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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17-26)
And some men brought on a stretcher a man who was paralyze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the stretcher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in front of Jesus.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As for you, your sins are forgiven.”
).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예언의 완성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제시된다. 주님께서는 걷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시는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함께 그의 영혼까지도 치유해 주신다. 현세적이며 육체적인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모두 이루어 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 치유의 이야기는 다른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차원의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은 모두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찾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는 신경이 마비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병자가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의 의지와 힘이 부족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공덕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본당에서의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성지에서는 주일에도 한 대의 미사밖에 없지만, 본당에서는 토요일 특전미사부터 포함하면 모두 6대의 미사를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어제 저녁 미사 때에는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되더군요. 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더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어나서 세수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나 홀로 하루 24시간을 그냥 보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저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었던 것들을 생각한다면, 나 이외의 사람을 접촉하지 않고 살았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는 내 자신이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밥을 먹을 수 있고, 가전제품들 내 손으로 만지지 않더라도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두꺼운 옷을 내가 만들지 않더라도 입을 수 있지요. 그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이 나 대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것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생기고, 고통에 못 이겨 절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즉, 이 세상에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나눌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도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병의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병자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내려 보낸 그 적극적인 행동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고 병도 치유될 수 있었다고, 성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이야기하고 있지요. 다시 말해서, 내 형제의 아픔을 그저 남의 아픔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적극적인 행동이 친구인 중풍병자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에서 우리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나 역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느님 나라에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지 않을까요?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친구를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별 짓을 다한 남자들
-민경철 신부-
하느님을 찾아오는 이들을 보면 대부분 ‘도움’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찾아올 수 없는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세상일이 바쁘다면서 구원의 문제에 관심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바칠 것도 없으니까 감히
하느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장애를
가진 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지가 불편하여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였지요.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남자 몇이 그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신통력이 있는 예수님을 알고 데려가달라고 부탁을
했을까? 몸은 불편하지만 금력은 있어 돈으로 사람을 샀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데, 그 처지가 안타까워 뜻 있는 몇 사람이 싫은데도 억지로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을까? 복음서는 답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 곁에는 지붕을 타고, 기와를 벗겨내고, 낑낑거리며 건물 안으로
그를 내려보냈던 별 짓을 다한 믿음의 남자 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영숙 수녀(사랑의 씨튼 수녀회)-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평생 병원이라곤 가 본 적이 없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뇌졸중, 흔히 말하는 중풍이었습니다. 퇴원 후 우리는 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매달렸습니다. 아버지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통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환자의 가족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자리를 털고 두 발로 땅을 굳게 딛고 서서 한 걸음씩 떼는 것이고, 내 손으로 숟가락을 쥘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고, 어둔하지 않은 똑똑한 발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절절히 느끼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눈물로 매달리며 치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은 사람들로 인해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중풍병자의 평상을 들고 온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사람들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도 재촉을 받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을 선으로 이끄시는 그분을 향한 굳은 믿음을 다짐하며 새로운 발걸음을 떼었으면 합니다.
공동체 믿음의 위력
-이수철신부-
개인의 믿음은 미약할 수 있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공동체는 마치 ‘믿음의 샘’과 같아
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를 둘 때 우리는 늘 푸른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의 믿음을 실감할 수 있는 게 공동 전례며,
이런 전례를 통해 공동체의 믿음을 흡수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공동전례가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거의 이런 관점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사죄를 선언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어 결정적 육신의 치유선언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공동체 형제들의 좋은 믿음 덕분에
영육의 치유와 더불어 전인적 구원을 체험한 중풍병자입니다.
자신의 죄나 나약함에 좌절감에 빠질 때,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얼마나 고마운지요!
다음은 제가 좋아하는 미사경문 중 평화의 예식에 나오는 기도문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오늘 복음 후반부의
치유 받은 중풍병자의 기뻐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주님의 치유선언에 이어
‘그는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는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합니다.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했다.’에 초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걱정이나 좌절감에,
또 크고 작은 상처에 위축되어 마음을 펴지 못하고
마음의 중풍병자 되어 살아가는 지요.
