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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68)
[두 팔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시킬 거다]
풀벌레 소리조차 지워진 숲에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희미한 달빛 사이로 움직이는 수많은 그림자들. 통천연맹 산서지부를 공략하기 위해 광풍성을 떠나온 불도각 무인들이었다.
“신호는.......”
어둠에 휩싸인 산서지부 건물을 쳐다보며 현진자는 중얼거렸다. 이곳에 도착한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초조한 가운데 건물에서 불길이 오르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현진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문득 걱정스러웠다.
복수를 위해 나선 소림 승려들과는 달리 무당파 제자들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처음 겪는 전투의 중압감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볼일 보러 가는 제자들의 모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각주, 서둘러 주십시오! 이러다.......왔다!”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현진자의 얼굴이 대뜸 환해졌다. 멀리 건물에서 불길이 이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출발한다!”
전면으로 몸을 날리며 현진자는 낮게 소리쳤다. 현진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당파 제자들과 소림 승려들은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당 제자들은 대천강검진을 펼쳐라!”
“소리 제자들은 백팔나한진을 펼쳐라!”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무당파 무인들과 소림 승려들의 행동이 기민하게 변했다. 나아가는 진형이 조금씩 변하는 듯하더니, 다섯 개의 진식이 만들어졌다.
맨 선두에 백팔나한진 하나가 구축되었고, 그 뒤로 세 개의 대천강검진이,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백팔나한진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진에 참여하지 않은 무인들은 백팔나한진의 뒤를 따랐다.
“녹림수로채 무인들은 전면으로 나서라!”
백오십 장 남겨둔 지점에서 현진자는 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존명!”
현진자의 고함소리에 백여 명 무인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활을 들고 있는 그들은 태행산을 떠나온 녹림수로채 인물들이었다. 경공을 펼쳐 나아가면서도 그들의 동작은 신속했다. 한 인물이 화살을 시위에 걸면 대기하고 있던 동료가 화살 끝에 불을 붙여 준다.
“쏴라!”
백여 장 거리까지 다가가자 누군가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 소리가 터졌다.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백여 대의 불화살은 장관을 연출했다.
“적이다! 적이 쳐들어온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날아오는 불화살을 발견한 산서지부 무인 한 명이 해쓱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적이라니, 무슨 소리냐?”
부하들을 지휘하며 불을 끄던 당진(唐陣)은 고함을 내질렀다.
턱! 턱턱턱! 턱턱!
당진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수백 개의 불화살이 연거푸 날아와 각 건물에 틀어박혔다. 곧이어 불화살이 박힌 건물에서도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산서지부 무인들은 무장을 하고 정문으로 나서라!”
질겁한 당진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적이라니, 무슨 일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림 최강 세력인 통천연맹으로 거듭난 단체가 바로 북황련이 아니던가. 그런 곳을 공격하는 자들이라면 정신병자가 분명할 터였다.
“빌어먹을, 지부장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당진은 무기를 챙겨 지부장 처소로 향했다. 벌서 삼 일째 지부장을 비롯한 다른 조장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빠르게 몸을 날리던 당진의 신형이 멈췄다. 열 명이나 되는 조장이 한꺼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혹시.......!”
더구나 밖에는 적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 누군가에게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그 혹시가.”
“허억! 누.......”
우두둑!
목이 돌아가 버린 당진은 마을 맺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끝!”
당진의 시체를 던져 버린 소살우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뒤이어 둥실 떠오른 소살우의 신형이 정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활을 계속 쏴라! 속도를 높여라!”
궁수를 타고 넘어 전면으로 나가며 현진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와-아!”
천둥 같은 하성이 벌판에 메아리쳤다. 현진자를 뒤따라 녹림수로채 무인을 앞질러 나아가는 백팔나한진 위로 황금빛 광채가 떠올랐다. 사방을 찬연히 비추는 백팔나한진 속에서 장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통천연맹 산서지부 정문 앞에 다다른 순간, 백팔 개의 곤이 전면을 향해 죽 내밀어졌다.
콰앙! 콰과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북황련 시절부터 시작하여 오십 년간 자리를 지녀왔던 철문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 위를 광풍성 무인들의 발이 밟고 지나갔다.
“와아! 죽여라!”
소림 승려들이 들어서자마자 안쪽으로 수백 명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나왔다.
“곧장 북문으로 치고 나간다!”
