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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넘버링 시리즈의 일부로, 이것만 보시면 이해가 잘 안되는 글입니다.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http://cafe.daum.net/sweetjissouseki/eOP9/7
이 링크로 들어가셔서 넘버링 시리즈에 있는 글들을 읽고 감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장석 관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연락 바란다.’
이렇게 문자를 보낸 뒤 몇 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리더니 답장이 왔다.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조금 있다 전화를 주겠다는 뜻인가?
나는 연락을 기다릴 동안 시간을 때울 겸 월간 짓소 이번 호를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번 호의 특집 ‘위석 심리학, 추악한 사기극의 진실’의 세 번째 단락을 흥미롭게 읽고 있던 찰나, 내가 듣게 된 것은 핸드폰의 진동이 아니라 실장학교 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딸랑
“선배!! 넘버링! 넘버링 어딨어요?”
순식간에 문을 열고 들어와 헐떡이며 넘버링을 찾는 목소리는 비록 기다렸던 전화는 아니지만 기다린 사람은 맞았기에, 나는 당황치않고 차분히 말할 수 있었다.
“작업복 입은 걸 보니까 일하는 중이군. 여기 오면 안 될텐데?”
“나도 알아요! 그런데도 점심시간에 택시까지 타고 온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넘버링부터 보여줘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그 뻔뻔함은 나도 좀 배우고싶다.”
택시를 타고 왔으니 넘버링을 보여줘야한다, 라는 자기본위의 논리를 구사하는 방문객은 싸구려 츄리닝 같은 유니폼에 검푸른색 투박한 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핏 보면 대부분 경비원이나 청소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무늬없는 야구모자 뒤로 길게 빠진 탐스러운 포니테일과 매끄러운 피부, 특히 유난히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동자와 장난기가 가득한 입가가 의상과 괴리감을 일으켜 코스프레라도 하는 듯 어색했다.
“없다. 안 된다.”
정말로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거절하는 나의 말을 좀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녀석은 입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 녀석은 내가 졸업한 A대학 실장교육학과 후배이다.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지나치게 밝다고 해야할지 모를 그런 성격이지만 나에게도 살갑게 대해주는 터라 A대학교에서 맺은 인연 중 여전히 교류를 유지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사람을 몇 마디의 말로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가혹하고 성급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해야한다면 나는 이 녀석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뼛속까지 실장석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
“넘버링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면서요! 불러놓고 이러기에요?”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것 마냥 몰아세우는 말에 나도 약간 얼이 빠져 항변했다.
“...난 연락해달라고했지 부른 적은 없는데. 그리고 실장석 관련이라고 했지 넘버링 관련 일이라고도 한 적 없다.”
“아, 몰라요! 아무튼 보여줘요! 택시비도 비싼데! 저 월급 박봉인거 알잖아요? ”
택시비가 비싼 것도 사실, 박봉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놀라울정도로 뻔뻔한 소리이기도 하다.
나는 녀석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거 팔면 중고차 한 대...아니 두 대 값 정도는 나오겠다?”
은근슬쩍 손목을 뒤로 감추며 딴청을 부리는 모습에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거요오? 짭인데요오? 애초에 선배는 시계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안대요?”
“난 시계를 끼지는 않지만 그런 시계 끼는 고객들은 많이 상대한다. 그리고 그건 가품이 아니라 진품이고 가격이 아마…….”
“아이고 네네, 저는 돈이 많습죠. 네. 제가 죽일 놈입니다. 됐나요? 이만하고 좀 보여주세요, 네?”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는 이 녀석은 성격도 성격이지만은 학창시절부터 운, 특히 금전운이 좋기로 유명했다.
여흥삼아 하는 고스톱이나 포커판을 휩쓸고 내기를 하면 무조건 이기며, 주식을 사면 상한가를 치고 땅을 사면 재개발이 된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 주제에 싸구려 츄리닝과 작업복을 입고 박봉을 받으면서 일하는 이유는 이 녀석이 ‘실장석 생태공원 관리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원관리자면 식사도 근처에서 해결하는게 원칙일텐데? 이러라고 협회에서 월급 주던가?”
“넘버링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않나요?”
하여간 쾌락주의자들이란.
실장교육학과를 졸업한다고 모두 브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장석 관련 산업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그 밖에도 취직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실장석 생태공원 관리인’도 그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브리더 협회 산하의 ‘실장석 생태공원’의 환경을 관리, 감독하는 일이다.