마음을 펴고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영육의 치유의 지름길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를 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언자 이사야의 권고대로 광야 인생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성체성사의 좋으신 주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어 우리 모두를 격려하시며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아멘
좋은 이웃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강영구 루치오 신부(마산교구)-
그대에게
당신은 당신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의 손을 내밀어줄 이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기는커녕 당신이 당하는 고통을 고소하게 여기면서
더 깊은 구렁으로 밀어 넣으려는 이웃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당신은 불행합니다.
평소에 당신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준다면,
당신도 당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좋은 이웃들을 가지게 됩니다.
당신이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외면하면,
당신이 곤경과 시련에 빠졌을 때 이웃들도 당신을 외면합니다.
중풍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지내는 환자이지만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이웃이 곁에 있기에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환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병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좋은 이웃들의 믿음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새 삶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오늘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간절히 간절히
-박동진 신부-
‘지성이면 감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어쩌다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함없는 사실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외국어에서 ‘간절함’
(영어의 supplicate, 프랑스어의 supplier)은 ‘바닥’(sub)에 완전히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린’(plier) 모습입니다. 마치 깨끗한 물을 떠놓고 두 손을 싹싹 빌어 소원을 비는
모습과 다를 바 없고, 동냥하는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내밀어 그 간절함을
표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그를 쭉 지켜보던 이웃들의
간절한 마음이 드디어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그를 보여 줍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때의 ‘섭’(攝)이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귀를 쫑긋 세우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손까지 귀에다 대고 들으시는
분이기에, 온전히 바닥에 굽히고 간절히 청하는 이의 기도를 굽어 들으십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을 쓰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든, 간절한 이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의 답변은 오로지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중차대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간절한 이의 소원과 그것에
화답하는 이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간절히 청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진정한 것이라면, 굽어 살피시는
분의 답변은 어쩌면 여러 다른 표현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유설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
◆왜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 먼저 용서부터 하셨을까? 용서란 그 자체로 기적을 이루는 것일까? 사실 용서는 정서적·영적·육체적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캐럴린 메이스는 워크샵 중에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한 참석자가 용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거부반응을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의 반대에도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고 집을 담보로 보증까지 서주었는데 그 친척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었던 분이다. 게다가 건강과 직장까지 잃게 되자 더더욱 그 친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란 다른 이가 잘했다거나 옳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캐럴린은 용서란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상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상처 안에 숨겨진 선물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큰 상처라 하더라도 그 안에 숨겨진 선물이 있다. 적어도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지 않은가? 우리가 한 가지라도 숨은 선물을 찾게 된다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받은 상처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된다.
그날 그 남자는 강의를 듣고 더이상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인생이 변하고 그 친척을 완전히 용서했으며 건강도 찾고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번 대림절엔 내가 용서할 이는 누구인지, 혹 나부터 용서해야 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용서가 힘들다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그 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총을 하느님께 구하자.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해주시는 예수님
- 경규봉신부(전주교구)-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은 뛰어난 스승이셨기 때문에 그들까지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던 것이다. 그때에 몇몇의 남자들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 예수님 앞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군중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다. 팔레스티나의 가옥은 대부분 흙벽돌로 만들어진 단층 슬래브 형으로, 집 한쪽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사람들은 지붕에서 어느 정도 일상생활도 할 수가 있었고 외부인도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던 것이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행동한 것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크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중풍병자를 사랑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행위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시고, 행위 속에 담긴 믿음을 먼저 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신다. 환자를 메고 온 그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하도록 한 것이다. 믿음의 길이란 결코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가는 것이다.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가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병을 고쳐주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의 병만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보다 근원적인 질병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써 그의 영혼을 깨끗이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까지 치유해주신 것이다. 그의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치유해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는 하느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사람, 구원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시자 즉시 일어나 평상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서기 전까지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는가! 중풍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로 인하여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에게 삶이란 지옥과 같은 것이며,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죽지 못해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했을 것이다. 그는 어둠에 사로잡혀 불안하고 우울하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음속 깊이 자신을 괴롭히던 죄에서 해방되고, 중풍이란 중병에서 해방되었다. 사실 중풍이란 병은 당시 인간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었고, 그 병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고쳐주실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을 만난 것이다. 비록 그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은 몰랐을지라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삶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람들 역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처럼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 앞에 나가기만 하면, 그처럼 우리를 고쳐주시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일수록, 병과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수록 주님 앞에 나가는 신앙인이 되자. 그리하여 용서받고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양승국신부-
