리더가 온갖 추문에도 관직과 명예에 연연해하며 사는 부끄러운 모습에 경종을 울린다. 또 인생 2막을 고민하는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의미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퇴우이선생진적첩> 첫머리에 ‘계상정거도’를 그렸다. 천 원권 지폐 뒷면 도안으로도 알려진 그림이다.

 

 

지독한 노력이 만든 위대한 학자

 

이황은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 이식을 여의었고, 할머니 여양 김씨와 어머니 춘천 박씨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춘천 박씨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인이었다. 7남매를 키우면서도 가난했던 선비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자상했지만, 과부의 자식이란 비아냥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엄하게 가르쳤다. 퇴계를 과거시험으로 이끌었던 것도, 특별한 스승이 없었던 그에게 스승같이 큰 영향을 준 것도 어머니였다.

 

여섯 살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운 게 학문의 시작이었다. 12세부터는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에게 <논어>를 배우며 유학의 큰 바다로 들어갔다. 그러나 퇴계의 학문이 제대로 익을 무렵인 17세 때 스승 이우가 세상을 뜬 뒤로는 평생 스승도 선배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10년 동안 공부를 하고도 제대로 입문할 길을 몰라 헛된 생각만 하고 갈팡질팡했다. 때로는 눕지 않고 고요히 앉아 밤을 새우다가 결국에는 몸이 파리하고 고단해지는 심병(心病)을 얻어 몇 년 동안 학문을 중단해야 했다”며 스승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지는 천 원짜리 지폐에 실린 병들어 쇠약한 모습의 초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학문 자체를 즐겼기에 과거시험은 순탄하지 않았다. 23세부터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서울의 성균관에 처음 유학한 뒤 11년 만인 34세가 되어서야 급제했다. 처음 시험을 본 24세에는 3번이나 연달아 낙방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과거시험이 달갑지 않았던 탓이다. 젊은 고시생 이황이 지지부진할 때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날 시골집에 있는데, 밖에서 ‘이 서방’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부르는 줄 알고 천천히 살펴보았더니 내가 아니라 자신의 늙은 종을 찾는 소리였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내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기에 ‘이 서방’이란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때부터 과거에 급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한 양반 선비의 자격지심이 그의 명예욕에 불을 질렀다. 그 후 고시생 이황은 치열하게 공부했다. 27세에 경상도 향시(鄕試) 진사시험에서 장원, 생원시험 2등을 했다. 서울에서 치르는 시험만 통과하면 끝이었다. 그러나 호사마다(好事多魔)라고 해야 할까. 그해 겨울 평생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결혼 생활의 서막과도 같은 21세 때 결혼했던 김해 허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급제의 길은 다시 멀어졌다. 34세야 비로소 문과 대과에 급제해 허울만 양반인 신분을 벗었다.

 

퇴계는 자신의 고시생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아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벼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어머니를 모시며 병이나 다스리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 형님이 간곡히 권해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했다. 몇 달 동안 부지런히 노력했지만 간섭받는 일이 너무 많았다.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곳이어서 정신이 어지러웠다. 한밤중에 가만히 관료 생활을 생각해보니 내가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에 급제했기에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합격하지 않았다면,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했을 리 없다.”

 

퇴계가 40대 중반부터 벼슬을 거부하고, 사직서를 수없이 쓰면서 인생 2막을 고민했던 이유다. 퇴계가 시험공부를 지독히 해서 붙었던, 혹은 그의 말처럼 ‘어쩌다 붙었던’ 조선시대의 과거 급제자들의 많은 일화와 비교해보면 퇴계는 천재는 아니다. 특히 퇴계가 은퇴한 뒤 자신의 서당으로 찾아와 학문을 논할 정도로 탁월했고 과거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수석을 차지했던 선천적 천재였던 율곡 이이, 퇴계의 제자로 퇴계 스스로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류성룡 등과는 그 급이 완전히 다르다.

 

결혼과 부인과의 사별, 재혼 등의 이유도 있고, 자신이 시험공부보다 학문 자체를 좋아했다고 했지만 그는 과거시험을 세 번이나 내리 낙방했다. 이는 그가 타고난 천재는 결코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퇴계의 제자들이나 퇴계를 연구한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도 ‘천재 퇴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20세 때 <주역>을 지독하게 공부하다가 평생을 괴롭히는 병에 걸렸다는 말처럼 몰입해서 공부하고, 끊임없이 사색해 대성한 노력형 학자이다.