‘실장석 생태 공원’은 공식적으로 두루마리 공원과 같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휴식을 위해 실장석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조성을 위해 브리더 협회에서 설치한 공원이다.(애호파들과 학대파들을 보면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브리더 협회 회원들이 야생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실장석들의 생태와 행동, 집단적 행동을 연구하기위한 것으로, 회원들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진다.
가령 브리더 협회에서 ‘식량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실장석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교류하는가?’에 대한 실험결과를 필요로할 경우 내 후배와 같은 공원 관리자가 인위적으로 공원의 식수량과 식량을 극도로 제한하여 공원을 기아상태로 몰아넣고 공원 곳곳에 설치된 CCTV로 데이터를 수집하여 실험 보고서를 협회에 보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브리더협회 전용 네트워크에 게시되어 여러 연구에 인용되거나 실장교육학과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쓰인다.
초기에 이러한 공원은 소규모로 운영되었지만, 실장석 업계가 성장함에따라 실장석 연구에대한 필요성이 증가해 브리더 협회에서 아예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공원의 설치 비용을 일부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국 곳곳에 ‘실장석 생태 공원’ 이라는 이름의 공원을 설치했다.
나는 들으라는 듯이 ‘이런 놈한테 월급주려고 브리더 협회에 회비내는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 제발요! 이번엔 콘페이토 안줄게요! 마음대로 새끼 낳아도 된다고 안할게요! 사실 선배는 엄청 약하니까 노예로 삼을 수 있다고도 안할게요! 그러니까 보여만 주시면 안될까요, 제발?”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내 뒤로 후배의 재촉이 들리고 나는 그 내용에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26번이었던가. 느닷없이 분충이 되어버려 왜 그랬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녀석 짓이다.
“역시 그거 너였나?”
“네! 그럼 누구겠어요? 파하하하!”
캔을 두 개 꺼내어 발로 냉장고문을 닫으며 그렇게 묻자 녀석은 시원스레 인정하며 제풀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는 것을 내가 아무말 없이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에 비치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마감 다 맞추고 하자도 없었잖아요?”
“그래, 맞추긴 맞췄다. 덕분에 1주일동안 10시간밖에 못잤지만.”
“에이, 솔직히 저 없었으면 그거 그냥 그대로 출하했고 그랬으면 손해 엄청 봤다. 인정?”
그렇다. 유달리 교육에 잘 따라서 머리가 좋은 실장석이라고 생각했지만, 분충이 된 후 자세히 관찰해보니 유약하고 귀가 얇은 문제가 있는 실장석이었다. 그래서 후배놈의 꼬드김에 쉽사리 넘어간 것이리라.
만약 그걸 교정하지않고 그대로 출하했으면 몇 년 후 분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도움이 된 건 인정하지만 넌 그냥 그 실장석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지?.”
내 지적에 후배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제 순수한 호의와 일류 브리더인 선배의 교육방식을 배우고 싶어하는 후배의 존경스러운 마음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기에요?”
“아닌가?”
“왜 아니겠어요? 파하하하하! 그때 선배가 교육하는거 보니까 실교과 2인자 안 죽었던데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깊숙이 파묻고 새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는 후배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너희 지부장한테 공원관리자가 몰래 공원 들실장들 빼돌린다고 제보하겠다..”
“으, 그건 진짜 싫을 것 같은데요?”
“그럼 넘버링 좀 그만 찾아라. 온김에 내 애기도 좀 듣고.”
‘확 지부를 사버릴까보다.’ 라고 투덜거리는 후배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가죽지갑에는 실장석이 아첨하고 있는 모습이 팬시하게 표현된 아크릴 악세사리가 붙어있었다.
직업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이 녀석이 공원 관리인이 된 이유는 실장석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애정의 수단은 콘페이토와 푸드같은 달짝지근한 것이 아니라 주로 반짝이는 금속재질이다.
공원 관리인의 일에는 공원의 환경을 어느정도 유지시키기위해 분충비율을 줄이는 것도 포함된다.
걸러낸 분충은 죽이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녀석은 그 분충들을 검은 봉투에 넣어 자기 ‘작업실’로 데려가고, 분충들은 그곳에서 인간이 말하는 애정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음을 알게된다.
