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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66)
[미끼(2)]
새롭게 창설되는 문파의 개파대전은 보통 축제 분위기가 만연하다. 사령계의 과거 명칭이 마교라 하였지만 그들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행사장이 마련된 대연무장 가장자리는 개파대전에 참석한 중인들로 왁자지껄했다. 앞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다가올 전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과는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들도 있었다. 각 문파의 수뇌들로 자리가 채워진 오른편 건물 안이 그랬다. 사열식을 목적으로 만든 듯 건물은 사방이 트여 있었다. 정자 형태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있는 오십여 명의 무인들은 대연무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었다.
만이천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수가 이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인원수로만 따지자면 무림 최고의 단체는 사령계였다.
“굉장하군.”
놀란 눈으로 대연무장을 쳐다보던 위지천악은 신음을 내뱉었다. 대연무장을 빽빽하게 채운 만이천의 무인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기가 이곳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이미 무림은 정사 구분이 없어진 지 오래고, 과거 행적이 마교였다 하여 그들은 사악한 단체라 몰아칠 사람도 없다. 서령 사령계를 사악한 단체라 규정짓는다 해도 누가 저들을 칠 것인가. 오히려 공격받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대연무장 주변에서 개파대전을 즐기고 있는 무인들도 그러한 사정을 알기에 참석했을 것이다. 무림공적이란 말도 무색해진 강호 무림이 아닌가.
“응?”
위지천악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무인들의 진영이 물살이 갈리듯 양편으로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 이천 무인들 숲을 뚫고 나오는 이들은 백산을 비롯한 광풍성 무인들이었다.
“미친놈, 그런다고 광풍성을 대단하게 봐 줄 줄 알았더냐?”
위지천악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온다고 해서 광풍성이 강하게 보이는 건 결코 아닐 터이다. 오히려 약함을 감추기 위한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껏 웃어라. 그 웃음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겠다.’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는 백산을 향해 위지천악은 진득한 살기를 쏘아 보냈다.
“좀 늦었구먼.”
위지천악이 쏘아 보낸 살기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산의 얼굴은 태연했다. 며칠 전, 영빈각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잊은 듯, 친숙한 얼굴로 무인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안쪽은 상당히 넓었다. 오십 명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
주위를 둘러보던 백산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자네들도 왔구먼.”
백산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창운권(蒼雲拳) 전량(全梁)과 낙화검(洛花劍) 감군(甘窘), 그리고 뇌력창(雷力槍) 벽사(壁思.) 그들은 과거 지저사령계에서 만났던 십정 중 세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방장.”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더 이상 그는 지저사령계에서 만났던 귀광두가 아니었다. 그는 소림사의 방장이자 광풍성의 성주인 것이다.
“참! 자네들, 광풍성에 들어올 마음 없나?”
“네?”
일순 세 사람은 놀란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령계 개파대전에 와서 광풍성으로 들어오라니. 예의도 아닐 뿐더러, 그런 말을 할 정소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백산은 한 술 더 떴다.
“뭘 어렵게 생각하고 그러나. 어차피 전쟁이 터지면 어디론가 들어가야 할 테고. 쓰레기들보다는 광풍성이 백 배 낫지.”
통천연맹과 무극계 무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백산은 말했다.
“건방진 놈!”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편에 있던 순우창천이 벌떡 일어났다. 순간 주변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위지천악의 앞에 있던 술잔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 네가 쓰레기였어?”
의외라는 듯 백산은 눈을 치떴다. 쓰레기란 말에 왜 네가 흥분하느냐 그런 얼굴로.
“이익!”
순우창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녀석의 말이 맞다. 놈은 쓰레기란 말을 하면서 무극계나 통천연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쓰레기보다 낫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공연한 도발에 위지천악과 함께 넘어간 것이다.
“자식, 흥분하면 몸에 해로우니까 편히 앉아라. 음식도 좀 먹고.”
제가 주인인 양 음식을 가리키며 백산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 밖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보면 자네가 주인인 줄 알겠구먼.”
“어이쿠! 이제야 나타나시는구먼, 난 아예 안 나올 줄 알았네.”
십문 문주들과 함께 나타난 뇌우를 보며 백산은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백산의 내심은 착잡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강해진 듯 보였다. 자신이 강해진 만큼 그도 강해져 있다. 무극계나 통천연맹보다 더 경계해야 할 세력이 바로 사령계였다.