 

 

퇴계 종택의 현판.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은 도학의 근원이 된 곳이란 뜻이다. 1929년 종택을 다시 지을 때 전국의 450여 문중에서 성금을 냈다.

 

 

도산서원에 보관된 퇴계의 서책들.

 

 

사화(士禍) 시대의 참다운 명철보신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선비의 수난기였다. 퇴계도 조선시대 4대 사화의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498년에는 4대 사화의 첫 번째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4살 때인 1504년에는 연산군의 폭정이 만든 갑자사화(甲子士禍), 19살 때인 1519년에는 조광조 등이 숙청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45세로 관직에서 한창 뻗어나갈 때인 1545년에는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최후의 공세였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선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내몬 사화는 퇴계 주변 인물들의 삶을 망가뜨렸고, 퇴계 자신의 삶과 관직에 대한 생각까지 바꿔놓았다. 퇴계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소극적이었고 온화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퇴계를 치열한 권력투쟁을 이끄는 남성성 대신 안팎의 살림살이에 더 충실했던 여성성을 지닌 본래의 성품에 따라 살도록 추동했다. 그가 추구한 학문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학문’이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퇴계는 연이은 사화로 온갖 참화를 입은 영남 사림의 일원이었고, 자신의 가족 중에도 사화 피해자가 있었다. 퇴계의 둘째 부인과 넷째 형이 희생자다. 둘째 부인 권씨는 퇴계와 결혼하기 전부터 정신이 온전치 않았는데, 거듭된 사화가 원인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그녀의 할아버지 권주는 평해, 아버지 권질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 가정이 풍비박산 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1505년 유배 중인 권주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권주는 높은 누각에서 투신, 자결했다. 권씨 부인의 할머니 고성 이씨는 남편 권주의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아버지 권질은 중종 반정 이후 풀려나 잠시 복권되었지만 그것도 몇 년 가지 못했다. 권씨 부인의 작은아버지 권전이 기묘사화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다가 형장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권질도 또다시 귀양을 가야 했다. 권씨 부인은 연속된 비극 속에서 결국 실성을 하고 말았다. 그런 상태에서 퇴계의 고향 예안으로 유배 온 권질과 교류했던 퇴계는 첫 부인 사별 후 3년 만에 권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퇴계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권씨 부인과 살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퇴계가 과거에 급제해 첫 관직을 얻을 때도 사화에 연루된 권씨 집안 때문에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나지 않고 차분한 성격으로 묵묵히 소임을 다했기에 능력을 인정을 받아 전도유망한 관료로 성장해갔다.

 

불혹(不惑)의 나이인 40대 중반, 퇴계를 관료의 삶에서 물러나게 만들 또 다른 고난이 연이어 찾아왔다. 45세에 일어난 을사사화다. 주도자의 한 사람인 이기(李?)가 퇴계의 관직 삭탈을 주장해 파직됐다. 그러나 이기의 측근이었던 임백령(林百齡)이 “이 아무개는 근신하며 제 할 일만 하는 사람인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안다. 이 사람까지 죄를 준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전날의 처벌을 받은 사람까지도 모두 모함에 빠져서 억울하게 죄를 입었다 할 것”이라며 퇴계의 복직을 주장해 퇴계는 다시 복직됐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대(對) ‘위인지학(爲人之學)’

 

임백령의 퇴계 복직론을 보면, 당시의 퇴계는 현실의 권력투쟁과 관계없이 업무에만 충실한 전문직 관료다. 퇴계에게 청년 이이가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을 때, “마음가짐은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마땅히 일을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던 것, 퇴계 스스로 항상 혐의를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별혐(別嫌)’을 생활화한 것도 피바람이 불던 시대에 관료 퇴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그와 같은 퇴계의 처신도 삶에 때때로 찾아오는 고난과 불우한 시대의 재앙은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듬해인 1546년, 정신이 온전치 못해 늘 마음고생을 시키며 돌봐야 했던 권씨 부인이 결혼 16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결혼 생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러나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동안 몹시 괴롭고 심란해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다.”