죽이든 말든 공원에 없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위에서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귀에 들어가면 문책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주기적으로 감사가 내려올지도 모르고 그렇게되면 작업실과 검은 봉투는 수확물을 얻기 영 힘들어질 것이다.
애초에 직업이 필요하지도 않은 이 녀석이 공원 관리인을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 취미생활 때문이니 그건 정말로 싫은 일이 될 것이다..
“넘버링을 사고싶어하는 이유라도 좀 말해봐라.”
“세레브 실장석의 위석을 긁으면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해서요! 선배는 안 그런가요?”
“그것 봐라. 이러니 내가 팔고 싶겠나.”
나는 맞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캔커피를 던졌지만 기대와달리 요령좋게 잡아채자 작게 ‘쯧’하고 혀를 찼다.
녀석은 ‘안 맞았지롱’하며 킥킥대다가 손에 든 음료수를 확인하더니 질렸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와, 선배. 아직도 이 싸구려 캔커피 마셔요? 월마다 xxx 만원씩 버는 사람이?”
“싫으면 내놔라.”
“윽, 싸구려틱해. 맨날 이런 거나 마시니까 여자친구 안 생기는게 아닐까요?”
“닥쳐.”
달리 반박할 말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후배는 순식간에 캔커피를 원샷하고는 약간은 진지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선배가 실장석 관련 이야기로 할 말이 있다길래 드디어 급전이 필요해서 나한테 넘버링을 팔려나부다~ 했는데 무슨 일이에요?”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되나, 라고 생각하며 난 서두를 꺼냈다.
“일단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41번은 여기에 없다.”
하지만 이게 이 녀석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김사장 딸 인스타에서 40번 사진 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아직도 일에 안 들어갔다구요? 선배 무슨 일 있어요?.”
후배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41번은 지금 공원에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키우더니 이윽고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세레브 실장석 후보가 공원에 버려지다니 이건 대체 무슨 재미있는 일일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겠지.
하여간 쾌락주의자들이란.
“공원이라구요?”
“그렇다.”
나는 말하기 싫어서 못내 말하지 않은, 하지만 해야하는 말을 꺼냈다.
“네가 관리하고 있는 그 두루마리 공원이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폭소를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건만 어째 눈가를 찌뿌리고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이거 혹시 이미…….
“어, 잠깐. 혹시 자실장인데 과하게 예의바르고 이상할정도로 말 잘하고 똑똑한 애 맞아요?”
“...맞는 것 같다.”
“아악!! 역시 그냥 잡아갈걸 그랬어!!”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공원에서 푸드라도 뿌리다가 41번을 발견하고 특이한 언행 때문에 흥미가 생겨서 잡아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동의없는 납치는 금지라는 공원의 불문율 때문에 포기한 것이겠지.
“지금 내가 넘버링을 거저 얻을 기회를 놓친거에요? 아니, 위치는 파악해뒀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안 그래도 그 녀석 때문에 부른거니까 좀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 애초에 41번은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원하는 넘버링이 아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태세인 녀석을 간신히 붙잡았지만 내심 좀처럼 본론이 나오질 않는 대화에 갑갑했다.
“지금부터 딱 5분만 입 다물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주면 좋겠다. 부탁이다.”
“...재미없으면 나갈거에요.”
넘버링을 놓쳤다는 아쉬움 떄문에 약간 삐진 모양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난 실장석이 들어있는 택배를 받았다…….”
내가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까지 나가지 않을 것으로 봐서는 재미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솔직히 나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눈동자와 표정을 관찰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퍽 즐거웠다.
“...그래서 공원에 두고 왔다.”
“선배.”
녀석이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과 얼굴이 되자 나 역시 내심 약간 놀랐지만 언제나 평온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은 내 몇 안되는 특기이다.
“어쩜 이렇게 재미있을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없게 하는거죠?”
“.......”
화를 내도 되지 않을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음, 선배의 말대로 41번은 세레브 실장석도 아니고 위석을 긁어봤자 소리를 내지도 않을 것 같네요. 어, 혹시 낼지도 모를려나요? 그거 엄청 궁금한데요? 진지하게 저한테 넘길 생각 없어요?”
예상은 했지만 나는 저 끝모르는 소유욕에 질릴 지경이었다.