“강해졌군!”
뇌우 또한 백산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과거 천붕회에서 보았을 때도 강자였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천하제일인이란 소문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그는 천하제일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내가 아는 거라면 대답해주지.”
“이 정도로 성대하게 치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
주변을 휘 둘러보며 백산은 물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준비를 했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수백 명 무인들이 앉아 있는 바닥재만 해도 꽤 고급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탁자는 대부분 대리석이었다.
“왜! 자네도 개파대전을 하고 싶어서 그런가?”
“새집을 지었으니까 집들이는 당연한 것 아닌가. 다음 달에 할 예정인데 자네도 올 텐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산은 말했다.
“그런가.......? 그때까지 광풍성이 남아 있으면 가야겠지. 초대만 해 주면 말이네.”
“설마 한 달인데 없어지기야 하려고. 대가리에 뇌가 없으면 모를까 천붕십일천마가 버티고 있는 광풍성을 무슨 수로 공격하겠는가.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위지천악과 순우창천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킥!’
주하연은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백산이 머리 나쁘다는 말은 순 거짓이었다. 아니 일상적인 일에는 머리를 쓰지 않을 뿐, 싸움에 관한 일이라면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사천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령계에 도착해서까지,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다. 더구나 개파대전을 하겠다는 말로 연막마저 치고 있으니.
천붕십일천마가 출병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으리라. 전쟁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백산이 최고였다.
“지그 자네 말은 저들을 하나로 묶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가?”
“설마, 대통천연맹과 대무극계인데. 우리가 무서워서 그렇게 하려고.”
“흥! 걱정 마라, 귀광두. 우리 통천연맹은 정당하게 강호를 접수할 테니까.”
“우리 무극계도 마찬가지다, 귀광두. 하지만 합작은 아니더라도, 광풍성을 먼저 없앨 수도 있다.”
“어이쿠 무서워라! 그래도 집들이 할 때는 올 거지?”
백산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 앉지 그런가. 여긴 지붕이 제법 단단하게 지어졌다네.”
“알겠네. 참! 내 부인들을 소개하지 않았구먼.”
자리를 살피던 백산은 설련과 주하연의 팔을 끌어당기며 소개를 시켰다.
“여간 과거 북황련에 속해 있던 설가보의 무남독녀 설련이네. 정혼자란 놈이 보물에 눈이 어두워 처갓집을 멸문시켜 버렸지. 그리고 여긴 봉선군주 주하연. 얼마 전까지는 무림공적이자 반역자였다네. 그리고 이놈은 자네도 잘 알 거야. 이 녀석은 북황련 북천지옥대 소속으로 있던 광치고, 이 친구는 자네도 잘 아는 과거 상문 문주 구양중........”
뇌우를 비롯한 주변 무인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쳐갔다. 백산 주변 인물 대부분이 통천연맹과 사령계와 악연을 맺고 있는 탓이었다.
“몰랐군.”
뇌우는 놀란 얼굴로 구양중을 쳐다보았다.
“나도 몰랐소, 암문이 마교를 장악할 줄은.”
구양중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올 때 과거 부하들을 보았으나 모른 척 지나쳐 왔다.
“내가 좀 빨리 나왔더라면 자네를 잃지 않았을 텐데...... 돌아올 생각은 없는가? 돌아온다면 본래 자리를 주겠네.”
“그 말은 육 년 전에 했었어야 했소이다.”
“그런가? 그럼 우린 적으로 만나겠군. 즐기도록 하게.”
고개를 끄덕인 뇌우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른 무인들을 쳐다보며 뇌우는 포권을 취했다.
[오빠! 저 사람.......]
뇌우를 가만히 쳐다보던 주하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백산에게 전음을 보냈다.
[위지천악과 순우창천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아서?]
[생긴 것과는 달리 음흉하다고.]
주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을 향해 단순히 고개를 숙였을 뿐이지만 방금 뇌우는 행동으로 많은 말을 했다. 백산과는 상당한 대화를 나누면서 위지천악이나 순우창천은 일반 무인들처럼 취급해 버렸다.
은연중에 모욕감을 심어 준 것이다.