 

또한 1550년, 50세가 되었을 때는 을사사화의 여진까지 덮쳐왔다. 1528년에 과거에 급제해 이조 정랑, 도승지, 대사헌, 대사간, 예조 참판, 황해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거쳐 승승장구하면서 한성부 우윤으로 있던 넷째 형 이해(李瀣, 1496~1550)가 퇴계를 한때 파직시켰던 이기의 모함으로 곤장을 맞고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떠나는 길에 사망했다. 퇴계 집안에 처음 닥친 사화의 재앙이었다.

 

이황의 ‘퇴(退)’는 그와 같은 시대의 고통, 불행한 부부생활, 질병에 시달리는 건강상태, 자신의 학문에 대한 사랑이 모두 모아진 인생 전반전의 결론이다. 물론 이황처럼 물러남을 중시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도 많다. 모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과 같은 권력무상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의 창업자 유방을 도왔던 장량(張良)은 대표적 ‘퇴(退)의 인물’이다. 그는 한나라가 세워지자 신선을 따라가 살겠다며 권력을 버리고 은둔했다.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장량의 처세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신하가 공명을 세우고 나면 난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한나라 고제(유방)가 부하들 중에서 칭찬한 사람은 삼걸(三傑)뿐이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사형당했고, 소하(蕭何)는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최고가 되고 나서도 욕심을 멈출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량은 신선에 의탁하여 인간 세상을 버렸다. 또한 자신의 공명을 한낱 물건처럼 여겼고,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았다. 이른바 밝은 천리를 알아 자신을 보존(明哲保身)한 사람은 장량밖에 없다.”

 

명철보신 했던 인물들은 또 있다.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의 태자 스승이었던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태자를 한동안 교육시키다 갑작스럽게 은퇴했다. 그들은 노자가 말한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知足不辱, 知止不殆)”를 인용하며 출세의 기회를 버리고 낙향해 황제와 태자가 준 재물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말년의 인생을 즐겼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옛 선비들의 처신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과거에 급제해 관료로 사는 길, 은거해 책을 읽고 제자를 키우는 산림(山林)의 길, 혼란한 세상 자체를 멀리하고 시골에 묻혀 지내는 은일의 길이다. 사마광이 높게 평가한 장량이나, 소광·소식의 방식이다.

 

 

2012년 3월 도산서원에서 거행된 춘계향사례.

 

 

실현 가능한 점진적 개혁을!

 

퇴계의 명철보신은 자신만의 몸보신과 같은 은일의 길은 아니었다. 선비 이황은 젊어서는 첫 번째 방식인 관료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전문성과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조용히 자신을 지켰다.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2막에서는 산림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세상과 완전히 절연하는 은일의 길이나 중국의 명철보신을 추구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퇴계는 자신을 지키는 명철보신을 선택했지만, 전직 관료로서 책임감을 갖고 자신이 살던 시대와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직언을 올렸다. 또 스스로 학문을 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제자들을 바르게 키우고, 자신의 학문세계를 펼쳤다. 퇴계의 길은 자신을 건사하면서도 세상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산림의 길이었다.

 

퇴계는 관료로 있을 때나, 떠나있을 때나 자신을 갈고 닦는 수기(修己)에 치중했다. 학문의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기(修己)를 하면서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실천 없이 말뿐인 ‘세상을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의 삶을 위해 표준을 세우며, 단절된 성인(聖人)의 학문을 계승하고, 모든 세대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 학문’은 결국 거짓이고, 명성과 칭찬을 구하는 학문, ‘남을 위한 학문(爲人之學)’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사화가 일어난 원인도 수기(修己)없이 ‘위인지학’만 하는 임금과 신하들의 헛된 욕망 탓으로 보았다. 특히 퇴계는 임금이 솔선수범해 ‘백성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베풀 수 없는 하늘을 대신해 행하는 사람’인 것을 깨닫는 ‘위기지학’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보았다. 퇴계의 눈에 비친 세습군주제 하의 임금은 아무리 나빠도 백성이 뒤집지 못하고, 아무리 포악해도 쉽게 바꾸기 어려웠다. 퇴계의 해법은 학문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수양을 하는 임금을 만드는 것, 성군화(聖君化) 만이 위기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선택 가능한 차선책이었다. 그래서 선조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私)는 마음의 좀이고 모든 악의 근본이다. 옛날부터 나라가 잘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이 많아 자신을 파멸시키고 나라를 망친 것은 다 임금이 ‘사’라는 한 글자를 능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계는 또한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들도 임금처럼 ‘위인지학’ 대신 ‘위기지학’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퇴계는 조선 사림의 상징인 조광조를 비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조광조의 실패 이유를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해 시행한 일들이 너무 지나쳤다”고 풀이하면서 조광조의 학문 미성숙이 오판을 불렀다고 보았다. 특히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에게 군자의 뜻을 펼친다 해도, 때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보지않는다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며 급진적 이상주의를 비판했다.