“너한테 넘기는게 41번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애초에, 이미 세레브 실장석 사놓고 굳이 다른 실장석들을 탐내는 이유가 뭐냐. 3대 세공사의 탄생석 시리즈, 11월의 토파즈 맞나?”
그러자 녀석은 약간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빠른 어투로 여러 문장들을 순식간에 늘어놓았다.
“아, 개요? 제가 그거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아니, 실장석 사는데 학대를 하면 손해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살 수 있다는게 말이되요?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로 좀 색다르게 재미를 느껴볼까, 하고 진짜로 애호해보려고 한 번 사봤는데 애가 너무 착해서 영 재미가 없지뭐에요? 그래서 친구 줘버렸는데 그건 진짜 재밌었어서 선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걸요?”
정말 빠른 어투여서 나는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세공사라면 선대에 비해서 지금은 명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그래도 세레브 실장석 시대의 개척자라는 무시무시한 네임벨류의 브리더인데 그걸 기껏 사놓고 친구한테 줘버렸다니 참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사치의 결말이 뭐가 재밌고 왜 저런 아련한 표정을 짓는건지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떤 실장석을 괴롭히거나 괴롭게하는 이야기일테니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41번에 관해서 부탁하고 싶은게 있다.”
“선배가요? 저한테요? 와, 그건 좀 놀라운데요?”
여기에 말리면 또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다.
나는 과장되게 좌우를 둘러보며 놀라는 척하는 녀석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 녀석을 지켜봐라. 그리고 그 녀석에 관련된 영상을 백업시켜놓으면 좋겠다.”
내 부탁에 녀석은 약간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장석 생태공원의 곳곳에는 실험관찰을 위해서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있고 관리자에게는 이걸 열람할 권리가 있지만, 이걸 별도로 저장하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영상유출하다 걸리면 나 짤리는거 몰라요? 짤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최소 손해배상청구, 재수없으면 경찰서행이라구요?”
“그렇게 규칙을 좋아하면서 폐기해야하는 실장석을 잡아가나?”
“에이, 그건 감수할만한 재미라도 있는데다가 사실 걸려도 그냥 한 소리 듣고 만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무리 선후배라지만 일방적으로 위험을 부담하게 하는 것은 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위험을 좀 부담하기로 했다.
“옛다.”
나는 속주머니에 넣어둔 500ml짜리 플라스틱 약품통을 꺼내 후배를 향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녀석은 약품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흔들어보고 뭔지 대략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이게 뭐에요? 혹시...내가 생각하는 그거에요?”
“그래.”
누가 볼새라 후배는 약품을 집어 냉큼 작업복 주머니에 감추고 양 주먹을 움켜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 엘릭시르!! 드디어!! 내가 이거 갖고싶어하는거 어떻게 알았어요?”
엘릭시르.
브리더 협회에서만 제조하여 판매하는 초고농축 활성제, 누군가에게는 돈주고도 못 구하는 꿈의 물질이다.
성능은 과장을 좀 보태서 죽은 실장석도 살릴 정도로, 시중에 있는 활성제와는 당연 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실장석을 죽이고 싶지만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브리더 협회에 등록된 브리더만 구매할 수 있으며 일반인들에게 유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만약 이것을 유출한 것이 적발되면 나는 브리더협회에서 제적당하고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가게문을 닫고 내일부터 벼룩시장 구인구직란을 뒤적여야할 것이다.
“나한테 그거 좀 구하자고 접근해온 놈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말이다.”
“음, 사실 저도 선배한테는 아니지만 접근은 많이 해봤죠. 전부 거절당했지만.”
얼마를 제시했는지는 모르지만 원체 비싼 물건이라 어지간한 가격으로는 되팔기도 힘들어 정상적인 브리더라면 굳이 자기 커리어를 걸어서까지 팔 이유가 없다.
물론 나도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비정상적인 브리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평생 날 먹여살릴 생각이 아니라면 제발 얌전히, 안 들키게 써라. 부탁한 건 잊지 말고.”
녀석이 듣는 둥 마는 둥 작업복 안에 손을 넣어 약품통을 쓰다듬으며 연신 웃음을 짓는 모습은 얼핏 훈훈해보였지만 오늘 밤 저 녀석의 작업장에서는 비명들이 평소보다 좀 더 길게, 끊이지 않고 들릴 것이다.