벌겋게 달아 있는 위지천악과 순우창천의 얼굴만 보아도 뇌우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은 탁자 아래로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있었다. 차라리 오지 않을 걸 괜히 왔다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주하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위지천악은 지독한 모욕감으로 치를 떨었다. 뇌우에 대해서는 제갈승후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무시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귀광부보다 아래층으로 방을 배정해 준 것까지는 참아 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아 낼 수가 없었다. 통천연맹의 맹주로서 가능하면 개파대전이 끝날 때까지 참아 내려했다. 개인의 명예보다는 통천연맹 때문에.
“난...... 그만 가겠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위지천악은 뇌우를 향해 소리쳤다. 공연히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맹에 남아 있었더라면 사령계를 둘러본다는 생각으로 왔던 게 잘못이었다.
이 모든 게 귀광두 때문이란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놈과 같은 자리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바쁜 일 있습니까?”
“쿡! 이 위지천악이 완전하게 당했군.”
태연한 얼굴로 묻는 뇌우를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두 젊은 놈에게 철저하게 당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오늘 모욕...... 반드시 기억하지. 돌아간다!”
뇌우와 백산을 번갈아 쳐다보던 위지천악은 차갑게 말하며 몸을 날렸다.
[오빠, 너무 자극한 것 아니에요?]
위지천악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주하연은 백산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뇌우까지 나서서 위지천악을 자극하자 내심 걱정스러웠다.
[괜찮아. 사령계도 같이 물고 들어갔잖아.]
백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많은 적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면 소살우를 비롯한 녀석들은 운신의 폭이 커질 것이다.
더구나 통천연맹은 사령계 무인들이 나타나면 결코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전력이 분산되면 그만큼 깨트리기 쉽다는 말이 된다.
“강호 무림을 주름잡는 통천연맹의 맹주라는 사람이 소심하구먼. 신경 쓰지 마시고, 술과 음식을 즐겨 주십시오.”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가는 위지천악을 주시하며 뇌우는 혀를 찼다. 그런 뇌우를 빤히 쳐다보던 백산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자넨 내가 집들이하는 게 싫은가 보군.”
“무슨 말인가?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간 사람을 두고.”
“그런가? 여하튼 집들이를 제대로 하려면 신경깨나 써야겠어.”
“그건 당연한 거네. 남에게 집을 보여 주는 일인데. 그럼 즐기게.”
고개를 끄덕인 뇌우는 몸을 돌려 단상으로 향했다.
“하연아, 이게 순서가 맞는 거야?”
십 일이 흐른 후에 잡힌 공식 행사 일정을 두고 묻는 말이었다.
“마교라는 이름이 부담스러워 그랬을 거예요. 과거에 나빴던 인식을 불식시킨 다음에 무인들을 끌어들이려는 거지요.”
“그럼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맞네. 참! 아까 하다만 얘기 계속해야지. 너희들 광풍성에 들어올 거야, 말 거야.”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느닷없이 전량 일행에게 시선을 던졌다.
“네? 글쎄 그게......”
전량은 말끝을 흐렸다. 전쟁 참여는 자신이 결정할 사안도 아니거니와, 가타부타 말할 처지도 아니다. 다만 사문의 명령으로 중원 상황을 파악하기위해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했을 뿐이다.
“전쟁에 참여하겠다면, 중원의 산 하나는 줄게. 물론 먹고 살 방편도 마련해 주고, 천산에 가서 문주와 상의해 봐. 그리고 감군,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천산파처럼 도망칠 수도 없잖아.”
“상의를 해 봐야 합니다. 장로 신분인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감군 역시 전량과 다르지 않았다. 형산에 있는 형산파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령계를 비롯한 무림 분위기만 본산에 전해주면 그걸로 자신의 임무는 끝난다. 결정은 그때 나올 것이다.
“그럼 넌?”
이번에 백산의 시선을 받은 뇌령창 벽사였다.
“강호를 정복할 자신이 있는 겁니까?”
“자식 별걱정을 다한다. 내가 누구냐?”
“.......?”
느닷없는 물음에 벽사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소림방장, 귀광두 그리고 광혈지옥비의 주인.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묵안혈마 백산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머리는 거부하기 바쁘다.
“난 말이다, 무림공적이야. 여기 있는 네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없애야 할 공동의 적 말이다.”
“으음!”
공적이란 말에 벽사는 신음을 흘렸다. 그랬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이곳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천붕회를 비롯한 강호 전체가 공적으로 선포했던 사람 아닌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얼굴을 들고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그를 무림공적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그를 피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강하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을 두고 보는 이유는........”