검을 뽑아 들어 통천연맹 무인들을 향해 휘두르며 현진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개떼는 지옥으로!”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백팔나한진에서 황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곧이어 그 광채는 금빛 찬란한 불상으로 변했다.
“아미타불!”
불호가 아니었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진언이었다. 백팔나한진 머리 위에 있던 거대한 불상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부좌한 상태로 불상은 통천연맹 무인들을 향해 양팔을 휘둘렀다. 불상의 손끝에서 나온 광채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크악!”
“아악!”
황홀한 죽음이었다. 눈부신 광채에 잠깐 눈을 감는 사이 혼(魂)은 육신을 떠나고 있다. 황금빛 광채 사이로 선홍빛 피가 스며들었다.
불상이 전부가 아니었다.
새하얀 광채를 발하는 거대한 검이 불상의 뒤를 이어 사방을 강타했다. 대천강검진에 의해 만들어진 기검(氣劒)이었다. 무당파 무인 칠십이 명의 내공을 받아들인 기검은 통천연맹 무인들을 무차별하게 도륙했다. 진으로 펼치는 이기어검술이었다.
“막아라!”
무림 최강 세력의 일원이라는 자존심은 강했다. 두 개의 불상과 세 개의 기검이, 동료들을 잔인하게 도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천연맹 무인들은 침착했다.
수적인 우세 때문이었다. 정문으로 치고 들어온 인원수는 기껏 오백여 명 정도, 산서지부 인원수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상대가 소림이고 무당이라지만 이대 일의 싸움이라면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지휘자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산서지부 무인들은 방어 진영을 구축하여 대항했다.
쌍방 간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십여 명씩 조를 이룬 북황련 무인들은 백팔나한진과 대천강검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차차장! 창창!
“크악!”
“으악!”
“아악!”
그러나 수백 년 전부터 천하제일로 인식되어 온 두 진은 강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무기를 앞세우며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으나 백팔나한진과 대천강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허공중에 머물던 불상과 기검의 색이 희미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산서지부 무인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수십 개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끊어진 팔다리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잘린 부위에서 선홍빛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물러서지 마라, 우린 북황련 무인들이다!”
통천연맹 무인들은 필사적이었다. 잘린 동료들의 시체를 넘어 계속하여 백팔나한진과 대천강검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것 때문이었군.”
녹림수로채 무인과 진식에 참여하지 않은 무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뒤편으로 물러나 있던 소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지 말고 치고 나가라고 했던 형수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백팔나한진과 대천강검진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지만 광풍성 무인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한 손으로 열 개의 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비로소 깨달았다. 빠르게 움직이며 적을 도륙하고 있지만 광풍성 무인 전부를 보호할 수가 없다.
“각주님,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선두로 나서 주십시오!”
그 참에 전면에서 현진자가 다가오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몸은 통천연맹 무인들의 피로 범벅이었다. 늘어진 도복에서 뚝뚝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는 바닥을 차며 전면으로 내달렸다.
“불도각 무인들은 나를 따라라!”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소살우는 통천연맹 무인들을 향해 혈월을 횡으로 그었다. 도면을 타고 붉은 달이 떠오르고 혈월의 끝에서 솟구친 일 장 길이의 도강은 진득한 살기를 사방에 뿌렸다.
“끄아악!”
“아아악!”
거칠 것이 없었다. 혈월의 끝에서 솟구친 도강은 바람이 되어 전면을 휩쓸었다.
“타핫!”
환하게 웃는 소살우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터져 나왔다. 왼쪽으로 향했던 혈월을 들어 올려 오른편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휘리링!
바람 소리인 듯, 혈월에서 미약한 소리와 함께 초승달 모양의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두 개의 달이 허공을 유영했다. 혈월에서 솟구친 둥근 달고, 전율적인 살기를 간직한 반 장 크기의 거대한 초승달이 바람처럼 무인들 틈바구니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혈월보다 검붉은 피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소살우의 신형은 바람이었다. 아니 태풍이었다.
먼저 나아가는 붉은 초승달은 심령으로 조정하고, 혈월을 좌우로 연거푸 휘둘렀다. 혈월의 빈자리는 두 다리가 대신했다. 피가 튀고, 잘린 팔다리가 떠올랐다. 몸뚱이를 잃은 머리가 나뒹굴었다. 혈월의 움직임을 따라 무수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악인은 지옥으로!”
소림 승려들의 외침이 뒤를 따랐다.