“아, 영상 걱정은 하지 마세요, 헤헤. 내가 자동해석기능으로 자막까지 입혀서 보내드릴게요!”
드디어 용건이 깔끔하게 끝났건만 녀석은 끝내 불길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41번 관찰하는거,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마침...아니, 이건 말 안 하는게 나을려나요? 푸하하하!”
갑자기 말을 마는 것이 영 수상쩍었지만 더 캐묻기에는 이제 슬슬 용건도 끝났고, 이 녀석이 헛소리하는게 하루이틀도 아니기에 그만두었다.
시계를 보니 1시가 거진 다 되어 갔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이다.
“그런데 선배, 그래서 그 택배를 보낸 사람은 누구에요?”
일부러 그 부분과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말했건만 눈치챈 모양이다.
“점심시간 끝나가지 않냐?”
“괜찮아요. 가는 길에 도넛이랑 커피라도 사가서 돌리면 다들 제가 늦은지도 모를걸요.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41번을 보낸 사람이 누군데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
“어, 잠깐. 나 알 것 같애. 흠...아! 하린 선배 맞죠?”
나는 별수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선배 부탁이라서 이렇게까지 하는거에요? 이거 수상한데요?”
“이렇게까지?”
“그야 뜬금없이 실장석 보내서 행복하게해달라고하고, 그걸 해달라고 해주는게 일반적이지는 않잖아요?”
“...일반적이지는 않지 그래.”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래요? 하던 일 다 내팽겨치고 41번 돌보고 저한테 엘릭시르까지 쥐어주면서까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말하고 있는건 물론 나로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본 것이다.
나는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것인가.
애매하게나마 결론을 냈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이것 뿐이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음? 41번을 돌보는 쪽이요? 아니면 하린선배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요?”
“...그건 모르겠다.”
“그거 신기하네요. 양쪽 다 선배 인생관이랑은 거리가 있는 행동 아니에요?”
“하린이한테는 빚이 좀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41번 건은...나도 잘 모르겠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설마 실장석한테 애착이 생기신거에요? 교수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신거 기억하시죠? 애호파와 학대파는 브리더가 될 수 없다고 하신거?”
“그래. 그래서 내가 너한테 브리더 보다는 공원 관리인이 되라고했지.”
“역시 브리더는 저같은 애호파한테는 너무 가혹한 길이라고 생각하신거죠?”
“그 뻔뻔함은 나도 좀 배우고싶다. 진심으로.”
“에이, 장담하는데 저만큼 실장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걸요? 그건 선배도 아시잖아요? 애호파는 실장석을 좋아한다, 나는 실장석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는 애호파이다. 완벽한 삼단논법 아니에요?”
“니가 말한게 후건긍정 오류인건 둘째치고 그래서 너 좋다던 실장석이 한 마리라도 있던가?”
“음, 개들과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요?”
“네 작업실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1시 10분을 넘기고 있었다.
“너 진짜 안 가봐도 되냐?”
“으, 이제 진짜 가야겠네요. 물어볼게 아직 하나 남았는데. 뭐 언젠간 기회가 있겠죠?”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툭툭 옷을 털자 얼핏 안쪽 받쳐있는 티셔츠의 테두리가 녹색인게 보였다.
보나마나 저 티셔츠의 가운데 문양도 실장석일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도 실장석을 좋아하는지 일평생을 실장석과 살아온 나도 알 수 없었다.
“참, 근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뭐지?”
“말투좀 고치세요! 선배가 무슨 중대장이에요? 푸하하하!”
직업이 이렇다보니 하대(下待)할 때는 습관적으로 이상한 말투로 말하게 되버리는 것은 나도 그렇게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너야말로 남자인데 그 긴 포니테일은 좀 그렇지 않나?”
“괜찮아요, 전 잘생겼으니까. 아닌가요?”
부정할 수 없다는게 참으로 짜증났다.
“그러면 진짜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들어왔을 때처럼 재빠르게 실장학교의 문이 한 번 열리고 닫히자 미지근한 봄 공기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긴 이야기 때문에 갈증이 느껴져 나는 아까 꺼내두어 미지근해진 캔커피 뚜껑을 열어 길게 한모금을 마셨다.
쓰고 달짝지근한 갈색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소파에 파묻혀 녀석이 마지막에 말한 하나 남은 질문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선배랑 하린 선배는 무슨 관계이길래 이런 부탁을 한 건가요?