말을 끊으며 벽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있던 백산은 다른 무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다 죽여 버리면, 심부름 할 녀석들이 없어서 그런 거야!”
“헉!”
느닷없이 밀려든 살기에 벽사는 앉은 채 물러나고 말았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 준 목소리 때문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벽사뿐만이 아니었다. 관심 어린 얼굴로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도 해쓱하게 변했다.
그런 그들의 귓전으로 재차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다. 내가 이기지 못하면 강호 무림은 멸망한다는 사실 말이다. 백 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강호 무림을 밟아 줄 거다. 자근자근 밟아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연무장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실내에 몰아쳤다. 강호 무림을 굴복시킬 때까지 죽이겠다는 말이다. 그러다 무림이 무림이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미 경험이 있는 자들이 바로 천붕십일천마가 아닌가.
[흥! 꿈도 크구나, 놈!]
그 참에 백산의 귓전으로 싸늘한 전음이 들려왔다. 행사장에 있던 검운비였다.
[남의 말을 엿듣는 건 문주로서 바른 행동이 아냐, 그러니까 뇌우에게 자리를 빼앗긴 거라고.]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검운비를 향해 백산은 미소와 함께 전음을 보냈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지껄여라.]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전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쿡!”
백산은 낮게 웃음을 토해 냈다. 완전하게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왔다. 검운비의 전음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곳이 사령계나, 공식 석상이 아니었다면 녀석은 부하들을 시켜 곧바로 공격을 가해 왔을 것이다.
‘저놈은 그냥 둬도 될 것 같고.’
굳이 순우창천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순우창천과 담대만우는 끊임없이 살기를 쏘아 보내고 있다. 사령계를 나서는 순간 놈의 표적이 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런, 음식이 다 식었네. 이봐!”
젓가락을 집어 들던 백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성주님.”
“이 음식들을 치우고 따뜻한 걸로 내와라!”
“알겠습니다, 성주님.”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하냐? 명색이 잔칫집인데, 좀 왁자지껄해야 하는 거 아냐?”
강호 무림을 없애버리겠다는, 자신의 말 때문이란 사실을 잊은 듯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행사 중인데 시끄럽게 구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오히려 전 좋습니다.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라서 말입니다.”
시비에게 건네받은 음식을 탁자 위로 놓으며 광자가 말했다.
“너희들도 그만 나와.”
“알겠습니다!”
“헉!”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잠영오살의 모습에 중인들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의외의 장소에서 사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줄곧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고 하지만,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천장에 숨어 있던 자들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과는 달리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위인 순우창천과 담대만우의 얼굴은 태연했다. 천장에 숨어 있던 잠영오살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리라. 하지만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한 사람, 살황이란 별호로 불렸던 유몽만큼은 그들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산과 유몽 그리고 잠영오살의 합작이었다. 만일에 대한 대비였다.
“먹자!”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삼켰다. 사령계 개패다전에 참석한 자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거리낌이 없었다.
[하연아, 살우는?]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며 백산은 주하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사히 도착했대요.]
주하연은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사람은 허공에 홀로 남아 있는 유몽이다. 사령계에 들어와 있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 바빴다. 대와선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다.
사령계 개파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대와선전은 시작될 것이다.
[다행이구나.]
백산은 대연무장에 모인 사령계 무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전부가 적으로 만날 자들이다. 저들을 없애고, 사령계 수뇌들을 없애고, 궁극적으로 뇌우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광풍성이 강호 무림의 패자가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해낼 거예요.]
주하연은 백산의 손을 꼭 쥐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하여 이봉산(二峯山)이라 불리는 이곳은 산서성 남쪽에 있는 산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이봉산이 세인들에게 알려진 이유는 지난 오십 년 동안 이곳에 똬리를 틀었던 북황련 때문이었다.
양분(襄汾).