백팔나한진이 황금빛 광채를 뿜어낼 때마다 십여 명씩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몇 개의 건물을 지나자 커다란 연무장이 나타났다. 광풍성 연무장보다 더 큰 것을 보면 북황련 규모를 짐작케 하였다. 연무장 또한 많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서둘러라!”
대연무장을 향해 뛰어 나가며 소살우는 소리쳤다.
“와아!”
소살우가 몸을 날림과 동시에 통천연맹 무인들도 고함을 지르며 마주 달려왔다.
“타핫!”
전면으로 치달리던 소살우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이 터지고, 붉은 광채를 발하는 혈월이 허공을 날았다.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혈월은 무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의지로 도를 조정하는 이기어도술이었다.
창! 챙챙챙!
“크악!”
“컥!”
검, 도, 창이 무더기로 잘렸다. 혈월은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때로는 홀로 돌았고, 때로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뒤를 붉은 광채를 갑옷처럼 두른 인형이 따랐다. 소살우의 몸 또한 혈월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따랐고, 피가 튀었다.
“서둘러라!”
무인들의 숲을 직선으로 관통하며 소살우는 고함을 내질렀다.
외침은 소살우의 입에서만 흘러나온 게 아니었다. 뒤편에 있는 현진자의 입에서도 광포한 고함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진자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벌써 상당수 수하들이 대열을 이탈하고 있다. 전부가 숨이 끊어진 자들이다. 동료의 시체를 버려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부상자를 부축해라!”
“이야합!”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지르는 순간 뒤편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밀려들었다. 세 명의 적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초식을 펼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현진자는 주저앉듯 자세를 낮췄다. 순간 그의 시야에 여섯 개의 다리가 확연히 잡혔다. 현진자의 태청검이 푸른 광채를 뿌렸다.
“커억!”
“억!”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날아오던 탄력 때문에, 다리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멈추지 못했다. 폭포처럼 피를 쏟아 내며 불도각 무인들을 향해 날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태청검은 다시 한 번 푸른 광채를 토해 냈다.
“서둘러라!”
그들의 죽음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현진자는 고함을 내질렀다.
“서둘러라! 처지지 마라.”
서로를 북돋으며 불도각 무인들은 백팔나한진 뒤로 따라 붙었다.
피와 죽음과, 비명과 불빛이 그리고 달빛이 함께 하는 밤, 이곳은 통천연맹 산서지부였다.
동녘은 뿌옇게 밝아 어느덧 아침으로 치닫고 있었다.
만년설을 쳐다보며 우회하여 걷기를 두 시진, 백산 일행은 넓은 벌판과 마주하는 곳에 도착했다. 늪지대인 듯 벌판엔 사람 키 정도 되는 갈대들로 무성했다.
“이곳인가?”
갈대숲을 바라보며 백산은 숨을 토하듯 말했다. 적암평과 마찬가지로 갈대밭에서는 눅눅한 습기와 서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갈대밭 어딘가에 적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검운비!”
전면 갈대숲을 향해 백산은 소리를 질렀다.
“흥!”
“어?”
이십여 장 밖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리자 백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숨어 있어야 할 검운비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뇌우가 허락을 했나 보네?”
이내 환한 미소를 머금은 백산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검운비가 일어남과 동시에 갈대밭에서 수백 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적게 잡아도 오백 명 이상은 되는 듯했다.
“그를 교주로 인정했지만, 혈마문주는 나다. 혈마문 제자들을 동원할 권리는 내게 있고.”
검운비는 차갑게 소리쳤다. 실상 혈마문 출병이 뇌우의 귀에 들어간다면 하극상으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귀광두가 강하긴 하지만 상대의 인원수는 기껏해야 십여 명. 광풍성으로 돌아가면 영원히 그를 없애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출병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출병을 결심한 다음 검운비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수라구노였다. 지저사령계에서 막내를 잃은 그들을 설득하기는 쉬웠다.
사조인 수라마종이 뇌우를 만나러 간 사이에 은밀하게 병력을 출병시켰다. 그동안 귀광두 일행의 행로를 주시했고, 이곳을 지나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옆에 있는 강시들을 믿은 모양이군.”
턱으로 수라구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완전한 인시가 되었다는 사실은, 수라구노의 막내인 노철문(盧鐵汶)과의 대결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애써 숨기려 했지만 그는 인성이 있었다. 구양중이 말한 인시(人屍)였다. 강시대법을 통해 무공의 극에 도달한 무인들.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놈!”