이것이겠지.
커피가 마침내 목구멍을 벗어나자 나는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지만, 푹신한 소파에서 벗어나기도 싫었다.
나는 애써 흡연욕을 참으며 뒤통수에 깍지를 진채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오래된 대화를 떠올렸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이유를 물어도 될까.’
‘어떤 표정을 해야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해야할 필요가 없거든. 답답한 가면을 벗어버린 기분이랄까?’
‘그건 내가 우리 과에 친구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눈치 볼만큼 대단치 않아서?’
‘그런 이유만은 아닌걸! 그 이유도 맞지만, 풉. 왜 너는 항상 그런 표정이야? 웃고 다니면 좋을텐데.’
‘굳이 웃을 이유가 없다. 별로 즐겁지도, 웃고 싶지도 않은 걸 어쩌겠나? 나는 오히려 항상 웃고 다니는 네가 더 신기하다.’
‘웃고 다니면 나도 기분이 좋고, 주변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져.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합리적인 이유군.’
‘그럼 앞으로는 너도 웃고다닐거야?’
‘내가 웃고다녀봐야 주위 사람들이 기분나빠하겠지.’
‘그건 그렇네~.’
‘긍정하냐.’
‘하지만 웃고 다니면 굉장히 편해! 주위에서 멋대로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얻을 수 있는게 많거든. 귀찮을 때도 많지만.’
‘그 말, 다른 사람들한테 해도 괜찮은거냐?.’
‘응? 괜찮아! 어차피 다른 애들이 니 말을 믿을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군.’
나는 문득 눈을 뜨고 갑자기 말하지 못한 뒤늦은 아쉬움을 생각했다.
“말하는걸 죄다 물음표로 끝내는 네 화법이 더 이상하지 않냐.” 라고 한 마디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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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래 예정은 분명 41번을 2018년 안에 완결 짓는 것이었는데, 진도가...나가지를 않네요.
그래서 어떻게든 극복해보고자 짧게 단편을 이렇게 썼는데, 이걸 쓰니까 그래도 앞으로 좀 나아갈 것 같습니다.
2. 혹시라도 2018년에 완결 짓겠다는 약속만 믿고 기다리신 분이 계신다면....죄송하다는 말 밖에 드릴게 없습니다. 3월 안에 최소한 한 편정도는 올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3. 비평, 악평, 호평, 지적, 뭐든지 환영입니다. 드릴 수 있는 것은 대댓글 밖에 없지만, 한마디라도 평가를 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오히려 지적해주시는 쪽이 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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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생기고 금전운까지 좋다니 용서가 안되는데스. 악평을 주는데스!
그런데 누가 지켜봐 준다는거는 잠시 비는 그 사이에 사고가 일어나는 전개...?
인싸는 반으로 갈라져서 죽는데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랬다가는 브리더상이 굶어죽어버리는뎃샤!
띵작이다!!
에히힣ㅎㅎ 아이 참 뭘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애호파(자칭)
ㅎㅎㅎ
안기다리겠다고 말하고 기다린 흑우 없제? ㅠㅠ
죄송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넘버링 자실장 하나 키우고 싶은 데스..
인정 또 인정하는 부분인데스
세공사가 소재였던 글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한거에요
소재는 아니지만 여자가 쓰는글에서 잠깐 언급되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후배라는 녀석이 쾌락 실장파라 길래 애오파인 줄 알았는데...그나저나 주인공 주변은 다 능력인 밖에 없군요. 41번은 과연 어떻게 될 지도 궁금해집니다.
기다려주시는분이 많아서 기쁘기도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ㅠㅠ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존나 재밌다 캐릭터들이 개성적임
지랄맞죠 하핳ㅎㅎ
착한 양충은 얌전히 기다리는데수우웅
1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한데스우우우!!
칸쵸네 토파즈가 여기서 복선 회수되네 소오오름
후배놈 저거 순 나쁜놈입디다
테에엥 마마 돌아오는데스웅
마마가 돌아온데스우! 1년이 넘어서야 돌아온데스우! ㅠㅠ
마마... 그동안 써놓으신 보존식을 먹으며 기다리고 있는 테치...
너무 보고싶은테치... 금방 볼 수 있겠죠테츄...?
반년이 넘어서야 돌아와서 미안한데스우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