 

퇴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조광조의 실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실패가 가져온 엄청난 피해에 주목했다. “기묘년의 인재들은 그냥 저절로 키워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개혁을 너무 급하게 추진하다가 사림에게 화를 일으켰다.”

퇴계는 엄혹한 현실에 맞서 이길 수 없는 조광조의 설익은 개혁, 준비되지 않은 개혁, 열정만 있는 이상론이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평가했다.

 

퇴계는 현실의 시스템을 유지해야 하는 관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기에 권력의 속성과 개혁의 어려움을 잘 알았다. 그러나 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수구주의자는 아니다. 철저하게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추진하는 보수적 개혁주의자 혹은 개혁적 보수주의자가 퇴계였다.

 

44세에 중종에게 올린 일본과의 사신 교류를 주장한 ‘왜의 사신을 끊지 말 것을 청하는 소(乞勿絶倭使疏)’, 53세에 주장한 ‘서얼 자손의 과거시험 금지 해제 반대론’, 68세 때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17세의 선조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가 그런 그의 보수적 개혁론을 담고 있다.

 

임금 자신의 수양이 더 급하다

 

‘걸물절왜사소’에서는 1510년에 일어난 삼포왜란 이후 계속된 일본과 단교 정책 대신 외교관계의 회복을 주장한 상소다. 당시 왕이나 조정의 대다수 신하는 일본의 외교 회복 요청에 대해 ‘본때를 보여주자’며 반대했다. 그러나 퇴계는 그들이 침략해 올 빌미를 주지 않도록 적극적인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이적(夷狄)은 금수(禽獸)라고 합니다만, 저 이적 역시 사람일 뿐입니다”라며, 당시 조선 지식층의 대부분이 일본인을 짐승처럼 여기는 비현실적 일본인관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침략을 방어할 능력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북쪽의 여진족과도 갈등상태에 놓여있기에 일본과의 단교 지속은 위험한 정책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의 탁상공론이나 다름없는 ‘이적론’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의 전쟁 방지를 더 중요시했다.

 

서얼 인재의 등용도 큰 논란이었다. 명종과 다수의 신하는 서얼의 등용을 위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과거 금지를 해제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황은 “국속(國俗)을 갑자기 변경할 수 없고, 예법(禮法)을 갑자기 허물 수 없다”며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심지어 “중국에서 서류(庶流) 중에서 인재를 얻은 경우도 있었으나 아주 드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천백 명 중 겨우 한두 명이다. 오히려 서얼 중에서 무뢰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할 정도로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탁월한 서얼의 경우에 한해 인재별로 해결하자는 실용적 해결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무진육조소’는 퇴계의 ‘보수적 개혁론’의 결정판이다. 6가지 항목으로 된 이 상소문 중 첫째와 둘째는 방계 출신의 선조가 왕가의 계통과 충돌해 갈등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고, 셋째부터는 임금이 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를 하는 것보다, 임금 자신의 자기 수양이 더 급하다는 임금 수양론이다.

이 6가지 항목은 또한 “상도(常道)를 따르는 수구 세력에게만 의지하면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없고,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신진 세력에게만 맡기면 재앙과 분란의 단서를 빚어내게 될 것”이라고 보수적 개혁론으로 모아진다.

 

은퇴 자체는 물론, 벼슬 거부까지도 더 높은 관직을 받기 위한 거짓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던 퇴계의 삶은 그의 마음 닦기를 이해하지 못한 범인의 생각에 불과하다. 그의 보수적 개혁론도 급변하는 오늘날 분명히 새겨볼 대목이 많다. 퇴계가 퇴계로 지금까지 존중받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 때문이다.

특히 “나아가는 것이 옳을 때 나아가면 나아가는 것이 공손함이 되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옳을 때 나아가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 것이 공손함이 된다”는 때를 잊고, 능력을 잊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볼 이야기다.

 

 

/ 월간중앙

201402호 (20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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