분하(汾河)주변의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은 북황련 성장과 더불어 발전한 대표적인 도시다. 남쪽에서 배로 운송해 온 생필품들이 하역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고, 그 덕분에 양분은 산서성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무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객잔과 주루가 곳곳에 세워져,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다. 밤이 없는 도시. 양분을 다르게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 대부분의 북황련 무인들이 떠난 양분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아직은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어, 객잔이나 주루는 밤이면 여전히 불을 켜 놓고 있지만, 객잔 주인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그랬던 양분에 타지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십여 일 전부터였다. 무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으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난 세월 동안 수시로 봐 왔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봉루(峯樓) 주인인 이금산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금일 십여 명의 무인들이 투숙을 했고, 근 보름 만에 맞는 단체 손님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일반 무인들과 달리 그들이 먹는 음식은 가격대가 낮은 소채 종류가 다였기 때문이었다. 열 명이 먹은 식사 대금이 북황련 무인 두 명이 먹던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다.
“섬서성으로 이사를 가야 하려나.......”
그 언젯적 손님들로 왁자지껄했던 객잔을 떠올리며 이금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잖아 객잔을 접어야 할 터이다. 조금 전 손님이 들었던 후원을 쳐다보며 이금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금산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 준 사람들은 소살우와 무당파 일행이었다.
“현진아, 들어온 소식 있으면 말해....... 아이고 죽겠네. 옛날에는 하루 종일 해도 끄떡없었는데.”
마보를 취하던 소살우는 자세를 풀어 제 무릎을 두드리며 투덜댔다.
“마보가 그렇게 힘드십니까?”
품 안에서 조그마한 첩지를 꺼내들며 현진자는 물었다. 광마도 소살우,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광풍성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시로 봐 왔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생경스럽다. 전쟁을 치르러 가는 사람인지, 놀러 가는 사람인지 때로는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그들의 성정 때문이란 사실을 얼마 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산을 비롯한 천붕십일천마는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오늘이 모여 미래가 되고 있다.
그들이 편안하게 보였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보가 힘든 게 아니고, 사람이 되는 게 힘든 거다. 그나저나 북황련 놈들은 몇 명이래.”
싱긋 웃으며 소살우는 말했다.
“그랬군요.”
현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거창하게 도(道)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도는 산속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이었다. 천붕십일천마가 끝없이 강해진 이유가 그 때문이리라.
“통천연맹 산서지부라 이름을 바꾼 이곳엔 천여 명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부장은 화풍권(火風拳) 굴소(屈小)로 철혈패씨세가와 산동악가, 그리고 만상모씨세가 잔여 병력을 맡고 있는 잡니다. 그리고 광마각도 사천에 도착하여 준비를 마쳤답니다.”
“다행이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대?”
“태행산에 있던 녹림수로채 무인들과 함께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레면 도착한답니다.”
“그건 됐고. 참! 대천강검진은 보완 좀 했어?”
문득 생각난 듯 소살우는 물었다.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현진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천강검진(大天?劒陣). 무당 무공의 최정화라 할 수 있는 검진이고, 진이 만들어진 이래 유일하게 한 번 패했다. 그 패배를 안겨 준 이들이 바로 천붕십일천마를 탄생시켰던 광풍대원이었다.
그 한 번의 패배로 인하여 무당파는 지난 오십 년 간 대천강검진을 더욱 보완하였고, 한곳에 고정된 진이 아닌 움직이는 진으로 만들었다.
“대천강검진만으로도 통천연맹 산서지부는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당의 자존심이었다. 단일 문파 최강이라는 자부심.
“그래? 그동안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구나. 작전을 세우기가 훨씬 편하게 되었어.”
“작전도 생각해 두셨습니까?”
현진자는 놀란 얼굴로 소살우를 보며 물었다. 매일 매일 몸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너, 죽고 싶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서 해 본 소립니다.”
손을 휘휘 저으며 현진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쿡!”
무검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식이란 말을 듣고도 웃고 있는 사부 때문이었다.
감히 누가 무당 장문인을 향해 이 자식이란 말을 하겠는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 자식이란 말을 들어보았을지 그것조차 의문이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노릇은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냄새나는 도사들만 모여 있으니까 딱딱한 거지. 달리 딱딱한 이유가 있냐. 무당파도 여자 문도를 좀 받지 그러냐. 옛날에는 여자 문도들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며.
“그게..... 문제가 많아서 말입니다.”
“하긴 중이나 도사나 사내는 사내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작전은 이렇게 하자. 산적들의 화공, 대천강검진 셋, 백팔나한진 둘, 이 순서대로 밀고 나가는 걸로. 그리고 한 번 간 녀석들은 돌아오는 법 없기.”
“.......?”