검운비 오른 편에 서 있던 매부리코 노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오백 년 전에는 탈혼장(奪魂掌)이란 별호로 불렸던 하만리(河萬里)였다. 하만리의 옷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주체할 수 없는 살의가 절로 내공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이다.
“말은 바로 하자. 오백 년 전에 살았던 괴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 그게 강시지 인간이냐?”
“좋을 대로 생각해라, 놈! 하지만, 네놈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반드시 죽여주겠다.”
“내가 할 말을 강시, 네가 하는구나. 나도 너희 혈마문도를 만나고 싶었다. 칠백 년 전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혈마라고 불렀던가.......”
“혈마(血魔)?”
하만리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혈마, 수라천가의 십삼 대 가주로 혈마겁(血魔劫)의 주역이었던 분이다. 칠백 년 전에 생존했던 인물을 귀광두를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참! 마을 안 했구나. 내가 바로 혈뇌문의 당대 문주야.”
“쿡! 혼자밖에 없는 놈이 문주는 무슨.”
하만리는 낮게 웃었다. 광혈지옥비의 주인이 혈뇌문 문주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광두를 포함하여 전부 열 명. 혈뇌문의 문주가 아니라 일 대 파멸안이 다시 살아온다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귀광두가 죽는다는 사실이.
“강시라서 역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구나. 혈뇌문 문주가 혼자만 나타날 거라 생각했더냐?”
“자신 있으면 불러와 봐라, 놈!”
하만리는 비릿하게 웃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칠백 년 전에 사라졌던 문파가 혈뇌문이다. 문파로 지속된 것도 아니고, 중원 전역으로 흩어졌던 그들이 아닌가.
“철웅아, 니네들 부른다!”
“응?”
검운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에서 무인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대충 보기에도 이백여 명은 넘은 듯했다. 더구나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범상치 않았다.
검운비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넓게 포진하며 다가오는 그들은 전부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있다. 가문 기록에서 보았던 혈뇌문도들의 표식이었다.
“제법 사람을 모았군.”
검은비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오백여 명의 수하들을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럴지도....... 칠백 년 전에 시작했던 전쟁을 마무리 지어 보자. 두 문파 문주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저념ㄴ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백산은 속삭이듯 말했다. 칠백 년 전, 마신가의 음모에 의해 싸웠다고 했지만, 이유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 또한 칠백 년 전의 일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으로 다시 만났으니 싸울 뿐이고, 강호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싸울 뿐이다.
선두의 철웅을 기준으로 이백여 명 혈뇌문 문도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푸른 갈대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혈마문 무인들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졌고, 십여 장 남겨둔 지점에 도달하자 철웅은 수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쳐라!”
“와아!”
거친 살기를 뿌리며 양편 무사들은 지면을 박찼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견디지 못한 갈대들이 눈꽃처럼 사방에 휘날렸다.
“금강파천혈(金剛破天血)!”
혈마문 문도 오 장 전면에 도착한 철웅은 수중의 혈묘를 회전시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금강파천혈, 혈묘로 펼치는 유일한 무공이다. 붉은 광채를 사방으로 뿌리며 혈묘는 혈마문 무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챙! 챙! 챙! 챙!
검이나 도로 혈묘를 막아 낸다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철웅은 사황(四皇)보다 더 강자. 혈기를 머금은 혈묘는 폭풍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크아악!”
“아악!”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한 선홍빛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단 사숙조! 저 놈을 맡아 주십시오.”
질겁한 검운비는 곁에 있는 노인을 향해 황망히 말을 건넸다. 혈수(血手) 단석광(但石廣), 수라구노의 여덟째였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단석광은 측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광치야!”
단석광을 흘끔 쳐다보던 백산은 기이한 얼굴로 수라구노를 주시하는 광치를 불렀다.
“말해!”
“오백 년 동안 제강된 인시는 내공이 어느 정도냐?”
저들이 인시임을 알고 나서부터 줄곧 궁금했던 저이다. 과거 수라구노의 막내인 노철문과 싸웠을 때의 경험으로 보면 몸은 불괴지신에 달한 듯했지만 내공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다고 내공이 저절로 늘어나는 건 아니지. 그럼 비강(飛?)은 천 년 내공을 지녀야 하는데 아니잖아. 내공을 만들어 내는 기본은 심법이라고. 그런데 비강이나 인시는 심법을 운용하지 않았잖아.”