<평범함의 은총, 평범함의 행복>
꼼짝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저를 검진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큰 일 났다’며 즉시 입원시켰습니다. 그리고 ‘절대안정’이란 팻말을 제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았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어느새 간호사 선생님들이 달려와서 혼냈습니다. 멀쩡하게 잘 돌아다니다가 꼼짝 없이 갇힌 신세가 되니 정말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발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갇혀 있던 한 형제가 큰 외과수술을 받게 되어 외부 병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도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일이 얼마나 복잡하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수감자 본인에게나, 따라붙은 사람들에게나 서로가 얼마나 부담스런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화장실 갈 때도 교도관들께서 따라붙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산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정녕 큰 은총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삶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평상에 누인 채로’란 표현을 통해서 중풍이 이미 많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발병된 후, 한번 나아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제 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이 악몽 같은 삶이 언제 끝나나, 민폐 끼치기가 죽기보다 싫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토록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며 한탄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이 마을, 저 마을 전도를 다니는데, 그의 능력이 신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낫게 한다는 소식입니다.
우선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병자를 그곳까지 어떻게 옮겨가는가 하는 과제가 큰 고민거리로 대두되었습니다.
병세가 어지간하면 누군가가 교대로 부축을 하면서 힘겹게나마 걸어서 갈 수 있을텐데, 병이 워낙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휠체어도, 자가용도, 구급차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참으로 곤란했습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하나 고안해냈습니다. 병자를 옮겨가기 위해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막대를 달았습니다. 들것을 만들어서 환자 눕혔습니다. 축구시합 때 부상당한 선수들을 라인 밖으로 옮겨갈 때 사용하는 들것 모양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교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 앞에서는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대전 엑스포 입장할 때 줄 섰던 것 보다 더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다가는 적어도 이박삼일은 기다려야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한 병자에게 치명적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편법이지만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지붕을 통해 병자를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방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 해도 해도 너무한 일, 도무지 예의가 아닌 일,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눈여겨보십니다.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팀플레이’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끝까지 병자를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의 지극정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치유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 구원받고자하는 그들의 능동성,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마음 앞에 예수님의 마음 또한 움직입니다.
오늘 제 안에 들어있는 중풍병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을 바라봅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자비, 연민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박상대신부-
대림시기 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복음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하지만 딱히 어떤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만 선택된 부분이 장(章)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독된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중 제10주간부터 34주간 사이에 봉독된 적이 없는 대목을 택한 경우가 많다. 굳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병자와 소경치유, 죄사함 등의 기적과 억눌린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서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킴으로써 믿음이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여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림시기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항상 독서에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봉독되는 독서가 거의 이사야예언서에서 발췌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사야예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집필된 세 권의 예언서가 한데 묶여 있다. 제1이사야(1-39장)는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자요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충실할 때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의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어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임마누엘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2이사야(40-55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BC 587-538)를 배경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 해방과 자유를 제시한다. 특히 유명한 네 번의 “야훼의 종의 노래”를 통하여 야훼의 종이 바로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사할 고난과 죽음을 불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혀준다. 이 또한 신약의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된 모습이다. 제3이사야(56-66장)는 이스라엘이 귀양살이를 끝내고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됨을 예언하면서 이로써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선언한다. 이 또한 고난과 죽음을 불사한 신약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와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이사 35,1-10)를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독서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말이 아니라 실재(實在)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른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환하게 트여, 그 길이 ‘거룩한 길’이라 불린다고 했다. 자, 이제 복음을 보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복음 안에 성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세상 안에 계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시는데 중풍병자 하나 고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거룩한 길’을 세우는 데 있다. 거룩한 길이란 곧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의 반대자들에게는 중풍병자가 단지 치유되어 ‘일어나 걸어가는 것’(24절)에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의 표징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믿음의 태도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비록 그 믿음이 주위의 도움을 받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병을 치유 받았음은 물론, 그 안에 죄사함을 통한 ‘정결하고 거룩한 길’을 닦고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