일순 현진자를 비롯한 일행은 뜨악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작전이라 해서 대단한 어떤 것이 나올 줄 알았다. 아니 광풍성 군사인 주하연으로부터 언질을 받아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림과 무당파 진으로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게 그의 작전이었다.
“최고의 작전이지, 뭘 그래. 임마!”
“클, 알겠습니다.”
현진자는 낮게 웃었다. 아니 웃을 수밖에 할 말이 없었다. 최고의 작전이란 말이 맞다. 광풍성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바로 그가 말한 작전인 것이다.
“쉬어라.”
“다녀오실 때가 있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살우를 보며 현진자는 물었다. 도끼까지 챙겨드는 걸 보면 단순한 마실이 아닌 듯했다.
“희생을 최대한 줄이려면 열심히 움직여야지.”
“설마.......?”
“걱정 마라, 소란은 피우지 않을 거니가. 굴소라고 했나?”
“저도 가겠습니다.”
검을 챙겨들며 현진자가 말했다.
“여럿이 가면 재미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편히 쉬어. 쉬면서 부상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거나 고민해 봐.”
“으음!”
현진자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랬다. 지금껏 적을 치고 갈 작전만 생각했지 부상자에 대해선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는데 부상자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들을 처리할 방안이 분명히 마련되어야 한다.
팔 개월이란 긴 전쟁 기간을 생각할 때 버리고 갈 수는 없다. 제자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전부 데려가야만 한다. 각주가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부상자 전담 부서를 따로 만들지요.”
“그래야 할 것 같구나.”
무검의 말에 현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시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전부 데려가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을 듯했다. 그리고 각주가 북황련 산서지부를 찾아가는 건 부상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인 것이다.
한편, 봉루를 나선 소살우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이봉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사방은 봄기운으로 완연했다.
산서성, 과거 이곳 산서성에서 팔을 잃었고, 소령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신들을 악마로 만들었던 곳이 바로 산서성인 것이다.
인적 드문 산속 깊숙이 들어서자 소살우는 걸음을 빨리 했다. 북황련 건물 구조에 대해서는 대강 파악하고 있지만 밝은 낮에 확실히 보아 두기 위해서였다.
뒤쪽으로 빠르게 물러나는 경관을 보며 소살우는 싸늘한 미소를 물었다. 과거 같았더라면 형수의 말을 듣지 않고 무림을 초토화시켜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연무장 회의에서는 그렇게 해 버리자고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히려 중원을 굴복시켜 다스리겠다고 하는 대와선전에 찬성하고 말았다. 나이 때문이다. 팔십이란 나이가 분노와 혈기를 눌러 버렸다.
“니미럴!”
소살우는 낮게 욕설을 뱉어 냈다.
반 시진 정도를 달린 소살우는 이봉산을 마주하고 있는 낮은 구릉에 도착했다. 잠깐 주변을 살피던 그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저렇게 클 동안에 뭐했는지.”
현진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와락 짜증이 밀려왔다. 두 봉우리 사이의 평원에 수백 채의 건물이 들어차 있다. 천붕회를 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가만히 둔 현진자 일행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건물 배치도를 기억하려는 듯 한참 동안 쳐다보던 소살우는 몸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았다.
“별일이네, 왜 갑자기 그 아이 얼굴이 생각나는 건지........”
뇌리 한편에 슬며시 자리를 잡아 버린 얼굴에 소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조우령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이자 아들인 백산의 부인으로 내정하여 데려온 여인이 아닌가.
“정말 노망이 나긴 났구나.”
어이없다는 듯 제 머리를 두드리던 소살우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로 그 시각, 자신들이 광풍성의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통천연맹 산서지부는 비교적 평온한 모습이었다. 따스한 봄볕에 춘곤증을 이기지 못한 경비 무사들은 연신 하품을 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한 사정은 지부장인 굴소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하-암! 련에서 내려온 전갈은 없느냐?”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대던 굴소는 졸음을 쫓으려는 듯 밖을 향해 소리쳤다. 통천연맹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북황련 무인들은 여전히 련이라 불렀다. 아직은 남천벌을 동반자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굴소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뭐가 아쉬워 남천벌과 통합을 했는지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북황련 정예가 섬서성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하긴 사령계에서 개패다전 중인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겠지.”
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본련에서 연락이 끊긴 건 고아풍성을 감시하던 밀정들이 전부 살해당한 다음부터였다.