“그런가? 그럼 너는 가서 철웅이나 도와라.”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혈뇌문 무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대장. 난 인시를 꼭 보고 싶었다고, 대가리는 물론이고 몸을 갈라서 해부를 해 봐야 한단 말이다. 야! 너 이쪽으로 와!”
백산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광치는 재빨리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그가 가리킨 사람은 수라구노의 일곱째인 마영권(魔影拳) 곡몽현(谷夢賢)이었다.
“죽여주겠다!”
광치의 지목을 받은 곡몽현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 냈다. 오백 년 전에 이름을 날렸던 몸이다. 그런 자신에게 너라니.
대형인 하만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곡몽현은 광치를 따라 몸을 날렸다.
“하연아, 애들 데리고 가서 정리나 하고 와.”
“알았어요.”
백산을 가만히 쳐다보던 주하연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러자 설련과 구양중 그리고 허공에 숨어 있던 유몽 일행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망치는 놈은 가장 먼저 죽는다.”
속삭이듯 말한 백산은 지면을 슬쩍 찼다.
“타핫!”
그와 동시에 수라구노 여섯 명은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뿌렸다.
파앙!
여섯 명이 동시에 뻗어 내는 강기와 백산의 몸이 부딪치자 강렬한 폭음이 처져 나왔다. 수라구노 또한 만만한 고수가 아님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한 수였다. 무상신법을 동원해 기습한 백산의 공격을 막아 냈을 뿐 아니라, 되돌아오는 반발력을 이용하여 수라구노는 어느새 이 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건방진 놈!”
하만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조금 전 일곱째를 불렀던 노보다 더 광오한 놈이었다. 제 죽을 걸 걱정해야 할 놈이 도망치면 죽는다니. 문득 맹렬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네놈을 먼저 죽이고, 네 계집은 부하들에게 던져 주겠다. 발가벗겨서 말이다.”
“가장 먼저 널 해강시키기로, 결정했다.”
고함 소리가 끝나는 순간 불은 덩어리로 변한 백산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어림없다 놈!”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산이 가공할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하만리는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일순 허공에는 거대한 크기의 검은 손바닥이 나타났다. 온통 검은 광채를 뿌리는 그것은 하만리에게 탈혼장이란 별호를 선사했던 탈혼마장(奪魂魔掌)이었다.
“만우뢰(萬雨雷)!”
하만리의 고함 소리에 이어 둘째인 팔비수(八臂手) 허위명(許偉命)이 양손을 비쾌하게 뿌렸다. 짧은 시간차를 둔 공격. 대형인 하만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한 수법이었다.
“너희들은 날 너무 몰라!”
빛살처럼 다가가던 백산의 신형이, 검은 손바닥 앞에서 팽이처럼 돌았다.
콰앙!
검은 손바닥과 붉은 기운이 부딪치며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두 기운에 의해 생성된 힘이 파도처럼 퍼져나가며 주변 갈대들을 짓이겼다. 바로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이 광포한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타핫!”
절묘한 합격술이었다. 탈혼마장을 막아 냈으나 강기를 잔뜩 머금은 수십 개의 암기는 남아 있다. 그 암기 공격을 받아 내는 순간을 노리고, 네 명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혈영탄(血影彈)!”
뒤이어 검운비의 입에서도 통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놈! 어디로 빠져나갈 거냐.’
장력을 뿌리는 검운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만우뢰의 암기부터 시작하여 무려 세 겹의 공격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다.
더구나 놈과의 거리는 이 장.
광혈지옥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리인 것이다.
“쿡!”
백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무상신법을 전력으로 펼치지 않았던 것이다.
“응?”
나직한 코웃음 소리에 검운비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압력이 쏟아지는 곳에서 코웃음 소리라니. 문득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숙조.......허억!”
하만리를 부르던 검운비는 다급한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혈운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던 탓이었다.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그것은 귀광두였다.
비단 놀란 사람은 검운비뿐만이 아니었다.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채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던 하만리는 더욱 놀랐다. 설마하니 공격을 받아치지 않고 빠져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공격이 아니던가.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거칠게 양손을 뿌렸다. 그러나 양손을 뿌렸다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크아악!”
어정쩡하니 손을 내민 채 하만리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순간 하만리의 얼굴에서 생기가 급속하게 빠져나갔다. 백산의 오른손에 있던 사천비가 그의 어깨를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으으!”