부하들을 편히 쉬게 하라는 명령을 끝으로 어떤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굴소는 그 이유를 사령계의 개파대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령계의 개파대전이 끝나면 시작될 전쟁을 염두에 둔 명령인 것이다.
“나도 한숨 잠이나 자 볼까.”
무겁게 쳐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한 굴소는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사령계 개파대젼이 끝나려면 삼 일이 남았고, 천금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잠을 잔 걸까. 서늘한 느낌에 굴소는 느리게 눈을 떴다. 벌써 밤이 되었는지 사위는 컴컴했다.
“이것들이 밥시간이 되었으면 깨우든지 해야지.”
“몇 번 깨우러 왔다가, 네 녀석이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그냥 잤어.”
“허억!”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굴소는 질겁한 얼굴로 침상을 쳤다. 결코 부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어깨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크윽!”
나직한 비명을 내지르며 굴소는 어깨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뚫은 것은 폭이 좁은 도신이었다.
“누구요?”
바닥을 적시는 피를 쳐다보며 굴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련주나 각 가문의 가주들보다는 못하지만 그건 나이 때문이거니 했고, 세월이 지나면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랬던 자신이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자에게.
“그건 알 것 없고, 산서지부에서 강자라고 생각되는 놈들의 이름과 자고 있는 곳을 소상히 말해라.”
“누구냐고 물었소!”
굴소의 목소리가 조금 격해졌다. 밖에 있는 부하들에게 알리고자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했다. 그랬던 그의 행동이 더 큰 고통을 야기했다.
“크윽!”
뼈마저 잘래 내고 파고든 도를 보며 굴소는 재차 비명을 내질렀다.
“놀랐잖아, 임마. 웬 목소리가 그렇게 커! 잘못했으면 네 녀석 어깨를 잘라 버릴 뻔했어.”
싱긋 미소를 지은 소살우는 굴소의 어개 깊이 파고든 혈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악!”
굴소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굴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참! 말 안 했구나. 음파를 차단시켜 두었기 때문에 암만 소릴 질러도 소용없어. 어이쿠, 너무 많이 뺐나 보나, 미안해.”
차갑게 말한 소살우는 반쯤 드러난 혈월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밀어 넣었다.
“커억! 말하겠습니다. 지금 산서지부에 있는 무인들 중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옥면마제 서수창과 건곤마 모명이 그리고 오른쪽 건물에는........”
비지땀을 흘리며 굴소는 산서지부 무인들에 대해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란 말을 처음 실감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어깨를 파고드는 도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기운에 입이 절로 떨어졌다.
어느새 굴소의 얼굴은 서리가 끼어 하얗게 변했다.
“처음 써 보는 빙공인데, 제대로 먹히나 보네.”
소살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 위해 가장 배우고 싶었던 무공이 빙공이었다. 그러다가 백산으로부터 빙천수라마공의 구결을 듣고 배우긴 했지만 한 번도 써먹지 못했다. 수화불침의 몸이 되지 더 이상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빙공을 쓰는 이유는 피를 보기 싫어서야. 넌 앞으로 삼 일 동안 발견되면 안 되거든.”
“누구요?”
죽음이 임박해서였을까. 두려움보다 상대의정체가 더 궁금했다. 아니 자신을 어린애 취급할 정도의 무인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너희 같은 놈들이 어떻게 강호 삼강의 한 곳이 되었는지 정말 궁금해. 조금만 생각하면 그냥 답이 나오는 걸 모르더란 말이야.”
“설마?”
어깨에 칼이 박혀 있다는 사실도 잊고 굴소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랬다. 내내 잊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그들을.
그들 정도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이런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겠는가.
천붕십일천마 중 광마도 소살우.
“광풍성?”
“맞아. 광풍성은 이미 강호 정복을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는 임마, 그냥 없애버리는 거지.”
슥!
굴소의 어깨를 빠져나간 혈월이 붉은 광채를 남겼다.
목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굴소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혈월을 통해 밀어 넣은 한기가 굴소의 피를 완전하게 얼려 버렸던 탓이었다.
“한 놈은 끝났고, 옥면마제라고 했던가? 옥면(玉面)이라면 잘생긴 얼굴을 말하는 거네. 역시 천자문을 배우길 잘했어.”
혈월의 도면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싱긋 웃던 소살우 신형이 꺼지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ㄳ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하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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