하만리는 신음을 흘렸다. 어깨를 관통 당했을 뿐인데 급격하게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며 내공이 모아지지 않았다.
“강시를 해강시키는 방법은 이마에 있다고 하더구나.”
흘끔 하만리를 쳐다보던 백사는 뇌룡사로 그의 목을 빠르게 감아 돌렸다.
“멈춰라!”
“이놈!”
거친 고함을 지르며 검운비를 비롯한 여섯 명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전력을 다한 그들의 공격이 백산의 등을 향해 밀려갔다.
순간, 빙그르르 몸을 돌린 백산은 하만리의 신형을 불쑥 내밀었다.
“헉!”
“허억!”
헛바람을 들이킨 여섯 명은 재빨리 내공을 거둬들였다. 순간의 멈칫거림은 곧 죽음을 불렀다. 더구나 백산이 가진 무기는 금강불괴지신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광혈지옥비.
그의 사지에서 튀어나온 광혈지옥비가 여섯 명을 향해 빨랫줄처럼 튀어나갔다.
“커억!”
“컥!”
석상처럼 멈춰선 수라구노 다섯 명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쳐다보았다. 심장을 관통해 들어간 것은 광혈지옥비가 아니었다. 광혈지옥비보다 먼저 몸을 관통한 기운은 도강이었다. 다섯 자루의 비도 끝에 솟구친 일 장 길이의 도강.
“검운비, 너는 살려 줄 거야. 두 팔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시킨 다음에 말이다.”
중얼거리듯 말한 백산은 양손을 가차 없이 당겼다.
툭! 툭! 툭! 툭!
검운비를 제외한 여섯 개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망연한 눈으로 서 잇던 검운비의 두 팔이 떨어졌다.
“으으!”
바닥으로 떨어진 양팔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검운비는 덜덜 몸을 떨었다. 마치 꿈같았다. 수라구노 여섯 명이면 하늘이라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놈을 잡지 못했다.
아니 눈으로 좇지 못한 경공에 무공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내가 그랬잖아. 너희들은 날 너무 모른다고.”
차갑게 검운비를 노려보던 백산은, 그의 혈도를 눌러 지혈을 시킨 다음 단전을 향해 오른발을 내질렀다.
퍼억!
“크아악!”
검운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십 년간 쌓았던 내공이 사라지면서 오는 고통은 팔이 잘린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살려 준다고 했으니까 살려 주마. 가서 뇌우에게 전해라. 중원을 떠나라고. 사령계 쥐새끼들을 데리고 중원을 떠나지 않으면 너처럼 될 거라고 말이다.
바닥에 떨어진 검운비의 팔을 들어 그의 요대 사이에 끼워 넣어준 백산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검운비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무참히 죽어 가는 부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양팔과 단전에서 밀려오는 고통 때문이었다.
“전하겠다, 귀광두. 수라마종 사조님께 전하고, 뇌우에게 전하겠다. 그런 다음.......죽겠다.”
검운비는 몸을 돌렸다. 사령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살려주었다는 걸 알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망가진 몸이고, 미련을 두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누가 죽고, 누가 살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수라사종 조사께 복수를 부탁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검운비는 힘없이 사령계를 향해 걸었다.
갈대밭에서 벌어진 전쟁은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몇 명 남지 않은 혈마문 무인들은 허공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온 검에 죽임을 당했고, 남아 있는 사람은 광혈지옥비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어느 순간, 갈대밭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빌어먹을.......’
주변을 둘러보던 백산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대부분의 적을 주살했지만 혈뇌문 문도들 또한 상당수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이 그들은 죽고 말았다.
문득 지금 하는 전쟁이 잘하는 짓인지, 저들을 전쟁터로 끌어들이는 게 옳은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오빠!]
[알았다.]
질책 어린 주하연의 전음에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일도 아니고 숱하게 겪은 일이 아닌가. 더 이상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아닌가.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리라.
“사망자는 이곳에 묻는다! 부상자는 지정된 녹림수로채 산채를 찾아가고 나머진 나를 따른다!”
고함을 지른 백산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명이 죽었는지, 누가 얼마나 다쳤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나면 죽은 자는 묻어 줄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갈 것이다. 부상을 당한 자는 녹림수로채 산채로 보내 치료를 할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즐독 ㄳ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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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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